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23화 (23/125)

제23화

한편, 나비에는 거울을 보면서도 이게 맞는 걸까, 몇 번이고 갈등했다.

이미 오늘을 위해서 수많은 노력과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음에도 또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거울 속에 제 모습도 어딘가 어색했다.

색조를 지운, 평소보다 한결 가벼운 화장에 늘 달고 다니던 장신구를 내려놓았고, 드레스조차도 단조로웠다.

정말 이 꼴로 무도회장을 방문해도 되는 걸까? 예의에 어긋난 게 아닐까?

주최자도 불명확한 아카데미에서 몇 번이고 열릴 무도회에 갖가지 이유를 찾아대며 가지 않아도 될 변명거리를 탐색했다.

아니, 옷이나 장신구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진짜 문제라면 제 손에 들린 두꺼운 책 한 권이었다.

겉표지에는 제왕학이라 적혀 있었다. 진짜 제왕이라 해도 무도회에 참석하며 이 책을 들고 가진 않을 거 같은데. 그런 쓰잘머리 없는 감상과 함께 쿵쾅이는 심장을 잠재웠다.

한다. 하기로 했으니까 한다. 한다고 했으니까 한다.

나비에는 제왕학을 손에 움켜쥔 채 무도회장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나비에 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나비에를 맞이한 영애는 말끝을 흐렸다.

평소라면 적당히 미사여구를 곁들여 칭찬의 말 한마디를 건네었겠으나 어딘가 나비에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정확히는 나비에가 평소와 괴리가 막대했다.

누구보다 먼저 유행을 좇고, 늘 화려하고 세련된 것에 집착해왔던 나비에였다.

그러나 뭐가 어찌 된 영문인지 무도회에 참석한 그 어느 영애보다도 수수했다.

“네, 안녕하세요.”

얼굴이 익은 영애였다.

나비에는 반갑게 맞이하며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자신이 상대방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는 걸 인지했다.

그게 여태까지 배워온 예의였고, 예절이었다. 인간관계의 기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무시할 만큼이나 뇌가 팽팽 돌아갔다. 열이 치솟아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나비에는 잰걸음으로 무도회의 내부에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눈동자를 굴려 안면이 있는 참석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렸다.

많았다. 적어도 절반 이상이 안면이 있었고, 그 절반 가까이 대화를 해본 사람들이었다. 어찌 보면 뻔한 일이기도 했다. 아카데미에서 학습보다 사교에 열중인 이들이 모인 장소였다. 대다수 서로가 누구인지 알 수밖에 없었다.

-나비에 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러게요. 평소 모습이랑은 다르네요. 손에 들고 있는 책은 또 뭘까요?

나비에의 귀에 환청이 감돌았다.

그녀는 귀를 틀어막고자 성큼성큼 무도회의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중 테이블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고 책을 펼쳤다. 마구 날뛰는 두뇌를 잠재우고자 눈동자로 철자를 따랐다.

라파엘은 몇 번이고 말했다.

이곳에서 책을 읽는 게 연기처럼 보이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니 책에 집중해야만 했다.

‘두려움을 정복하는 자가 세계를 정복한다.’

어느 왕이 남긴 명언이었다.

세계를 정복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건 동의했다.

그래.

맞다.

오늘은 무지막지 중대한 날이었다. 어찌 보면 여태 인생 중에서,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하루가 될지도 모를 날이었다. 그런 날을 고작해야 남들 시선 따위에 망쳐서야 되겠는가?

담대하게 나아가자.

두려움을 정복하자.

책을 펼쳤고, 자세를 세웠다.

흘러나오는 음악과 그 박자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을 감각에서 지웠다. 무도회에는 책과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 나비에는 몰입했다.

그리고 그 순간 황태자가 등장했다.

금발에 붉은 눈, 큰 키에 잘생긴 얼굴. 제국의 주인이 될 몸.

모두의 시선과 관심이 한 곳에 향했다.

