제22화
나비에 러브원은 라파엘의 믿을 수 없는 지원에 떨떠름한 기분으로 도서관 구석에 자리했다.
그와의 몇 번의 만남으로 라파엘이 제게 눈곱만큼의 호감도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러니 거래를 하려 했다.
라파엘이 비숏과 이어질 수 있게 도울 테니, 그에게도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받아들일 거라 기대했으나, 예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라파엘은 자신이 황태자와 이어질 수 있게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전개였는데, 이제는 황당하기까지 했다.
-13일의 금요일 저녁에 무도회장에서 책을 읽어. 반드시 눈에 잘 띄는 곳에서.
라파엘은 미친놈 같은 행위를 주문했다.
이걸 해내지 못한다면 자신의 원조는 끝이라며 신신당부했는데, 나비에는 얼굴에 피가 몰려 펑 터질 것만 같았다.
그 짓을 진짜 하라고? 그건 진짜 아니잖아.
언제나 남들의 시선을 의식했고, 주변에 녹아드려 애를 썼다. 최고 인기인이면서도 분위기 메이커였던 그녀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시켰다.
무도회에서 책을 읽으라니.
그건 나비에가 머리 속에 그릴 수 있는 최대의 미친 짓이었다.
주변의 시선을 완벽하게 무시해야 했고, 스스로 무도회의 무드를 박살 낸다는 걸 감수해야 했다.
-이거 하나면 바로 직빵이야. 무조건이다.
나비에는 라파엘을 믿어야 하나 고민했다.
본래라면 검토할 가치조차 없는 헛짓거리였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라파엘은 소문으로 들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것도 거진 긍정적인 쪽으로.
“하아….”
한 번.
딱 한 번만 믿어 보기로 정했다.
여태 황태자는 아카데미 내부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한 적이 전무했다.
만약에, 그날 정말로 황태자가 등장한다면 책을 읽기로 했다.
“하아. 미치겠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 한 다음 조심스레 욕을 내뱉으며 새로운 고민거리를 껴안았다.
미친 짓을 하러 무도회에 참석하는데 드레스는 뭘 입어야 하지? 늘 그러했듯이 화려한 걸 입어야 하나?
그러면 더 눈에 띌 거 같은데.
근데 그 짓을 할 거면서도 눈에 띄지 못한다면, 손해가 막심했다. 그게 괜찮을까?
“진짜 미쳐버리겠네.”
나비에는 심호흡을 하고 끓어오른 흥분을 식혔다. 준비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녀는 감겨오는 눈꺼풀을 온 힘을 다해 들어 올렸다. 눈동자를 힘겹게 책의 철자에 갖다 붙이며 내용을 암기했다.
현재 시각은 12시.
평소라면 갖가지 이유를 대며 잠들었을 시간이었다.
키 성장은 멈췄어도 뼈는 30세까지 자라는데 충분한 수면으로 성장을 도모해야 하는 거 아닌가?
거기에 피부는 또 어떤가? 미인은 잠이 많다는 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게다가 오히려 잠을 넉넉히 자야 학습 효율도 상승한다는데, 지금 굳이 깨어 있어야만 하는가?
라파엘은 그렇다고 답했었다.
-너는 미친년이 돼야 해. 미친년인 척 연기하는 걸 들키면 안 돼. 모두에게 미친년으로 보여야 한다니까? 할 수만 있으면 미친년이 돼 봐.
라파엘도 머리는 있는지 무도회장에서 책을 본다는 게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가 말하길,
-무도회장에서까지 책을 읽을 정도면 공부에 얼마나 열정이 넘치는 거겠어? 그야 공부밖에 모르는 바보인 거지. 그런데, 그런 바보가 과목에서 1등을 놓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너는 꼭 수석을 따야 해.
논리에서 벗어나는 요구는 아니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해 나비에도 동의했다.
“도저히 못 할 일은 아니니까.”
아카데미에는 제국에 유능한 인재들이 모였으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그들의 전공에 한했다.
교양에서까지 눈에 불을 켜고 성적을 따내려는 이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설령 그런 이들이 많다고 해도, 그들은 전공을 우선할 터였다.
