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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26화 (26/125)

제26화

기존에는 카타리나가 참석하라고 강요할 때만 겨우 눈치 보며 연금술 동아리에 얼굴만 비추었다.

그리고 길버트에게 눈도장을 찍으면 곧바로 귀가했다.

그것도 근래에 들어서는 사업과 관련한 아이템 때문에 개인적으로 길버트를 만나보는 탓에 빈도가 줄었다.

내가 동아리 방에 발을 들이는 건 실로 드문 일이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19시 정각.

아카데미에 정규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떠났을 시간.

나는 그곳에서 비숏과 대면했다.

우리는 간단한 안부 인사만을 나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당신이 낸 특허에서는 별찌르레기를 원액으로 쓴다고 했는데, 그게 마나에 대한 감수성을 낮추는 게 문제인 거 같아요. 오히려 이걸 희석해서 써보는 게 어떨까요? 그러면 감수성을 유지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괜찮을 거 같은데?”

“또 가열 시기를 늦추는 방법도 유효할 듯합니다. 약 20도 정도 불을 낮춰보는 게 괜찮을 거 같은데, 어떻게 보십니까?”

“괜찮을 거 같은데?”

이 세상에 떨어진 지도 어느덧 3달이 가까웠다.

그 긴 시간 동안 비숏과 나눴던 대화 보다 요 며칠 사이에 나눈 대화가 더 많았다.

그중 대부분이 연금술에 관한 거였는데, 나는 가능한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려 노력했다.

“순서를 바꿔보면 성공할 거 같지 않습니까?”

“그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가능한 성심성의껏.

그러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뭐든지 괜찮을 거 같다고 격려해주는 게 최선이었다.

뭐 아는 게 있어야 동그라미를 그려주던 엑스표를 칠하던 하지, 내 연금술 지식은 텅텅 비었다.

“그러시군요.”

나의 괜찮을 거 같다는 대답 연타에 비숏은 눈썹을 아래로 까딱이더니 표정을 찡그렸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은 다음에 말했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습니다. 라파엘 님과 함께 일을 한다고 말한 다음, 저는 뭣 하나 증명한 게 없지요. 저도 인정합니다. 이 정도쯤이야 제가 혼자 결과를 내는 게 맞습니다. 직접 확인한 다음에 돌아오겠습니다.”

“어, 그래?”

“예, 조만간 성과를 들고 돌아오겠습니다.”

“응. 힘내.”

사실 비숏이 엘제닉 병의 치료제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내게 큰 이득이 되지는 않을 듯했다.

보통의 귀족들이 보기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올 테지만, 내게는 애매했다. 이미 돈이라면 풍족했고, 가만히 있어도 들어오는 돈이 넉넉했다.

엘제닉 병의 치료제를 만든다고 해도 끽해야 지금 연금술로 벌고 있는 수익이 일부 늘어나는 게 끝이었다.

대신에, 그것보다 요긴한 게 있었으니 바로 비숏과의 관계였다.

과거에 라파엘이 쌓은 과오는 씻을 수 없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에 생긴 오해를 풀었고, 필요하다면 일시적으로 손을 잡을 수 있는 지점까지 왔다. 실로 장족의 발전이 따로 없었다.

그래, 이만하면 양호한 거지.

비숏이 원작에서보다 빨리 흙뿌리망초에 도달했다는 걸 들었을 때만 해도 다 포기하고 내던지고 싶었다.

실제로 그녀가 남주들이랑 이어지는 것만 막아보자고 노선을 국한하기도 했다. 그랬던 게 잘 풀려서 여기까지 왔다. 충분히 만족할만한 성과에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이어간다. 그러나 비숏과 친해지는 건 과했다. 그녀는 여러 사건이 벌어지는 폭풍의 중심이었다. 폭풍과 사이가 나쁜 건 문제가 되지만, 구태여 친해지고 싶을 건 없었다.

요약하자면, 그녀가 라파엘이 저지른 실책을 눈감아주는 수준이면 족했다. 굳이 친한 척하며 거리를 좁히려 하는 건 아둔한 짓이었다.

이대로면 괜찮겠네.

