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나비에는 나를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어댔다.
“진짜, 진짜로 황태자님이 오셨어요. 무도회는 수년째 불참이라 들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당신은 이걸 또 어떻게 알았고요?”
“그래, 신난 건 알았으니까 좀 천천히 말해봐.”
나비에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확인해봐야 할 게 많았다. 우선 나비에가 제대로 무도회에서 그 짓거리를 할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웬만큼 낯짝이 두꺼운 게 아니라면 주변 눈치나 살피다 포기할 일이었다.
그걸 몇 시간이고 해낼 수 있을까? 그것도 연기라는 티를 안 내고 성심성의껏?
아카데미에서 만나자마자 똑바로 했냐고 물으려 했는데,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을 듯했다.
나비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학교에서 칭찬받은 걸 자랑하는 어린애 같은 웃음이었다.
자기가 해냈다는 자각이 있는 거겠지.
하나하나 설명해주지 않아도 얼굴만 보고도 다 알겠는데, 나비에가 말했다.
“일단은 말 맞춘 대로 잘한 거 같아요. 실수 안 하고요. 대충 입고 가서 열심히 책 읽었어요.”
“대충 입고 가? 너 옷 한 벌 새로 샀다며.”
“그야 대충 입을 옷을 제가 사뒀을 리가 없잖아요. 아! 그래서요? 대체 어떻게 미리 알았던 거예요? 그날 황태자님이 무도회에 나오는 건 저도 몰랐던 건데.”
몰라, 잘 기억 안 나.
그날 황태자가 무도회가 나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글을 전개하기 위해 억지로 끼워 맞췄던 거라 별거 아닌 이유라 까먹었을 뿐이었다.
“그냥 지나가다가 주워들었어.”
“아아, 그러시구나.”
나비에는 불신한다는 티를 팍팍 냈으나 적당히 넘어갔다. 그러더니 어제에 일을 떠들었다.
“제가 얼마나 창피했을지 상상이 가세요? 책을 펼치면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어요. 다들 찾아와서 왜 여기서 그러고 있냐고 묻지는 않아도 속으로 흉볼 거 아니에요?”
짝.
나비에는 뭔가 깨달았다는 듯 박수하더니 두 눈을 치켜떴다.
“아! 오늘 다들 뒤에서 저를 욕하겠죠? 쓰읍. 각오한 일이기는 한데 속이 쓰리네요. 제가 그동안 관리한 평판에 흠이 생긴 거니까요.”
“많이들 그럴까?”
“그야, 당연하겠죠.”
나비에는 눈썹을 찡그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사람들은 이야기가 자극적일수록 좋아하는 법이니까요. 그동안 깨끗하고, 관리 철저하게 지내 온 제가 문제를 일으켰어요. 보통의 영애들이 했을 때보다 여파가 클 수밖에 없어요.”
“아아.”
나는 나비에를 꾈 때만 해도 그런 것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오로지 내 개인적인 이익만을 따졌다. 나비에한테도 득이 되는 일이나 거부하지는 않겠지, 막연히 평가했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나비에도 자기 나름대로 부담을 껴안은 채 일에 임했다.
그러면 더더욱 성공시켜야지.
“그래서요. 제가 어떻게 했나면요….”
나비에가 한 마디 말할 때마다 따질 요소가 하나씩 나왔지만, 그걸 꼬치꼬치 캐묻고 있다간 날밤을 보낼 기세에 꾹 참았다.
잠자코 나비에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를 요약하면 대충 이러했다.
성공했네.
일이 잘 풀렸다.
“이게 끝이 아닌 거 너도 알지?”
“당연하죠. 어제도 코피 쏟아가며 공부한걸요.”
“네가?”
나비에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냥, 너무 안 어울려서. 애가 공부를 한다는 것도, 코피를 쏟는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그 두 가지를 같이 했다니까 더 그러했다.
내 의심에 나비에가 인상을 쓰더니 말했다.
“여기서 열심히 한다고 말한들 아무 의미 없을 거 같네요. 성적으로 보여드리죠.”
“그래, 믿고 있을게.”
“오늘도 하루 잘 보내세요. 저도 이만 가볼게요. 공부 때문에.”
* * *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서 어느덧 시험이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나야 뭐 이까짓 거 잘 보려 노력할 것까지는 없다 싶어 건성건성 건너뛰었다.
영혼 깊이 심어진 본능에 시험 며칠 전에는 에너지를 갈아 넣었지만, 열과 성을 다한 건 아니었다.
아무 의미 없는 시험이라지만, 꼴등은 아니지 않은가? 뭣보다 내가 불편했다.
금일은 거대 괴수 수렵 개론 시험 날.
책 한 권을 대충 훑어본 게 전부였지만, 제일 자신 있는 과목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흥미 있고, 즐거워하는 일에 능률이 오른다고 하던가?
