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길버트에게 부탁했던 마나와 관련된 물품에 대한 답변과 카탈로그가 왔다.
길버트는 상관에게 보고하듯 아주 상세하게 물건들을 설명했다. 나는 이를 보며 돈을 썼다.
가진 돈이 많았고, 들어올 돈 또한 많았으니 뇌를 비우고 흥청망청 돈을 쏟았다.
카탈로그가 보여주는 물건의 종류를 요약하면 크게 두 가지.
영약과 아티펙트 따위가 있었다.
영약은 복용하면 일시적으로 혹은 영구적으로 마나가 성장했다.
효과가 일시적인 영약들은 상대적으로 값이 쌌고, 영구적인 영약들은 천정부지로 값이 치솟았다. 그 효력이 눈곱만큼 좋아지면 가격이 2배쯤 상승했으니 그야말로 돈지랄이었다.
나는 영약이 도착하자마자 영구적으로 마나를 키워주는 영약들을 모조리 먹어 치웠다.
“아직은 잘 모르겠네.”
어림잡아도 수십만 골드에 해당하는 영약을 먹어 치웠는데도 단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비타민을 조금 챙겨 먹은 듯했다.
흡수한 마나 에너지를 내 고유의 마나로 만드는 정제 과정을 거친다면 이것마저도 더 줄어들 터였다.
이걸 보니 왜 돈 많다고 자랑하는 귀족들도 돈으로 마나를 사는 걸 기피하는 지 알 법했다.
그야말로 가성비가 극악에 가까웠다.
돈이 썩어나는 게 아니라면 도저히 못 할 짓.
나처럼 돈이 넘쳐나도 쓸 곳이 없고, 마나를 늘리는 게 급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외면할 방법이었다.
그래도 나의 경우에는 괜찮았다.
그간 라파엘이 수련을 게을리한 탓에 메인 캐릭터들에 비하면 내 태어났을 당시에 가까운, 태초에 상태 그대로였다.
단전이 순순한 덕에 그래도 영약의 흡수율이 뛰어났다. 또 돈이라면 풍족했으니까. 지금도 실시간으로 잔고에 돈이 쌓였다.
영약 다음에는 아티팩트 쪽이었다.
[케이시스의 장갑]
이게 경매로 나왔다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원래 제프린의 손에 들어갈 물건이었다.
2학년 때 비숏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 보상이랍시고 황태자가 던져준 보물이었는데, 아직 황실의 비고로 들어가기 전인 듯했다.
케이시스의 장갑.
내장된 마나 배터리가 다 닳았을 때 기준으로 48시간의 충전이 필요했는데, 한 번 완충이 끝나면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마나의 격을 한 단계 올릴 수 있었다.
케이시스의 장갑은 마나의 양을 늘리는 게 아니라, 격을 상승시켰다.
마나의 양이 같다고 해도 사용자마다 그 위력은 천차만별에 가까웠다.
이걸 마력 혹은 지배력이라 불렀는데, 케이시스의 장갑은 사용 시 마력 그 자체를 강화해주었다.
그 시간이 극히 짧은 게 흠이었지만, 효과만을 따진다면 굉장한 물건.
이걸 사는 데는 나로서도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무지막지하게 비쌌다.
마지막으로 별나리라 하는 약초를 대량 구매했다.
별나리는 여러 곳에서 흔히 쓰이는 마나 증폭제였다.
아직 사람에게 사용하기에는 실험이 부족했는데, 어느 연금술 천재가 제프린을 위해 개발할 예정이었다. 전에 말했다시피 극의 초반 제프린의 전투력은 다른 남주 캐릭터들과 비교하면 턱없이 빈약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프린에게는 성장 이벤트가 가득했는데, 비숏이 만드는 영약도 이들 중 하나.
복용 시에 효능은 약 3분 정도 마나에 덤탱이가 붙었다.
나중에 내 본래 마나가 늘어나면 버릴 물건이지만, 그래도 당장에는 요긴했다.
난 장갑과 별나리를 들고 카타리나를 찾아갔다.
내가 구매한 물건들을 설명하며 그녀에게 한 번만 상대해달라 부탁했다. 그녀는 콧방귀를 끼며 나를 비웃었다.
마치 막 대학에 입학한 자식이 그간 모아놓은 용돈을 다 잡상인에게 넘겼을 때 부모의 반응 같았다.