그러나 나비에는 단 한 톨의 집중력도 읽지 않았다.

그녀는 책을 탐독했다.

* * *

카르테아 사비 이니에스피는 루인 제국의 황태자였다.

황제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황제 본인은 제외한다면 이 넓은 땅덩어리에 수많은 인간 중 으뜸으로 귀한 몸이었다.

그야 루인제국은 대륙의 지배자였고, 이 지배자를 거부할 수 있는 장소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오지뿐이었다. 살아 숨 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제국에 충성했다.

황태자.

이는 차기 황제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위대한 루인제국의 우두머리가 될 예정임을 의미했다. 그게 카르테아의 운명이었다.

카르테아는 가장 거대한 나라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설 남자였다.

그리고 이는 그와 이어질 여인이 제국의 안주인이 된다는 걸 의미했다.

제국의 안주인. 이는 제국의 인구 절반이 원할 자리였다.

여기에 카르테아는 골드 드래곤의 피를 짙게 이어 외모에서도 이를 뽐냈다.

커다란 키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짙은 머리카락과 보석을 박은 듯한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냈다.

요컨대, 그는 누구나 선망할 배우자였다. 이성이 원할만한 것이라면 모두 갖추었다. 이보다 완벽한 배우자를 구하기란 현시대에서는 불가능. 그게 세간의 평이었다.

카르테아가 나이가 찼음에도 무도회와 같은 사교계를 피한 건 그래서였다. 지겨웠다. 어떻게든 말 한 번 붙어보려는 구차한 접근과 시선 한 번 끌어보기 위해 소란을 피우는 꼴들이 짐승 같아 보였다. 그들을 경멸했다.

그러니 오늘 같은 사태를 예상하기란 도저히 불가했다.

‘누구지? 분명 눈에 익은 얼굴인데. 분명 만난 적이 있을 텐데.’

수수한 드레스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은 옅은 화장.

흘깃 보아서는 민낯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얼굴은 전투태세를 갖춘 다른 영애들보다 아름다웠다.

카르테아는 장신구 하나 차지 않은 단조로운 행색에 기억을 한참을 더듬은 후에야 떠올렸다.

나비에 러브원이었다.

마그타민 후작의 딸. 스쳐 지나가며 몇 번인가 마주쳤고, 대화해본 경험이 있었다.

‘그때는 저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당시에 나비에는 수컷 공작새가 제 깃털을 뽐내듯 자신을 가꾸고 우쭐거리는 데 혈안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한순간의 변덕인지 혹은 이게 본래의 모습인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나비에는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을 구석에서 책을 읽었다.

복장이나 분위기를 따져볼 때 마지못해 무도회에 끌려온 듯했다. 이곳에 어느 누가 나왔건 한 톨의 관심도 없다는 태도. 신선했다.

물어볼까?

카르테아는 호기심이 서렸다.

왜 이곳에 와서까지 책을 읽는 건지, 왜 오고 싶지도 않은 무도회에 참석한 건지 할 말이 많았다. 그는 나비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황태자님 오래간만입니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저는….”

“무도회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으신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이신가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와 춤을-”

“반갑습니다. 저는 오웬 자작의 아들로 경영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발생한 쿤스 상회에 비리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카르테아는 얼굴을 구겼다.

일순간이라 제게 몰려든 인파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그가 얼굴에 드러낸 불쾌함은 진심이었다.

오늘만큼은 신선한 자극이 있나 싶었으나 헛된 기대였다. 이번에도 제가 상대해야 할 인간은 이런 놈들뿐이었다.

제 껍데기에 눈이 먼 머저리들과 신분에 복종할 버러지와 떨어질 콩고물을 기대하는 떨거지들.

하나하나가 제가 처리해야 할 과제였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래…. 이게 내 일이었지….’

황제가 될 운명을 받아들인 날부터 정해진 일이었으니 그저 감내할 뿐이었다. 황제란 자리를 바라면서 이 정도 잡일까지 거부할 수는 없는 일.