엘제닉 병의 치료제를 만드는 일에만 협조한다. 그거면 됐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 고민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푹신한 침대에 누워 뒹굴다가 답을 정했다.

내가 노려야 할 자리는 비숏의 친구가 아니라 능력 있는 거래처쯤이 적당했다.

그녀한테 인간적인 호감을 줄 필요는 없었다. 그저 쓸모 있음과 배신하지 않음을 어필하면 될 일이었다.

이를 깔끔하게 하고자 나는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도움과 믿을만함을 보여주려 했다.

먼저는 엘제닉 병의 치료제를 만드는 데 필요할 여러 재료를 구했다.

흔하거나 값싼 재료야 비숏으로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내가 신경 쓴 건 재료의 질이었다. 비싼 거, 혹은 구하기 힘든 거.

그중에서도 특히 마나와 연관이 있다 싶은 재료들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이것들과 함께 계약서 한 장을 준비했다.

길버트의 자문을 구해 작성한 계약서에는 엘제닉 병의 치료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을 시 사업 방안과 수익 분배가 구체적으로 쓰여 있었다.

어차피 돈도 많은데, 수익 분배 비율을 비숏에게 유리하게 해줄까 싶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괜한 짓을 했다가 의심을 살 바에야 기본만 꼼꼼하게 챙기는 쪽이 나았다. 나는 다음날 비숏을 만나 정리한 계약서와 물건을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연구에 필요한 재료라면 저 스스로 구할 수 있습니다.”

“하하….”

비숏을 비웃으려던 건 아니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니 전에 떠들었던 대화가 연상됐다. 그때도 비숏은 나로부터는 그 무엇도 받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까.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나는 바구니가 꽉꽉 담아온 소재들을 책상 위에 펼쳤다. 어느 것 하나 수월하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냥 준다는 게 아니야. 이건 거래지. 같이 엘제닉 병의 치료약을 만든다고 했는데, 네가 재료를 못 구해서 버벅거리고 있으면 내 손해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비숏의 고민하는 기색에 물건을 강매하는 잡상인처럼 떠들었다.

“너한테 빚을 지우게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니야. 나는 엘제닉 병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여러 상품이 있으니까 몸이 바빠. 언제까지 이거에 시간을 투자하고 싶지 않으니까 빨리 처리하려는 거야.”

그와 동시에 가져온 계약서를 내밀었다.

“이건, 뭐죠?”

“치료제를 만들면 그걸 팔아야지. 그리고 수익을 나눠야 하고.”

비숏은 피식 웃었다.

“벌써부터 완성 이후를 생각하시는 건가요. 예, 라파엘 님이 이번 일에 진심이시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 이번 건 선물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이라 여기겠습니다.”

그러더니 비숏은 책상에서 꽃 한 아름을 뽑았다.

키아렌스.

전체적인 모양은 장미를 닮았는데, 꽃잎의 수가 다소 풍성하고 잎이 얇았다. 지금은 연구가 덜 돼 잘 쓰이지는 않지만, 사용법만 알면 여러모로 요긴한 재료였다.

키아렌스는 고온의 물에서는 흔적도 없이 녹았는데, 키아렌스를 녹인 물은 마나를 담은 액체끼리의 삼투를 막는 작용을 했다.

“계약서에는 서명하겠습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고, 독소 조항도 없으니까요. 지원해주신 재료들도 받겠습니다. 연구에 필요하기 때문이죠.”

비숏은 키아렌스 꾸러미를 내 쪽으로 밀었다.

“하지만 이건 다릅니다. 이 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겠습니다.”

원작에서 키아렌스의 사용법이 밝혀진 건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였다.

그러니 현재 비숏이 이걸 거부하는 까닭은 키아렌스를 써먹는 법을 모르는 탓일 거다.

그러니 이걸 쓰는 방법과 효과를 알려주면 받아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런데 이걸 내뱉기에는 비숏의 표정이 터무니없이 진지했다.

사실을 언급해봤자, 너는 이것도 모르냐고, 무안을 주는 꼴이라 순순히 키아렌스를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비숏은 만족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키아렌스를 훑어보니 얘가 예쁘기는 했다.

