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아가레스가 다시 마찰을 빚기 전에 먼저 이안을 만나려고 했다.
이놈이 어디에 있을까 여기저기 찾아봤는데, 그는 참 태평하기도 했다. 제 기숙사 방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명상 중이었다. 아니면 자는 중이었거나.
“지금이 그럴 때야?”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내 지적에 그는 감았던 눈을 뜨더니 말했다.
“싸우면 내가 이겨.”
“야, 걔는 안 죽어. 죽여도 부활해.”
“상관없어. 죽지 않는 놈이 그놈뿐이었던 것도 아니니까. 제압할 방법이라면 몇 가지나 있어. 봉인 혹은 전이. 걱정하지 마.”
“그냥 안 싸우면 안 되냐?”
이안에게 아가레스와 싸웠던 일을 설명했다.
진짜로 서로 죽이려 했던 게 아니라 단순한 대련이었음을 말했다. 이에 이안도 멋쩍은지 머리를 긁적였다.
“흠. 미안하게 됐네. 이거.”
“그니까 좀 여기를 떠나 있어 봐.”
이안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왜? 사과하고 풀 일이잖아.”
“걔는 사과 안 받아준대. 자기는 용서 같은 거 안 해준대.”
이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속 좁은 거 봐. 좀스럽네. 사실 안 그래도 잠시 아카데미를 떠나려고 했어.”
“왜?”
“너는 내가 디마겐과 싸우면 죽을 거라고 말했지. 이젠 아니야. 그놈이 얼마나 강하던,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놓았던 상관 없어.”
“네가 더 세니까?”
“어. 아가레스라고 했던가? 그놈이랑 한 번 붙고서 깨달은 게 있어. 이거면 돼. 이거면 누구라도 이길 거 같아.”
그건 사실이었다.
광폭화, 분노 기타 등등으로 불리는 그 특성을 얻고 이안은 세계관에서 알아주는 강자 라인에 들어섰다.
원래라면 이렇게 빨리 얻을 힘이 아니었다. 디마겐 같이 극을 진행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치쯤이야 쉽게 이길 것이다.
“그래 잘됐네. 갔다 와.”
“갔다 올게. 다음에 보자.”
“다음에?”
우리의 거래는 끝이 났다.
나는 이안이 디마겐을 잡을 수 있게 돕는다.
그는 그 대가로 내게 마법을 가르쳐주었고, 또 그를 위했던 일이지만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여기서 마침표를 찍었다. 끝이었다.
우리가 더 만날 이유는 없었다.
이안은 주먹으로 내 가슴팍을 툭 쳤다.
“친구잖아.”
큭.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나랑 애가 친구인가?
잘 모르겠다.
중고등학교 때는 반 혹은 학년이 같은 소속이라면 친구라 했다.
군바리 시절에는 같은 군번이면 친구였고, 대학생 때는 수업이 끝났는데도 만나면 친구라 했다.
사실 그런 걸 다 떠나서 만날 필요가 없는데 만난다면 친구라 할 수 있겠지.
그러면 애가 나랑 친구가 맞는가?
고작해야 친구라는 단어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
그냥, 그 말을 들으니까 지금까지의 내 생활이 너무 팍팍했다 싶었을 뿐이었다.
그럴 게 인간 대 인간으로 상대했다 싶은 인물이 없었다.
그들이 감정을 느끼고,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장치와 도구처럼 대했다. 살기 위해서.
“그래. 건강하게 만나자.”
나도 이안을 주먹으로 한 대 쳐줬다. 이안은 그날 저녁에 떠났고, 나는 평소대로 훈련했다.
많은 일에 시달려 정신적으로 힘들었지만, 아직 몸에 체력과 마나가 쌩쌩했기에 잠자리에 들 수는 없었다.
나는 훈련장에 내려가 전신에 근육을 찢은 다음에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앞에 도착하니 눈에 뜨이는 게 있었다. 편지함이 꽉 차 있었다.
편지를 보낼 사람은 코로망뿐인데, 대체 몇 통을 보낸 건지 싶어 편지함을 열었다.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기숙사으로 통하는 현관문을 열며 표지가 빈 책을 펼쳤다. 책은 마법에 관한 것이었다. 순서대로 마나를 다루는 법, 마나를 이용해 마법을 사용하는 법, 그 마법을 응용하는 법 따위를 설명했다.