게임에서 몬스터를 어떻게든 잡아야지 맹세하며 시간을 쓰레기통에 넣은 나를 당해낼 자는 없다고 자부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눈에 선했다. 분명 피했는데, 맞았다. 분명 눌렀는데, 눌리지 않았다. 분명 맞췄는데, 빗나갔다. 이런 쓰레기 게임이 어디 있냐고 누나랑 욕했었지.
시험 당일에 와서 시험장에서까지 요약본을 읽어대는 학생들을 훑어보며 시험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레오가 시험장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가방을 풀며 말했다.
“어우, 어제는 죽는 줄 알았습니다. 밤새도록 이거 본다고요.”
“교양이잖아. 그리 중요한 과목은 아니지 않아? 몸 안 상하게 적당히 하지.”
“저도 그러고는 싶죠. 저도 적당히 하고 싶은데, 저야 졸업하고 뭐가 어찌 될지 모르니까 뭐가 됐건 잘 해놔야죠. 특히 저희 쪽 애들은 책 읽는 걸 싫어해서 교양 잘 닦아두는 게 도움이 됩니다.”
“졸업하면 뭘 하고 싶은데?”
레오는 잠시 멈칫거렸다. 그는 오른손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말했다.
“우선은 기사가 되는 게 먼저겠죠.”
“어느 기사단?”
꿈은 명확하게 잡아야 한다는 건, 누구나 귀에 딱지가 앉을 만치 들었을 것이다. 시간도 죽일 겸 레오에게 깊게 물었다.
“오만한 말일 수도 있지만, 어디 한 곳에 속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름만을 단 채 떠돌며 강자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방랑 기사?”
“하하, 뭐 그런 겁니다.”
레오와 잠깐 떠들고 나니 강사가 시험장에 입장했다.
그는 시계를 확인하더니 앞에서부터 시험지를 배부했다.
난 첫 문제를 보자마자 속으로 킥킥거렸다.
차우르스.
게임에서 나를 괴롭혔던 그 몬스터의 패러디였다. 난 놈을 사냥했던 수십 번의 경험을 토대로 답안지를 작성했다. 우선은 일정 등급 수준 이하의 공격을 무시하는 외피를 벗겨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절삭’ 특성이 있는 대검류로 베어내거나 ‘관통’ 효과가 있는 총을 같은 지점에 쏘아야 했다.
그러나 이곳은 현실. 되는대로 검기와 마법으로 치환해 답안지를 빽빽하게 채웠다.
그 이후로도 몇몇 괴수들이 문제로 나왔는데, 다 눈에 익은 놈들이었다.
“후아아암.”
만점을 확신한 채 시험을 치르고 시험장에서 나왔다.
거대 괴수 수렵 개론을 제외한 다른 과목은 평균 언저리에 성적을 받았을 듯했다.
대충 반타작은 넘겼다.
필기는 그렇게 끝이 났고, 남은 건 실기였다.
검술학부의 시험답게 당연히 학부생끼리 대련을 시켜 등수를 매겼다.
난 시험장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까딱이는 카타리나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말해줄 게 있어서. 한 번이라도 지면 진짜 뒤진다.”
“한 번쯤은 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없어. 네가 제대로 싸우면. 방심 안 하면.”
“아, 예.”
카타리나의 격려 아래 하루종일 10번을 내리 싸웠다.
한 번이라도 상대에게 유효타를 내면 끝나는 약식 대련 탓에 1판, 1판이 5분 내로 끝난 탓이었다.
다행히 카타리나에게 뒤질 일 없이 10번 다 승리했다.
카타리나의 말이 맞았다.
확실히 수준 차이가 있었다. 똑같은 상대라면 100번을 싸워 100번 이길 자신이 생겼다.
“대단하시네요.”
내 마지막 대련 상대는 공교롭게도 레오였다.
나는 그를 상대로 칼 한 번 섞지 않고 이겼다.
레오는 내 검격을 상대하지 않은 채 동시타를 노리며 내 목을 노렸다. 서로가 서로의 목을 향해 반대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는데, 내 것이 먼저 닿았다.
레오도 나와 마찬가지로 10번을 싸웠는데, 그중에 8번 승리했다.
내게 한 번 패배했고, 어느 어중이떠중이한테 패배했다.
그놈한테 진 건 예상외의 패배였다.
“예전처럼 평범하게 싸웠으면 이겼을 텐데, 왜 그랬어?”
“진다고 죽는 대련도 아니잖아요? 해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지기는 했는데, 뭘 좀 알겠더라고요.”
“그래.”
내 시험 결과는 뭐가 어떻게 되든 좋았다. 조마조마한 건 나비에였다.
나는 검술 대련을 끝마친 직후 그녀에게 찾아갔다.
“아. 오셨어요?”
어딘가 멍한 얼굴에 다크써클이 진하게 내려왔고, 평소보다 머리털이 부스스했다.
“잘 봤어?”
“이럴 때는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먼저 아닌가요?”
“많이 틀렸어?”
“아뇨.”
나비에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안 틀렸어요. 다 맞았어요.”
시험에서 단 한 문제도 틀리지 않았다는 나비에의 말에 침을 삼켰다.
