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아가레스와 나눈 대화를 요약하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기존에 아가레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디마겐을 잡는 데 협조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뜻을 꺾었다.
거기다 내가 디마겐 보다 더 도움이 된다는 걸 입증하면 그의 손을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확실히 상황이 나아졌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이안에게 열변을 펼쳤다.
“그러니까, 이렇게 됐어.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살짝 부족했네. 그런데 거의 다 잡은 고기나 다름이 없어. 얼마 안 남은 거지.”
“그런가.”
“어.”
“그렇군.”
사람을 압박하는 방법이라면 다양했는데, 지금 이안과 같은 태도는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게 말이야, 나도 잘 해보려고 했거든? 내 딴에는 머리 굴리면서 달래보고, 구슬려도 보고 잘 해봤거든? 근데 이게 잘 안 되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그렇군.”
꽈드득.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안의 말대로였다. 열심히 했다, 노력했다, 따위의 변명은 아무짝이 쓸모가 없었다.
우리는 어린애가 아니었고, 거래는 무거웠다. 실적이 필요했다.
“그래 한 번 더 해볼게. 이번에는 협력을 구해올 테니까.”
“무리할 필요까지는 없다. 네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기는.
나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고맙다고 답했다.
언뜻 보면 이안이 나를 위해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안의 표정부터가 그러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 같은 무표정.
이안이 감정을 느끼는 게 무디다지만, 적어도 감정을 학습하기는 했다.
남을 위로한다거나 할 때 적절한 반응도 알 텐데, 이러는 건 왤까? 내 등을 떠미는 것이었다.
“내일 또 가서 말해볼 테니까.”
“무리할 필요는 없다.”
“아아, 그래.”
* * *
아가레스 잉그레드가 등에 짊어진 짐은 무거웠다.
제 등판에 타고 있는 수많은 영지민들.
그들의 생사와 행복과 불행은 오로지 제 손에 달려 있었다. 자신의 잘못된 손짓 한 번에 많은 이들이 죽었고, 괴로워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영주의 지위를 승계받았다. 그는 어렸다. 아주 많이.
어린 나이에 그는 몇 번이고 실수했다. 그에 몇은 동사했고, 몇은 아사했고, 몇은 마수의 손에 찢겼다.
그에 판단력이 흐트러졌고, 섣부르게 사람을 부렸다. 더 큰 피해를 봤다. 어수룩한 동정심 따위는 짐이었다.
이에 아가레스는 생각했다.
언제나, 어디서나 올바르고,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 감정을 죽이려 애썼다.
제 영지민들의 목숨은 소중한 것이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석이었다.
그다음.
영지 밖의 제국민의 목숨은 그보다는 덜 소중한 것이다. 영지민들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얼마간은 희생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
제국이 아닌 인간들의 목숨은 그렇게까지 소중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인간이 아닌 것들의 목숨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본보기를 보이자.
북부에 숨어든 아인종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그들의 씨를 말렸다.
흔히들 전쟁에서 아이와 노인의 목숨은 취하지 않으나 이를 무시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제 약점이 될 뿐이었다. 죽이고, 죽이고, 죽였다.
이름 뒤에 악명이 뒤따랐다. 제가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소문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괜찮았다. 영지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렇게 아가레스는 공포로 북부를 지키고 다스렸다.
문제는 마물과 마수였다. 그것들은 공포를 모른다. 자기들보다 상위 포식자를 마주하면 도주하나 그뿐이었다. 먹을 게 부족하면, 사냥에 실패하면, 도망칠 수 없다면 목숨을 걸고 덤벼들었다.
그들은 공포를 무시했다. 진정으로 감정을 모르는 그것들은 영지의 민간인들과 병사들을 죽였다. 아가레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했다.
마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연 발생한다.
그 종류도 다양했다. 일반 짐승이 갑작스레 마수로 변하기도 했고, 서로 다른 종의 마수끼리도 번식했고, 어느 날 갑작스레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 원인을 밝히기는 어려웠으나 놈들이 발생하는 장소는 특정되었다.
대개 민가에서 멀었고, 사람이 살기 힘든 오지였다. 아가레스는 병사들을 순찰시켜 놈들을 발견하는 즉시 사살을 명했으나 괴로운 일이었다.
경계 임무를 서다가도 병사가 죽었고, 순찰하던 중 병사가 죽었고, 마수와 싸우다 병사가 죽었다.
이에 아가레스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수단을 써 마수를 죽이고자 계획을 세웠다. 흑마법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제 영지에 실력 있는 흑마법사가 숨어들었다고 한다.
라파엘은 그를 죽이는 데 협조해달라 요청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
아가레스는 단번에 거절했다.
그러자 라파엘은 협조해준다면, 제가 마수를 잡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다.
나름 머리를 굴린 제안이었으나 또한 거절했다. 라파엘이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 그랬었다.
그런데, 이놈 봐라.