나비에는 자신이 몇 발자국은 앞선 출발선에 자리했다고 평가했다.
자신에게 유리했다.
그러니 노력만 한다면 멍청한 자신이라도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생전 해본 적 없는 역사학이나 제왕학 따위의 공부를 늦은 시간까지 하는 건 그런 까닭이었다.
“아.”
페이지를 넘기던 손끝이 정지했다.
장시간의 공부에 집중력이 흐트러졌는지 잡생각이 떠올랐다. 그것도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만약에.
이렇게까지 열심히 상황을 연출하고자 피눈물을 흘렸는데, 만약에 황태자가 그날 무도회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라파엘의 멱살쯤이야 잡아도 되겠지.
* * *
교양 과목 수업 중, 올 게 왔다.
“풉.”
나는 순간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조소에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교수가 눈앞에서 헛소리를 해대는 게 아닌가?
교수는 세드릭이 하인즈와의 대전에서 깨달음을 얻고 소드마스터에 올랐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달랐다.
아니 그전부터 대마법사였던 하인즈를 상대로 소드익스퍼트였던 세드릭이 어떻게 살아남았겠는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리였다.
소드익스퍼트와 소드마스터의 차이를 보통 오러 블레이드의 사용 유무로 나누지만, 세드릭의 경우 이를 초월했었다.
체질적 한계에 오러 블레이드를 다루지는 못했어도 그의 검술은 소드마스터 수준이었다.
그러지 못했다면 결코 하인즈의 마법을 피하고 끝끝내 생존하기란 불가했다.
교수는 이를 기존에 세드릭이 하인즈에게 은혜를 입혔기 때문에 하인즈가 봐준 거라 하지만 사실과는 달랐다. 그전 마계에서 펼친 말록과의 전투에서 세드릭은 소드마스터에 오른 채였다.
이런 배경도 모르는 교수의 강의에 자꾸만 입술을 씹어야 했다.
“왜 그래요. 미친 사람처럼.”
그런 내 반응에 옆자리에 자리한 나비에가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나는 그녀가 뒤에 붙인 단어에 또 한 번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았다.
최근 나비에는 내게 친근하게 굴었다. 진짜로 친구라 여기는 건 아니어도 적어도 한배를 탄 동료로 보는 듯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러했다. 그게 자기한테 이득인 거겠지.
“닥쳐. 조용히 해.”
“이거라도 안 하면 졸 거 같아서 그래요. 졸려 죽을 거 같아요.”
“자지 마. 잘 거면 수업 끝나서 자. 아니, 수업 끝나면 돌아가서 복습해야지. 그냥 참아.”
“저도 알아요, 그 정도는. 그런데, 이게 참는다고 참아지는 일인가요? 또 생각 없이 말씀하시네.”
“그럼, 다 포기하던가.”
나는 나비에와 티격태격하며 ‘루인제국 천년 역사의 이해’ 과목을 끝끝내 터지려는 폭소를 참고 들었다.
나비에와 헤어지기 전에 공부 열심히 하라 당부해준 후 다음 강의를 향해 이동했다.
거대 괴수 수렵 개론.
“오늘 설명한 괴수는 차우르스라 하는데….”
교수는 내가 게임에서 수십 번은 잡은 몬스터를 설명했다.
멧돼지처럼 생긴 놈인데, 갑옷이 두꺼워 일정 수준 이하의 공격이라면 무시하는 특성이 있었다. 이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스킬 혹은 무기가 필요했다.
한 번이라도 되니까 그렇게 데미지를 입혀 놓으면 말랑말랑해져서 손쉽게 잡을 수 있는 놈.
이걸 교수는 1시간 동안 떠들었는데, 적당히 집중하는 척하며 으음, 반응해줬다.
그러던 중에 레오가 내 팔뚝을 툭툭 치더니 아가레스를 가리켰다. 아가레스는 물컵에 담긴 물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레오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못 볼 걸 봤다는 양 말했다.
“물을 마시는데요?”