연보라색 잎이 얇아, 전구나 혹은 태양 밑에서 보면 빛이 투명하게 비쳐 보였는데 그게 퍽 아름다웠다. 그래, 애가 오해를 할 수도 있겠네 싶었다.

그러다 그거 가지고는 반응이 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던 발을 도서관으로 옮겨 확인했다. 키아렌스는 꼭 생긴 대로 놀았다. 겉모습과 참 어울리는 꽃말이 붙어 있었다.

진실한 사랑.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게 아닌데.

* * *

내게 마법을 가르치던 중 이안이 단언했다.

“왜 그렇게밖에 못하는 거야? 그게 아니잖아.”

“이쯤 됐으면 모두가 다 너처럼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알 때 되지 않았어?”

“아쉽네. 마나의 양만 따지면 그럴듯한데….”

마법을 사용하는 데는 여러 재능이 필요했다. 마나의 양을 제외해도 마법사로서 갖춰야 할 덕목은 여럿 남았다. 이안과 달리 나는 모든 재능을 지니진 못했다.

“그러면 깔끔하게 관둘까?”

이안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이안이 성장한 배경을 생각하면 그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마탑에서 태어난 이안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 마법에 미친 놈들이니까.

그들이야 이안의 기준에서 범재 혹은 둔재라 해도 마법을 놓을 수 없었을 게다.

마탑은 마법이 꿈인 사람들이 모인 장소였으니까. 나랑은 달랐다.

“길이 이거뿐인 건 아니니까.”

“그렇지, 마법의 분야는 넓으니까. 할 수 있는 건 무궁무진하니까.”

“응?”

“다른 걸 택하면 되니까.”

흠.

내가 이안의 말을 곡해한 듯했다.

마법을 가르쳐주더니 그렇게밖에 못하냐고 갈구길래 그냥 포기하라는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나의 조작과 변환에는 서툴지만, 출력 자체는 괜찮아.”

이안은 괜찮다고 말했으나 이걸 또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오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는 건 이안의 기준에서였다. 평범한 사람들 혹 보통의 마법사들과 비교한다면 대단히 훌륭한 재능이라 할 수 있었다.

“원소 마법같이 속성을 다루는 마법은 버린다. 대신에 간단한 것들을 중심으로 하자.”

원작에 라파엘도 마법을 깔짝거리기는 했다. 그는 이안이 버린다고 말한 속성 마법을 택하고 씨름하다 벽에 막혀 포기했다.

“간단한 거? 그게 뭔데?”

“쉴드와 마탄. 시간이 지나서 네 실력이 발전하면 염동까지.”

간단한 마법은 정말 간단한 마법이었다. 위력을 무시한다면 마나를 몸에서 뽑아낼 수만 있다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마법.

“우선은 쉴드랑 마탄, 둘을 갈고 닦아.”

“어떻게 하면 되는데?”

“이걸 받아들이는 거야? 이대로 괜찮아?”

이안은 또다시 물었다. 왜 또. 뭐가 궁금한 건데?

“그게 왜?”

“고위 마법을 익히지 않아도 괜찮은가? 헬파이어 같은 건 모든 마법사의 꿈이지 않은가?”

“난 아니야.”

별 희한한 로망이 다 있네.

“헬파이어가 왜 마법사들의 꿈인데?”

“내 꿈은 아니지만, 다들 그걸 목표로 삼고 하더군.”

이안은 내게 옛날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과거에 북부에는 마계로 가는 통로가 있었는데, 그 통로를 이용해 악마가 등장했단다.

그걸 알아차린 어느 위대한 마법사가 헬파이어를 사용해 그 악마를 죽였다는 해피 엔딩 이야기.

“아마 다들 그걸 듣고 자란 탓이겠지.”

“어, 그렇구나.”

나랑은 관계없는 설화였다.

난 여기서 자라지도 않았고, 그런 이야기를 듣지도 않았으니까.

오히려 이쪽이 좋았다.

어차피 효율이 뛰어난 마법은 정해져 있고, 검술을 보조할 수 있는 정도라면 그걸로 족했다. 조금만 공부해도 효과를 볼 수 있는데, 괜히 오버해서 머리 깨져가며 공부할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이안이 한 말을 줄이면 이러했다.

“이제 공부 안 해도 된다는 거네.”

그가 드물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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