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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25화 (25/125)

제25화

비숏 퓨어문은 시험의 결과를 확인한 다음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 정도면 장학금을 노려볼 법했다. 전공에서는 수석을 차지했고, 그 외에 과목에서도 선방했다. 더는 길버트의 원조를 받지 않아도 좋았다.

길버트는 제가 학습에 필요한 자금과 연금술 재료를 대줬다. 뭣 때문에 이런 특혜를 베풀까 고민한 결과, 딱 하나였다.

흙뿌리망초.

라파엘의 도움으로 제게서 그 정보를 훔쳐간 게 미안하기 때문이겠지. 그리 생각하니 길버트의 도움을 뿌리칠 이유는 없다고 간주했다. 어차피 제 돈이었을 걸 남의 손을 한 번 걸쳐 돌려받았을 뿐이라 여겼다.

“후우….”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남의 손에 의존할 맘 같은 건 없었다.

그런다면 가문을 벗어나 아카데미까지 온 그간이 무의미해졌다. 홀로 살아가며 자립해야 한다. 비숏은 그 방법을 연금술에서 찾기로 했다.

자신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연금술을 보는 시야가 넓었고, 남들은 떠올리지 못할 기발한 아이디어를 찾을 번뜩이는 감각이 있었다.

흙뿌리망초만 해도 그러했다. 라파엘이 제 성과를 훔쳐 가지 않는다면 이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생활을 영위했을 것이다.

이번에도 영감이 하나 떠올랐다.

마나가 사람의 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미지수.

이따금 몇몇 사람들의 경우 마나의 접촉에 단기적으로 기억을 잃거나 치매를 앓았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 여러 마탑에서 연구했지만, 제대로 된 성과는 전무 했다.

할 수 있을까?

기본적인 골자는 있었지만, 흙뿌리망초의 경우보다 복잡했고,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그 기간을 버틸 수 있을까?

기본적인 의식주나 학업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무방했다. 잠자리나 밥은 알아서 나왔고, 옷이라면 가문에서 챙겨온 것들이 여럿 있었다.

또 공부에 필요한 교재와 재료 따위는 길버트가 대신 값을 치러줬다.

문제는 한 번 일에 착수하면 완성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몇 달 어쩌면 1년이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이것 한 가지에만 열중해도 될까? 만에 하나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섣부르게 확신을 품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결론지어야 했다.

비숏은 관련 자료를 찾아 여러 책과 학술지를 읽었다.

그러던 중, 믿을 수 없는 학술지를 발견했다. 학술회에서 발행한 지 얼마 안 된 최신 자료였는데, 이미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해낸 사람이 있었다.

‘대단한데?’

심지어 그는 이미 자신보다 앞서 수십 혹은 수백 번의 실험을 끝냈는지 명확한 성과까지 발표했다. 그의 이름은 라파엘 아이작이라 했다.

“말도 안 돼!”

비숏의 대뇌에 빛이 번쩍였다.

이게 진실이라면,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라파엘이 흙뿌리망초에 대한 정보를 훔쳐간 게 아닌 걸 수도 있었다.

아니, 아마 그럴 것이다. 비숏 본인이 보기에도 대체 어떻게 제 성과를 도둑질해 갔는지 의문이 들었다. 애초에 그가 훔친 게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자료를 가져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정황이 그러했고, 라파엘은 그럴 인물이었기에 그가 범인이라 단정 지었다.

“그렇다면 왜?”

제가 오해를 했다고 가정해도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우선 라파엘은 해명하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간의 행적을 살펴보면 라파엘이 그렇게 순순히 포기한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설령 그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잡아뗐어야 할 일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왜?

모르겠다.

여기에 또 한 가지, 그렇다면 길버트는 왜 자신을 도와준단 말인가?

자신에게 미안한 짓을 했으니까, 원래 그 돈의 주인은 자신이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지원을 받는 게 마땅했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왜?

정신이 나갈 것만 같다. 나름대로 명석한 편이라 자부했지만, 도저히 해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 앞에 서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직접 라파엘에게 찾아가 해명을 요구하는 것. 그뿐이었다.

그놈이 우격다짐으로 이어온 악연 속에서 비숏이 먼저 그를 찾는 건 처음이었다. 그놈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불쾌한 일이 터진 탓이었다.

“어쩔 수가 없어.”

비숏은 라파엘을 만나겠다고 결심했다. 사건의 전말을 알아야만 했다.

* * *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돈이라 말하면 여기저기에서 반박이 들어올 거다. 개인의 인생에서 행복을 고려한다면 건강이나 자아실현 따위가 더 비중이 높다고 말할 거고, 또 누군가는 물질만능주의라 비판할 거다.

나도 돈보다 귀하게 여길 건 많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내 목숨?

그러나 누가 뭐라 하든 돈이 있으면 뭐든지 수월해졌다.

할 수 있는 게 많았고, 더 잘할 수도 있었다. 이는 내 목숨을 지키는 데도 마찬가지였다.

돈만 있으며 수단이 늘어났다. 해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 여러 방법으로 돈을 모으려 했다.

그중에는 비숏이 발견할 연금술 품목도 포함이었다.

비숏이 어떻게 연금했는지는 읽었어도 내 기억력이 완벽하지는 않아서 야금야금 구멍이 생겼지만, 그건 길버트가 메꿔주었다.

그와 협력하며 돈을 쓸어 담았다.

즉각 만들 수 있는 품목들은 바로바로 출시했고, 그게 아니라 해도 지식의 일부를 특허 신청해 미리 선점했다.

이젠 이쪽 파이프로 들어오는 돈이 영지에서의 수입을 훌쩍 넘을 정도였다. 나는 부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비숏이 나를 찾아왔다.