“야, 이 멍청아. 진짜 강자는 이런 거에 의지하는 게 아니야. 자기 자신의 힘을 믿는 거지. 내가 알기로 칼질 그럴듯하게 하는 놈 중에 그러는 놈 하나 없다. 칼 하나면 충분해. 뭘 그런데에 돈을 쓰냐? 너 돈 많아?”
“예. 뭐 돈이 많기는 한데, 우선 한 번 보기나 해주시죠.”
내가 박박 우기자 카타리나는 마지 못해 검을 뽑아 나를 겨눴다.
그녀의 검끝이 내 쪽을 향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털이 곤두서고 호흡이 가빠왔다. 긴장감에 손가락 사이에 땀이 맺혔다.
총구를 코앞에 두면 이런 기분일까? 상대가 발포할 마음이 없는 걸 아는데도 오싹했다.
나는 카타리나가 보는 앞에서 별나리를 입에 넣었다.
별나리는 복용 즉시 제 효력을 뽐냈다. 내 것이 아닌 마나가 느껴졌다. 다소 다루기 까다로웠다. 별나리가 증폭해준 마나만을 움직이려 하면 꽁꽁 얼어붙어서 내 의도를 거부했다.
이걸 사용하려면 고유 마나로 별나리의 마나를 뭉치고 잡아끌어야 했다. 안간힘을 써가며 마나를 모았다.
그와 동시에 케이시스의 장갑을 발동했다. 이걸 사용해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
몸의 말단부위에서부터 전류가 치솟았다. 오감이 예감해지고, 마나라는 육감이 깨어난다. 눈을 감은 것처럼 소리와 냄새를 민감하게 느꼈고, 반응속도 따위가 육체의 한계에 다다랐다.
그 상태로 몸에 마나를 일깨웠다. 근육에 텐션을 주고, 내 몸속 마나에게 너희를 쓸 거라 선언했다.
“스읍.”
내가 발경을 배운지는 채 3달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발경과 이중 발경 사이의 간극은 수재와 천재의 차이였다.
이건 외부의 도움이 없다면 지금의 내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펼치지 못할 규격 외의 기술.
“야. 너, 뭐 해?”
카타리나는 보고도 못 믿겠는지 의뭉을 떨었다.
맘 같아서는 대답이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조금이라도 딴짓을 했다가는 집중이 흐트러질 것만 같았다. 그건 기술의 실패와 직결, 카타리나의 말을 무시했다.
이중 발경.
막상 해보려니 끔찍하게 어려웠다.
일반 발경의 경우 그냥 몸속에 마나를 터트리기만 하면 됐다. 단전 안에 마나는 이미 하나의 구체였다.
그걸 건드리기만 해도 되니 이론상으로는 마나에 대한 감각만 있다면 설명을 듣고서 그 즉시 해낼 수도 있었다.
이중 발경의 경우에는 이미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마나를 둘로 찢어야 했다. 여기서부터가 험난했는데, 그걸 완성하고도 유지 이후 순차적인 격발을 마쳐야 했다.
한 가지만 하더라도 괴이한 난이도의 시험을 몇 번이나 거쳐야 한다.
모든 게 이전에 카타리나가 선보인 이중 발경에 비하면 느렸다.
마나를 쪼개는 속도, 쪼갠 이후에 격발에 들어가는 속도, 두 번의 격발 사이의 틈까지 모든 게 허술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기술 자체야 성공했다.
어깨와 팔이 채찍처럼 움직이며 카타리나의 칼을 때렸다.
충격에 손바닥이 찢어지는 듯했다. 두 검이 부딪치며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고, 풍압에 머리털이 휘날렸다. 디딤발을 댄 곳에 땅이 움푹 파이고, 카타리나를 두 걸음가량 날려버렸다.
그녀는 땅에 두 다리를 고정한 채였다.
고작 나 따위에게 뒷걸음질 친다는 건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겠지. 그녀는 두 발을 고정한 채 홍수에 밀려간 바위처럼 내게서 밀려났다.
찌이이익!
그녀의 발밑에 스키드마크가 남았다.
카타리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말했다.
“그래, 그 정도면 잡기에 의지할 법도 하네.”
나는 실실거리며 답했다.
“그죠?”
카타리나가 인정해줬다.
이거면 된 거지.