“길고 짧은 건 한 번 대보시죠.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라파엘이 제 앞에서 검을 빼 들었다.
가소로웠다. 적어도 수준이 비슷하기라도 했으면 진지하게 응대했지만, 라파엘은 그럴 가치도 없었다.
검술학부에서 수석? 그게 뭐가 어쨌다는 말이냐.
무의미한 왕관이었다. 그까짓 자리는 아무 의미 없다.
라파엘도 제가 멋쩍었는지 검을 든 채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서로 다치지 않게 조심하면서요. 한번 해보죠? 제가 생각보다 강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혹시, 겁나십니까?”
유치한 도발까지 곁들이는 걸 보아하니 애가 타는 듯했다.
“아.”
맞다. 암암리에 들은 소문이 있었다. 저놈은 흑마법사의 손에 부모를 잃었다지?
‘흐음.’
그게 놈이 쫓는 그 흑마법사라면 그럴 만도 했다.
“좋다. 그러면 어울려주지. 힘껏 덤벼.”
* * *
내가 아가레스랑 싸워 이길 수 있는가?
이긴다는 단어의 의미에 따라 대답은 갈렸다.
그를 죽이는 것? 당장이라면 인간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를 제압하는 것? 팔다리를 잘라도 즉시 재생하니 이마저도 불가했다.
그렇다면?
없네.
이길 수는 없는 거 같네.
대신에 그에게 내가 쓸모 있다는 걸 보여주는 정도라면 할 만했다. 특히 짧은 시간 안에 힘을 발출하는 거라면 더더욱.
나는 장갑에 시동을 걸었다.
마나가 부글부글 끓는 듯한 감각과 함께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마나에 긴장을 준 다음에 일순간에 터트렸다.
그런 다음 아가레스의 반대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꽈아앙!
바닥이 박살 나고 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거면 내 힘을 충분히 보여줬겠지 싶어 아가레스를 힐끗거렸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뭘 하는 게냐?”
“아, 그게요. 처음에는 싸워볼까 싶었는데, 이건 좀 아닌 거 같아서요. 목검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진검으로 싸웠다가 서로 다치면 어떡해요?”
“힘 조절쯤이야 내 할 수 있지.”
“그러다 실수라도 하면 아프잖아요. 서로요.”
“서로? 너는 그렇다 쳐도 나는 괜찮다. 네게 다칠 일은 없으니.”
“에이, 사람 일은 모르는 건데 말입니다.”
그러자 아가레스가 안광을 뿜었다.
시꺼먼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더니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나를 비웃었다. 그와 동시에 숱이 많아 진한 눈썹을 찡그렸다.
“보아하니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 듯하군.”
“예, 뭐. 그렇죠?”
“좀 더 자세히 보니 사람을 다치게 한 적도 없는 거 같고.”
“아마, 그럴걸요?”
“겁쟁이였군. 어이, 애송이.”
아가레스는 손바닥이 하늘을 보게 한 후 검지를 까닥거렸다.
“진심으로 칼을 휘두르다 내가 다치기라고 할까 무서운 가 보지? 그 물러터진 생각부터 고쳐주마.”
그는 느닷없이 나를 공격했다. 나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려는 건 아닌지 반응할만했지만, 그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후와아앙!
그의 주먹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바람이 불며 풍압만으로 내 몸을 밀쳐냈다.
“죽고 싶지 않으면 힘껏 휘둘러라!”
아가레스는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하며 나를 공격했다.
그 속도는 제프린과 비교하면 턱없이 느렸지만, 그는 내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가 내가 피하기 위해서 움직일 곳을 예측하고 그물을 던지듯 몰아갔다.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걸 끊기 위한 수는 딱 하나.
반격이었다.
진검을 사람한테 휘둘러야 한다.
“하아….”
여기에 떨어지자마자 내 행동 방침을 정했다.
내 목숨을 가장 우선시한다. 필요하다면, 살기 위해서라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목숨을 해치는 걸 감수한다.
그러나 아가레스의 말대로 나는 겁쟁이인가 보다.
겁을 주려는 게 아니라, 다치게 하고, 죽이게 하기 위한 칼질은 내심 거부감이 들었다.
“뭘 하는 게냐!”
내 망설임에 아가레스는 더 기가 살아나 날 압박했다. 점점 주먹질의 속도가 빨라진다.
째애앵!
아가레스의 주먹을 쳐냈다.
그러자 그가 껄껄거렸다.
“하! 멍청한 놈. 일부러 가슴에 틈을 내어줬는데도 이를 포기해? 나는 아홉 살에 연민이란 감정을 버렸다! 영주라는 놈이 뭘 하는 게야!”
아악!
그는 돌연히 가속했다.
내 가슴을 향해 몇 배는 빠른 속도로 주먹이 날아왔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충격을 대비했다.
“영지를 다스릴 때에 감수해야 할 일이라면 몇 가지나 있다. 그때마다 동정심 혹은 살생이 무서워 감정에 따라 판단을 내리면 더 많은 사람이 죽을 수밖에!”