“안녕하신가요.”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는 잠시 정지했다. 미모에 감탄했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애 얼굴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적응을 끝마쳤다. 의외였던 건 그녀의 표정이었다.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좌우로 진동했고, 턱을 달달 떨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괜찮아?”

“몸 상태라면 양호합니다. 제가 이렇게 오늘 방문한 까닭은 해결해야만 할 궁금증이 있어서입니다.”

“응?”

“지난번에 발표하신 흙뿌리망초. 저는 그게 제 연구 성과를 훔쳐 가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비숏은 느닷없이 내 급소를 찔렀다. 그에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통증으로 억지로 표정이 구겨지는 걸 참아냈다.

“그런데, 최근에 발간된 학술지를 읽어보면서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라파엘 님께서는 정말로 연금술에 박식하시더군요.”

“그래?”

“예, 그렇습니다. 그런 연유로 흙뿌리망초가 겹쳤던 게 우연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니 또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왜 라파엘 님은 제가 사실을 곡해하도록 넘어가신 걸까?”

진동하던 비숏의 눈동자가 정지했다. 시선이 내 눈을 향했다.

내가 잘못한 게 있어서, 찔리는 게 있어서 눈을 마주하는 게 힘들었다.

바닥을 향해 축 늘어지려는 눈동자를 억지로 북돋아 비숏과 마주했다.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흙뿌리망초는 라파엘 님이 생각해낸 아이디어였습니까? 그렇다면 그때는 왜 그렇게 넘어가신 겁니까?”

이번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까 차근차근 접근해보자.

우선 그녀의 질문에 사실대로 답하는 건 어떨까? 이 멍청한 질문에는 즉각 불가라 적었다.

내가 진실만을 말한다고 한들 비숏이 넘어가기는커녕 믿지도 않을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건 정해진 결과였다. 이제 다음 문제. 뭐라고 거짓을 떠들어댈까?

“대답하기 어렵네.”

“뭐가 말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정해져 있어. 그런데, 이걸 어떻게 말해야 네가 믿을까, 이걸 생각하니 대답하기가 너무 어렵네.”

“믿겠습니다.”

비숏이 대꾸했다.

“이번만큼은 라파엘 님의 말이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믿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있는 그대로 말씀해주세요.”

켁켁.

헛기침을 두 번 해주고 입술에 침도 발라준 다음에 말했다.

“맞아. 흙뿌리망초의 새 사용법은 내가 발견한 거야. 너를 설득하지 않은 건, 자신이 없었거든. 그때 우연에 우연이 겹쳐 정황이 너무 노골적이었잖아. 내가 뭐라 말한들 네가 믿지 않을 거 같았어.”

“그렇군요. 그렇다면….”

비숏은 고개를 떨구었다.

가늘고 숱 많은 까만 머리카락이 스르륵 흩어지며 커텐처럼 얼굴을 가렸다. 그러길 잠시. 벌떡 머리를 치켜들더니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엘제닉 병의 치료제에 대한 학술지를 읽었습니다. 현재 약의 합성 때문에 막혔더군요.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엘제닉 병에 엘제닉은 과거에 어느 환자의 이름이었다.

이따금 마나에 거부 반응을 일으켜 가볍게는 전신에서 염증을 일으키거나 심하게는 기억에 손상이 가기도 했다.

원작에서 비숏이 치료약을 만든 병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뭐라는 거야? 그걸 왜 묻는 건데?

그녀의 급발진에 무슨 의도가 숨어 있을까 찬찬히 해석했다.

그래, 이건 시험이었다. 내가 제대로 연금술에 관한 지식이 있는지, 흙뿌리망초의 새 사용법을 발견해낼 능력이 있는지 가늠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온 힘을 다해 임해야지.

할 수 있다면.

“글쎄, 뭘까?”

내가 연금술에 대해 아는 건 정답뿐이었다. 어째서 그런 정답이 나왔을까, 그게 왜 정답일까, 따위의 부가적인 물음에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게 최선이었다.

“요 몇 개월간 라파엘 님께서 발표하신 것들을 모두 읽어봤습니다. 라파엘 님은 천재입니다.”

“응?”

“논리에 흐름이라곤 없습니다. 아마 그마저도 길버트 님께서 교정해주신 거겠죠? 그렇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기발한 착상과 알 수 없는 흐름 끝에 내놓은 결론은 완벽하지만 틈이 많습니다.”

비숏은 손바닥을 들어 제 가슴팍을 두들겼다.

“저라면 그 틈을 메꿀 수 있습니다. 한 번 같이 일해보시지 않겠습니까?”

“너랑 내가?”

“화해하자는 게 아닙니다. 긍정적인 관계를 구축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거래일 뿐이죠. 엘제닉 병의 치료약을 만들 때까지만. 아 라파엘 님께서 뭔가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발표하신 특허를 제가 사용할 수 있게 허가만 해주신다면, 남은 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차피 다 비숏이 발표할 지식이었다. 더군다나 내게는 손해 볼 것 없는 제안.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맞는 듯하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하는 법이다. 더욱이 이건 내 목숨과 연관된 일.

30초 정도 곰곰이 고민하고 대답했다.

“그래, 좋아. 그렇게 하자.”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말 한대로 이걸 가지고 화해했다고 안심하는 건 김칫국부터 마시는 짓이었다. 그녀가 내게 품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은 그대로일 터였다.

그런데도 이런 거래를 제시한 건 그녀가 세상에서 연금술을 제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에서 난이도가 높은 목표를 성취하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일이 잘 풀린 듯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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