“그럴 수도 있지. 그게 왜?”
“아니, 저는 피만 마시는 줄 알았거든요.”
“쉿.”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팔꿈치로 레오의 가슴팍을 때렸다. 레오는 쿨럭이며 심장 부근을 움켜쥔 채 정지했다.
이게 말이 돼?
우리는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개미 지나가는 소리로 떠들었다.
한데, 아가레스는 이번 것마저도 들은 채 이쪽에 힐끗 시선을 던지더니 표정을 구겼다.
와. 귀 참 밝네.
“어떡하죠?”
“몰라. 네가 그랬잖아. 나는 조용히 있었는데.”
“고작 이거 가지고 앙심을 품지는 않겠죠?”
“나야 모르지.”
“에이, 이런 거 맘에 담아두면 너무 쪼잔한 거죠.”
수업을 들은 다음에는 그대로 단련장으로 가 대련했다.
레오는 어디서 배워온 건지 미숙하게나마 발경을 사용했다. 카타리나가 그때 말한 것과 같은 허접한 발경이었다. 사용하기 직전에 몸이 수축해서 발경을 쓴다는 게 뻔히 보였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니까. 그거를 보면 바로 대응을 할 수 있잖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근데, 감추려 하면 막상 진짜 위력이 필요할 때는 약해져서요. 거기에 또 비장의 수가 하나 있습니다.”
레오는 다시 한번 발경을 선보였다. 전시에 힘이 팍 들어가며 근육이 수축했다.
“아?”
그러나 재미있게도 레오는 평소와 동일한 속도와 동일한 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평소의 그 공격이었다.
“이렇게 발경을 사용하는 척하고 취소할 수 있으니 심리전을 걸 수 있는 거죠. 이러면 발경을 쓰는 게 티가 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거기에 사실 심리전을 잘 써먹는다면 오히려 티를 내는 쪽이 이득일 수도 있고요.”
“그래, 네 선택이니까 알아서 해.”
말을 그렇게 했지만, 그의 대답에 내심 흡족했다.
그는 발전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자기보다 강한 사람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고민하며 성장했다.
레오와는 3번 싸웠고, 3번 승리했다. 전보다는 대련 시간이 길어졌다.
* * *
나는 달력을 확인했다.
13일의 금요일. 나비에와 약속했던 그날이었다.
나와 그녀 둘 다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나비에는 무도회장 한가운데서 책을 읽고, 나는 누군가가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게 막는다.
나비에한테는 말하지 않았지만, 본래 그 무도회에 주인공은 비숏이 차지할 예정이었다. 원작에서는 비숏과 친해진 이안이 꿰어 따라간 무도회에서 황태자를 만나는 전개였다.
내가 사건을 틀었으나 안심하기엔 불편했다.
비숏이 무슨 연유든지 무도회에게 참석하기라도 한다면 여태까지 쌓아온 벽돌이 와르륵 무너지는 꼴이었다. 일을 확실하게 끝낼 필요가 있었다.
최근 비숏의 활동 경로를 확인해보니 연금술 시약을 판매하는 일은 접은 듯했다.
길버트가 제대로 지원금을 전해둔 탓.
나는 이것마저도 비숏이 내가 사주했다는 걸 눈치채고 거부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받아먹었다.
나는 길버트에게 부탁해 오늘은 강제로 연금술 동아리 모임을 만들었다.
참석 자체야 자율이라지만, 비숏의 성격상 꼭 동할 것이다. 돈을 써 꽤 귀한 연금술 재료를 모았고, 이를 자유롭게 써볼 수 있게 정했다.
연금술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비숏이라면 애가 탈 이벤트.
“안녕하세요.”
예상대로 동아리실에서 비숏이 내게 싸늘한 표정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보기만 해도 반갑네.
“응. 오랜만이네.”
나는 적당히 뭔가를 만들고, 조립하는 척하며 비숏을 살폈다.
처음에는 동아리 실의 누군가 때문에 불편하다는 기색이었는데, 잠시 후 곧바로 연금술에 빠져들었다.
‘그나저나 나비에는 잘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