스승 없이 독학할 수 있는 책이었다.
언제가 서로 떨어질 때를 대비해 이안이 준비해둔 듯했다.
* * *
황태자 홀리기 작전.
대충 줄여서 황태홀. 나는 나비에와 성공적인 황태홀을 위해 아카데미 근처에 카페에서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고안했으나 진전이라고는 없었다. 서로 음료만 쪽쪽 빨아대며 시간을 보냈다.
그게 답답해 말했다.
“뺨이라도 때려보지그래?”
내 진담에 나비에는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그녀는 본래 웃을 때 치아가 보이지 않게 조심스레 웃었는데, 잇몸까지 보이는 걸 고려하면 몹시 우스웠던 모양.
“이제는 농담도 하시네요.”
“그래. 실언이었어.”
멍청한 소리였다.
여주가 남주의 뺨을 때리는 건 죽은 클리셰였다.
10년 전에나 먹혔을 작전을 쓰다가 일을 그르치는 건 멍청한 짓.
다른 수를 떠올린답시고 원작의 내용을 곰곰이 훑었다. 비숏과 황태자가 언제 만났더라?
황태자가 처음 비숏을 본 건 무도회장이었으나 그건 일방적인 만남이었다. 비숏은 무도회장에서 책을 본답시고, 황태자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재미있게도 둘이 만난 건 아카데미 밖에서였다.
당시에 황태자는 신분을 숨기고, 시장을 구경하던 중 호위 무사가 거추장스러워 도망친다.
황태자의 호위는 정예 기사였으나 상대가 상대인 만큼 신중을 기했음에도 놓쳐버리고 말았다. 황태자가 비숏과 만난 건 그때였다.
황태자는 호위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다소 값싼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린 모습으로 비숏을 맞이한다.
그는 모종의 사정으로 비숏과 만나고 동행을 하게 되는데, 자신의 신분을 평민이라 속였다.
이에 비숏은 평민 신분에 황태자의 고단할 아카데미 생활을 동정하고 동질감을 느껴 친구 마냥 대한다.
황태자는 발이 넓을 수밖에 없는 신분이었다.
어려서부터 여러 선생을 두고, 여러 가문의 자제들과 교류했다. 그러나 그들 중 진심으로 친구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겉으로는 그를 편하게 대하는 척했으나, 내심 그를 두려워했다. 그가 어렸을 때도 주변인들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온 황태자에게 비숏은 새로웠다. 스스럼없이 그를 보통의 또래 친구를 대하듯 다루었다.
이를 흥미롭게 여긴 황태자는 비숏과 헤어질 때까지 제 신분을 숨겼는데, 이게 코미디의 시발점이었다.
언젠가는 말해야지, 다짐했으나 황태자는 조금씩 날을 미루다 끝내 오해가 깊어졌다.
세상에 두려울 거 하나 없는 황태자가 안절부절하는 게 포인트였던 장면이었다.
나는 눈을 들어 나비에를 흘겼다. 그녀는 뭘 보냐는 양 피식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요?”
“아니야. 아무것도.”
이걸 애한테 제안하기에는 뭘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막막했다. 여건 자체가 다른 탓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에는 뭐가 있었지?
도시락 에피소드였다.
평민인 황태자가 굶주릴 거라 예상한 비숏은 직접 도시락을 만들어 가져다주는데, 그 퀄리티가 공산품을 방불했다.
늘 배불리 먹는 황태자는 이를 번거롭다고 여겨 주변 사람에게 넘겨버리는데, 사정을 알고는 크게 후회한다.
음.
이거는 어떨까 고민하고 있는데, 나비에가 톡 쏘아붙였다.
“왜 자꾸 그렇게 봐요?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아니야. 미안하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나비에는 손에 물 한 번 안 묻혀봤을 듯했다.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너, 요리는 좀 해?”
“해본 적은 없어요. 소질이 있을 수도 있는데, 아마 못 할 거 같네요.”
“그야, 그렇겠지.”
이번 것도 패스였다.
그러면 또 보자. 뭐가 있었던가?
그래. 비숏은 사람을 보고는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다.
우스울 때, 즐거울 때가 아니라도 사람은 웃는다. 사람을 대할 때면 억지로라도 입꼬리를 올리곤 하는데, 비숏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미소를 지을 때는 연금술에 몰입하고 있을 때뿐이었다.