그들에게 꺼지라 외치는 대신에 눈동자를 굴려 차례차례 얼굴을 훑었다. 제게 다가오는 이들의 부모와 친척을 떠올렸다. 각자의 머리 위에 우선순위를 매기고 숫자를 부여했다.

‘너는 1번, 너는 2번, 음… 너는 탈락.’

그 끝에 어느 영애의 손을 잡았고, 춤 신청을 받아들였다. 영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후로 춤을 몇 곡 더 췄고, 그 후에 정치에 대해 떠들었고, 관심 없는 가문의 사업에 대해 아는 체했다. 그렇게 시간을 소모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무도회가 막을 내릴 시각이었고, 나비에는 무도회장을 떠난 이후였다.

‘그래, 아카데미에 있다 보면 언제 한 번은 마주치겠지.’

카르테아는 아쉬움을 달랬다.

끽해야 오랜만에 새로운 걸 접한 호기심에 불과했다. 그렇게까지 집착할 일이 아니었다. 아카데미에 있다 보면 언젠가는 마주할 거고, 그때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 * *

나비에 러브원은 그 자리에서 책을 완독했다.

몇 시간이고 집중력을 읽지 않은 채 페이지를 넘기길 반복했다. 제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다. 멍청한 줄로만 알았던 두뇌가 웬일인지 제 몫을 톡톡히 해줬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은 후에 책을 덮고 주변을 살폈다.

라파엘이 말했던 대로 황태자가 무도회에 등장했다. 그는 대체 이걸 어떻게 안 걸까? 황태자쯤 되는 이가 무도회에 등장할 때면 암암리에 소문이 퍼지는 법이었다.

자기조차도 전해 듣지 못했다면, 황태자 쪽에서 정보를 은폐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럼 라파엘은? 무슨 수로 미리 정보를 접했다는 말인가?

내일 꼭 물어봐야지.

그 순간, 기어코 제가 무도회에서 못 할 짓을 했다는 걸 다시금 자각했다.

이마가 펄펄 끓었다. 그녀는 체온을 식히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스럽게도 수년 만에 무도회에 나온 황태자가 폭풍처럼 이목을 휩쓸어준 덕분에 막상 남들의 관심이 제게 쏠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모두가 봤을 거란 점이었다.

굳이 말을 걸며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요? 나비에 님이 무도회의 분위기를 망치고 있다는 걸 모르시나요?’ 하고 따지는 이는 없어도 다들 기억에 담아두기는 했을 거다.

제 추태가 남들 뇌리에 남았다고 생각하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창피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아.”

시계를 확인하자 무도회가 끝나기 직전이었다. 종이 치면 인파에 섞여 퇴장할 텐데, 그렇게 되면 누군가는 필시 말을 걸 터였다.

한 손에 제왕학을 지닌 채로 담소를 떨 자신은 없어 남들보다 한발 먼저 퇴장했다.

몇 눈치 없는 영애들이 아는 체하려는 걸 간신히 무시했고, 무사히 귀가했다.

무도회에서 돌아온 직후, 이제 다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금일 육체노동은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전부였지만, 정신적으로 무지막지하게 괴로웠다. 자신이 이런 몰상식한 짓을 할 줄이야.

옅게나마 얼굴에 분칠한 것도 잊은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워 오늘날의 추태를 다 잊고 꿈나라에 빠지고 싶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책상 앞에 앉았다.

나비에는 다시금 노트 필기를 되새겼다.

라파엘과 짠 계획 중 주요한 부분은 얼추 끝이 났지만,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해야 한다. 무도회에서까지 책을 읽을 정도로 학습에 열중인데, 성적이 애매하다?

이건 구린내가 풀풀 났다.

누가 봐도 괴상한 컨셉을 잡고 연기를 한 게 아닌가? 나비에는 코피 쏟아가며 밤이 새도록 공부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