* * *
카타리나는 라파엘의 교습을 끝낸 뒤 멋쩍음에 원숭이처럼 턱을 긁적였다.
라파엘의 성장은 무지막지했다. 보통이라면 순수하게 기뻐했겠지만, 그 속도가 터무니없었다.
카타리나가 라파엘을 제자로 삼은 건 제프린을 상대로 이겼기 때문이었다.
그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게 라파엘의 재능이 제프린보다 뛰어남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라파엘이 제프린보다 강했던 것 또한 아니었다.
카티라나는 수많은 실전 속에서 하수가 자신보다 고수를 상대로 승리하는 것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그중에는 상당수가 요행이었고, 행운이었다. 어쩌면 라파엘도 그 수많은 행운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라파엘은 달랐다. 그는 스스로 행운을 쟁취했다.
상대와 자신을 비교해서 강점과 약점을 명확하게 구분했고,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감수한 채 모험을 통해 승리를 따냈다.
카타리나는 거기서 라파엘의 재능을 인정했다.
라파엘의 재능은 그런 것이었다.
신속하고도 정확한 판단력과 주사위를 던질 줄 아는 용기.
몸뚱이를 쓰는 쪽이라면 제프린이 몇 배고 나았다.
카타리나는 이를 좁힐 수 없는 차이라 여겼다. 입학시험에서의 대련이야 라파엘이 이겼어도 시간이 지나면 제프린이 압도하리라 확신했다.
육체 성능에서 격차가 벌어지면 무슨 수로도 메꾸기란 불가했다.
헌데, 오늘의 일검.
카타리나가 무시하고 천대했던 것들의 힘을 빌린 일검이었으나 무거웠다.
자신과 같은 수준이란 건 아니었다. 대비만 했다면 그보다 몇 배는 강한 검격도 몇 번이고, 가볍게 쳐낼 자신이 있었다.
놀라운 건 고작해야 몇 개월 만에 이뤄낸 일격이란 점이었다.
‘나보다 나은 거 같은데.’
카타리나는 자신의 어릴 적을 회상했다.
낮에는 부모님을 따라 농사일을 도왔고 저녁에는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며 검술을 연마했다.
맞다. 라파엘과 비교한다며 척박하기 그지없는 환경이었다.
자신 같은 천재 스승님은커녕 제대로 된 목검 하나 없었다.
그랬던 과거의 자신과 라파엘의 성장 속도를 비교하는 건 무의미한 짓이었다. 카타리나 또한 이를 인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카타리나는 자신을 세상에 하나, 아니 둘밖에 없는 천재라 간주했다.
백사자 기사단에 그 할배를 제외한다면 누구도 동일 선상에 서지 못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처음 제프린을 보고 저놈이 수십 년간 열심히 노력하면 어찌 될지 모르겠다고 평가했다.
라파엘에게 졌지만, 성장 가능성은 제프린 쪽이 더 뛰어나다고 느꼈다. 눈부신 재능이었으니까.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라파엘 아이작.
그놈이 이대로 성장한다면?
수십 년이 아니라 짧으면 10년에도 가능했다. 이대로만 큰다면.
“쓰읍. 아니겠지. 그게 다 아티팩트 덕이라 했으니까.”
카타리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라파엘의 재능을 논하기엔 아직 일렀다.
그가 어떤 검격을 뿜었는지 간에 그건 아티펙트와 영약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거 빼면 아직은 형편없지.”
자신과 같은 천재들과 비교한다면 그러했다.
축복받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누구보다 열심히 재능을 연마해 대성한 경우와 비한다면.
그게 아니라면?
또래 중에서는 당해낼 놈을 찾기 어려울 거고,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 활동하더라도 명성을 떨칠 만했다. 여기에 성장까지도 순조로우니 조금은 자만하고, 늘어질 법도 했다.
“근데 왜 그럴까.”
라파엘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 달렸다. 자신을 한계 이상으로 몰아붙이는데, 막상 대화를 나눠보면 강함 그 자체에 집착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놈에게 강함이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면 뭘까?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그러는 걸까?
몇 번이나 물었으나 라파엘은 대답을 회피했다. 자신을 믿지 못하거나 도와주지 않을 거라 여기는 듯했다.
“답답하시리, 사람 궁금하게 만드네.”
아마도 어마어마한 곳과 척을 진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