이를 알고 황태자는 인간이 아닌 연금술까지도 질투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왜 자꾸 보는데요.”
“야. 너는 왜 자꾸 웃고 있어?”
“예? 제가요?”
나비에는 손을 들어 제 입가를 만지더니 바락 소리쳤다.
“전 원래 이렇게 생겼어요. 이제는 생긴 거로도 뭐라 하시는 건가요?”
“아니야. 미안해. 넘어가자.”
톡톡.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몇 번 두들겼다.
이제부터 중요한 걸 말할 테니 집중하라는 의미였는데, 나비에는 내가 두드린 것과 똑같은 박자로 책상을 톡톡 쳤다.
“푸흡.”
“자꾸 치시길래, 뭐 재밌나 해서.”
“그래, 그런데 너는 뭐 없어? 머 방법이나 계획 같은 거.”
“다른 영애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그런 건 없어요. 남들 다 똑같이 하는 거를 더 잘할 수는 있겠지만, 남들과 다른 방법을 쓸 줄은 모르네요.”
“그러면 너는 웃지 않는 거로 가자.”
“예?”
나는 양손으로 입꼬리를 각각 잡고 아래쪽으로 잡아당겼다.
이를 보고 히죽거리는 나비에를 무시하고, 내 할 말을 했다.
“네 말대로면 너는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웃는 거처럼 보인다는 거잖아. 그러면 황태자님 앞에서는 항상 정색하는 컨셉으로 가자고.”
“괜찮은 거 같기도 한데, 그 일단은 제가 황태자님과 대화할 일부터가 없거든요. 일단 말이라도 하는 사이가 되며 그때 정하죠.”
“싫다. 안 된다. 그 말만 하지 말고, 그러면 너도 좀 대책을 내봐. 허무맹랑한 거라도 괜찮으니까.”
“제가 안 된다고 말씀드린 거는 이번이 처음인데요?”
“아무튼.”
톡. 톡. 톡.
나비에는 검지, 중지, 약지 순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눈동자가 천장을 향하는 걸 보니 방법을 고안하는 듯했다. 그녀는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탄성을 뱉더니 두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아까 황태자님의 뺨이라도 때려보라고 하셨죠?”
“어. 그게 왜?”
“뺨을 때린다는 행동, 좀 이상하지 않은가요?”
“그게? 왜?”
나비에는 두 손을 모으더니 자기 혼자 납득했다는 양 머리를 까딱였다.
“그야 생각해보면 그렇잖아요. 상대에게 고통을 주고 싶은 거라면 주먹질을 하는 게 효율적인데, 왜 뺨을 때릴까요?.”
“꼭 아프게 하려고 뺨을 때리는 건 아니잖아. 따귀라는 게 약간 상징적인 그런 거지.”
“네, 그야 저도 잘 알죠. 많이 봤으니까.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주려는 게 목적이잖아요. 근데 그쪽도 별로인 거 같아요. 혀가 있잖아요.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려는 거라면 혀가 제일이죠.”
들어보니 합리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걸 굳이 지금 해야 할까?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길래 황태자 홀대하기 작전을 성공시킬 계책이라도 찾는 줄 알았는데, 이게 뭐란 말인가. 뭐라 한마디 무안을 주려 했는데, 나비에가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거 어때요? 누가 제 뺨을 치는 거죠.”
“누가?”
“적당히 사람 시켜서요.”
아무도 지원 안 할 거 같은데.
네 뺨 한 대 쳤다가 보복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나비에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그 추종자들인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 뒤가 궁금해 물었다.
“뺨을 맞으면?”
“제가 주먹으로 보복하고 말로 마음을 후벼 파는 거죠. 멋있지 않을까요? 어딘가 신선하기도 하고요.”
“너는 감성이 보편적이지 못한 거 같아.”
아무래도 애한테 도움을 바라면 안 될 듯했다. 그렇게 아쉬워하고 있을 때였다.
카페에 소란이 일었다. 다들 무어라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신음하며 저희들끼리 소곤거렸다.
뭔 일인가 싶어 주변을 확인하니 우리의 목표물이 등장했다.
황태자, 카르테아.
그는 이쪽으로 걸어와 내게 말했다.
“그때 경매장에서 산 꽃은 누구에게 주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