아가레스는 날 두들겨 패는 대신에 멱살을 쥐고는 귀청이 떨어지게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는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말했다.
“다시.”
왜 이러는 건데. 이러려던 게 아니었잖아.
돌변한 아가레스에 당황스러웠지만, 그냥 원하는 대로 한번 찔러주기로 했다. 어차피 그런다고 죽을 놈도 아니었다.
“마음을 다잡았나 보군.”
“아프다고 울지나 마시죠.”
칼을 내찔렀다.
아라게스 또한 나를 향해 주먹을 뻗었는데, 다소 그 속도가 느렸다. 아마 내가 진짜로 자기를 찌를 수 있게, 겁을 주는 듯했다.
콰직!
검이 아가레스이 가슴팍을 꿰뚫었다.
몸속에 푸른 피가 감돈다는 소문의 아가레스는 시뻘건 피를 뚝뚝 흘렸다. 어쩌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봤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소름이 돋았다.
피부를 뚫고, 근육을 찢고, 뼈를 부수는 감각은 끔찍했고, 뭣보다 아가레스의 표정이 기괴했다.
그는 광대처럼 웃고 있었다.
“좋구나, 계속해봐.”
그는 주먹을 멈추지 않았다.
후우웅!
머리 위로 그의 주먹이 지나쳐갔다. 그는 계속할 작정이었다.
왜? 무엇을 위해?
실실 웃는 꼴을 보아하니 한순간의 흥미였다.
장갑에 시동을 걸며 아가레스를 노려봤다. 그의 뻥 뚫린 가슴은 쉴 새 없이 피를 쏟아냈다.
그는 의도적으로 회복을 멈추고 있었다. 꼭 내게 사람을 다치게 하게, 죽이는 감각을 알려주려는 듯했다.
장갑이 빛을 뿜었다. 평소보다 몇 배로 강한 힘이 느껴졌다.
빠아아악!
아가레스와 주먹을 맞부딪쳤다. 그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어정쩡한 상태로도 나를 그대로 날려버렸다.
콰앙!
족히 3M는 밀려났고, 나무에 등을 부딪쳤다.
거리가 생겼다.
나는 주머니에서 별나리를 꺼내 먹었다. 몸속에 힘이 차오른다.
발경은 일순간에 더 큰 힘을 내는 기술. 이를 땅을 박차고 돌진하는데 사용했다.
등판에 로켓이라도 달린 듯 주체못할 속도에 바람을 뚫고, 아가레스에 접근했다.
속도를 타고 검을 뻗었다.
찌르기.
아가레스는 손을 뻗어 이를 막으려 했으나 손바닥을 그대로 꿰뚫었다.
여기서 멈출 수도 있었다.
보통이라면 재기불능의 부상을 입혔다. 하지만 아가레스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고, 아가레스를 찔었다.
“허억…. 허억….”
숨이 찼다. 팔과 다리가 무거웠다. 드디어 끝났다는 감각에 피로가 몰려들었다.
“잘했다.”
어느새 몸을 복구한 아가레스가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 순간이었다.
쿠릉!
백색의 천둥이 쳤다. 천둥이 아가레스를 격추했다.
그대로 아가레스의 팔 하나가 날아갔고, 그는 감전돼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아가레스는 즉시 날개를 펼치며 악마로 변해 몸을 재생시켰으나 전류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서였구나.”
난데없는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이안이었다.
그는 허공을 밟은 채 시뻘건 안광을 뿜어냈다. 그는 섬뜩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다소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라파엘의 말을 듣고서 어떤 머저리인가 생각했다. 병신도 아니고, 제 영지에 상종 못 할 범죄자가 침입했다는데, 그걸 허허 넘길 리가 없지.”
“누구냐!”
이안은 주변의 마력을 통제했다.
제 본인의 마나홀로 마나를 끌어당기며 그를 흡수했다. 일대의 중력이 강해졌고, 산소가 희미해졌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안이 마법사로서의 재목이 탁월한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의 재능이 작가 공인 고금제일인 것 또한 맞았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일렀다. 마나의 질과 양처럼 수련 시간과 연관이 깊은 쪽으로는 더더욱.
이렇게 강할 리가 없었다.
나는 이안의 눈을 주시했다. 새빨갛게 빛났다.
저거 때문이구나.
이건 본래 작중 후반에서의 이벤트.
비숏의 위기에 이안은 크게 분노했고, 새로운 특성을 각성했다. 광분, 광폭화, 분노조절장애 등등 누나가 매일 다른 이름으로 불렀던 그 힘이었다.
화가 날수록 마력이 강해지는 그 특성.
“네놈도 그 흑마법사 패거리 중 하나였구나.”
이안을 중심으로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모여들어 폭풍을 일구었다. 그는 강력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끝은 아가레스에게 향할 터였다.
“와.”
미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