애가 시험을 제대로 망쳐서 헛소리하네, 그게 아니라면 계획을 망친 게 미안해서 거짓말을 하는구나, 생각했다.
내가 그녀의 말을 믿은 건 성적표가 나온 다음이었다.
정말로 나비에는 만점이었다. 전 과목 모두.
“대단한데?”
“제가 성적으로 보여드린다고 했잖아요. 저를 못 믿은 건가요?”
“잘 볼 수야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흠흠.”
“훌륭해. 멋있어.”
나비에는 히죽거렸다.
“그래서 다음 계획은 뭔가요? 이번에는 뭘 할까요?”
“조금만 기다려. 내가 잘 찾아볼 테니까.”
“네, 알겠어요. 저도 뭔가 해 볼 만한 게 없나 찾아볼게요.”
“어.”
* * *
나비에와 그렇게 시험에 대해 감상을 남기고 대충 끝이 날 줄 알았다.
아카데미에서 시험이라 해봐야 물려받을 영지가 있는 귀족에게는 딱 그런 수준이었다.
“의외더군.”
아가레스가 내게 말했다. 내내 뾰족하게 노려보던 눈을 거둔 채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뭐가 말입니까?”
“시험 결과를 확인했다. 만점이더군. 뭔가 착오가 없나 교수에게 찾아가 물었다. 네 칭찬을 하더군. 자기들도 생각해내지 못한 공략 방법을 썼다고.”
“아.”
내가 우수한 학생임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불필요한 시선과 관심을 끌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공부를 안 한 탓이었다. 교수들이 낸 문제에 이상적인 답을 쓰기 위해서는 읽고 외워야 할 게 많았다.
그럴 바에야 좀 튀더라도 내 지식을 쓰는 게 나으리라.
“자네의 영지가 어디 있는지 찾아봤네. 수도에서 퍽 가깝더군. 마물 그것도 대형 몬스터를 마주할 일이 없는 환경이야. 그렇지 않나?”
“예, 뭐 주변이 평화롭기는 하죠.”
아가레스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자네가 이것뿐이 아니라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면 어울리지 않게 학업에 열중이구나 할 텐데 그것도 아닌 걸 보면 결론은 하나지.”
“뭐가 말입니까?”
“마족의 토벌.”
아가레스는 두 눈을 반짝였다,
“더럽고 역겨운 놈들이 제국의 영토를 넘보고 있다. 언젠가는 반드시 멸족시켜야 할 것들이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괴수 수업을 들은 것도 그 준비가 아닌가?”
“예?”
“난 영지의 주인으로 만족할 생각 따위 전혀 없어. 야전으로 갈 거다. 내 대에 반드시 추잡한 마족을 멸종시킬 거다.”
“아, 그러시구나. 의지가 대단하시네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에 맞장구 쳐줬다. 그러자 아가레스는 기세를 타서는 자기가 아는 분야가 나온 공대생처럼 흥분해서는 떠들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때만 된다면 그것들을 멸하려는 게 아닌가?”
“예?”
그게 아닌데.
거대 괴수 수렵 개론을 들은 건 오로지 이게 편하기 때문이었다.
남들은 피땀 흘리면서 공부할 때 편히 쉬면서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족 같은 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데에 관심을 둘 바에 내 생존이나 신경 쓰겠다.
“아닙니다. 마물을 멸하려는 아가레스님의 뜻은 존중하지만, 거기에 동참할 생각은 없습니다.”
“진심인가?”
오해를 정정했다. 이런 건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굴러가서 막상 왜곡된 걸 교정해주려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마족 같은 거에 관심 없습니다. 저 혼자 먹고살기도 힘들어서요. 특히나 그것들이랑 싸우는 건 더더욱요. 저는 싸우는 거 싫어서. 다칠 수도 있다면 더 그렇고요.”
“흥.”
아가레스는 내 항변에 콧방귀를 끼더니 배를 잡고 웃었다. 그가 껄껄거릴 때마다 새하얀 모피가 들썩였다.
“하하하, 내가 그걸 믿을 거 같은가? 그래 이런 자리에서 떠들 이야기가 아니란 건 나도 잘 알아. 그래, 그렇단 말이지.”
툭툭.
아가레스는 내 어깨를 두들겼다. 그 다 알겠다는 듯한 표정과 손짓이 불쾌했다. 나는 괜히 그에게 무안을 주고자 검지로 아가레스가 두른 새하얀 모피를 가리켰다.
“그거 늑대 가죽이지 않습니까?”
내 느닷없는 발언에 아가레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말을 이었다.
“흰 늑대는 북부를 상징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그 모피도 늑대 가죽으로 만들었겠죠? 이거 이상하지 않나요? 북부의 사람들은 늑대를 개처럼 기른다고 들었습니다. 늑대는 그들의 친구 같은 거죠.”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아가레스 님은 그런 늑대를 죽여 모피 망토를 만들었으니 잔인한 처사 아닙니까?”
“듣고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내 개소리도 적당히 받아주는 걸 보면 정말 기분이 좋은 듯했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