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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32화 (32/125)

제32화

내 행보에 따라 명줄이 달라진다는 걸 생각하고 움직이니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불안함을 가실 수 있었다.

그 탓일까.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하면, 그게 긍정적인 일이든, 부정적인 일이든 관계없이 심장이 철렁였다.

황태자가 왜 여기서 등장하지?

그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심란함을 가중시켰다. 저건 왜 저렇게 번쩍거리는 건데.

황태자, 카르테아 사비 이니에스피.

그는 야산의 산삼 같은 존재였다.

산 어딘가에 있는 건 맞는데, 막상 찾으러 이곳저곳 남김없이 털어봐도 털끝 하나 보기 힘들었다.

그가 먼저 찾아오다니, 머리가 핑핑 돌았다.

더군다나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상황에 따라 그가 내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일.

언제나 입을 조심해야 했다. 그가 뭐라고 했더라, 곰곰이 되새기며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우선은 황손을 향한 인사가 먼저였다.

나와 나비에는 그에게 만나서 반갑다고 머리를 숙였다.

그런 다음 나비에가 카르테아의 말을 받았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꽃이요?”

그래.

경매장에서 내가 꽃을 산 일이 있었다.

꽃의 이름은 아르바니아.

이안에게 만들어줄 수면제에 들어갈 재료였다.

당시에 카르테아 또한 제 누이에게 준다며 아르바니아를 구매하려 했으나 내게 양보했었다.

그때 일이 떠올라 내게 말을 건 거네.

나는 나비에의 표정을 흉내 냈다. 눈을 편안하게 뜨며 입꼬리를 살살 올렸다. 이렇게 하는 건가.

거울이 없어 확인은 못 했지만, 비호감은 아니겠지.

“아르바니아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저는 검술학부이지만, 연금술에도 관심이 있어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아르바니아는 연금술을 하는 데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내가 연금술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건 나비에한테는 말해준 적 없는 정보였다.

겉으로야 서로 친한 척하고 있었지만, 친구라기보다는 동업자 같은 관계였다.

몰랐던 사실인지 나비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따지고 싶은 게 있는 표정이었는데, 나와 황태자 사이에는 끼지 못했다.

“그런 거였나? 그때 하도 간절해 연인에게 선물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하하, 연금술을 익히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래? 애인이 있는 건 아니고?”

“아닙니다.”

카르테아는 내게 말을 하면서도 나비에 쪽을 살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낌새인데, 내가 불편한 듯했다. 눈치껏 사라져주자.

“그러면 나는 이만 가볼게. 다음에 보자.”

느닷없이 나비에한테 이별을 고했다.

마치 카르테아가 오기 전부터 대화를 끝마친 듯한 마무리에 어리둥절할 법도 했으나 나비에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내 표정을 살피고, 기색을 읽더니 미소를 지었다.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눈치 하나는 발군이네.

내용물이 빈 음료를 쥐고 카르테아에게 인사한 후 카페에서 빠져나와 시계를 확인했다.

14시 20분. 연금술과 관련해 비숏과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3시간가량이 여유가 있었다.

나는 마법학부의 연습실로 들어가 마법을 연습했다.

아카데미의 학장인 프란츠부터가 마법사인 탓일까?

마법학부의 건물은 다른 학부에 비해 유달리 투자가 많이 들어갔다.

아카데미 내에 자그마한 탑이 솟아 있었다. 바깥에 정식으로 등재된 마탑에 비하자며 초라하지만, 그래도 아카데미에 학생들은 이를 마탑이라 불렀다.

마탑은 총 9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중 지하에는 마법을 직접 사용해보기 위한 연습실이 있었다. 지난번에 이안과 허수아비를 향해 마탄을 던졌던 장소가 바로 이곳. 나는 연습실에 내려가 이안이 전해준 책을 펼쳤다.

-네가 이 책을 펼쳐볼 때쯤에는 나는 이곳에 없겠지.

하는 우습지도 않은 도입부로 책은 시작했다. 우습지도 않은, 별거 아닌 문장이었다.

“푸흡.”

그럼에도 웃음이 나왔다.

이안이 어울리지도 않는 유머를 시도했다는 게 퍽 아이러니했다.

-너는 나름의 방법으로 인지력과 제어력을 키우고 있는 듯하니 그를 활용할 수 있는 마법을 설명하겠다.

몇 번인가 읽은 내용에 앞 문장만 읽어도 뒤에 문장을 적을 수 있었다.

타다다다당!

12개의 마탄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쏘아 허수아비를 격추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내 실력에 나조차도 감탄이 나왔다. 이안이 남겨준 책을 보며 독학했는데, 이걸 내다 팔면 어마어마한 돈줄이 될 듯했다.

마법사들은 대게 돈이 많았고, 제 마법 실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기꺼이 지갑을 벌렸다.

이안이 남긴 책은 학습자를 배려하는 구석이라고는 없었지만, 그 내용만큼은 훌륭했다. 나 같은 초보자도 금세 실력을 키울 만큼.

나는 이번에 시험해볼 마법에 해당하는 페이지를 다시금 확인하려 소리 내어 읽었다.

“마탄에 원소를 가공한다. 처음부터 마탄 자체를 변환하려 시도하지 말고, 마탄에 옷을 입힌다는 느낌으로 연습한다. 이후 요령을 깨달으면 마탄 자체를 원소 마탑으로 발포하는 연습에 들어간다.”

아카데미는 가능한 학생들의 자유를 보장해줬는데, 그중에서 절대로 허용하지 않고 금하는 게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가 기숙사 내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것.

간단한 마법이야 몰래몰래 썼다지만, 이런 건 나도 겁나서 시도하지 못했다.

화르륵!

손바닥 위에서 주홍빛 불꽃이 타올랐다. 정해진 형체 없이 사방으로 일렁이며 춤을 추는 불꽃을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진짜 마법 같은 마법을 쓰는 건 처음이었다.

“와, 이게 진짜 되네.”

손 안에 불꽃을 꺼트린 다음에 마탄을 만들었다.

이제는 실력이 제법 늘어 마탄의 모양이나 크기가 균등했다.

그 수는 다섯. 평소보다 사용하는 마탄의 수를 줄였다. 오늘은 한 단계 더 나아갈 테니까.

이글이글.

먼저 하나의 마탄에 불을 붙였다.

푸른 마탄의 표면에 살금살금 붉은 불꽃이 피어났다.

불꽃은 조금씩 마탄을 잠식했고, 끝내 화염탄을 만들었다. 그렇게 남은 4개의 마탄을 또한 화염탄으로 만드려 했는데, 집중력의 문제로 실패했다.

새로운 화염탄을 만들고 있으면, 기존에 만들어둔 화염탄에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하아.”

한참을 옥신각신 한 끝에 동시에 2개의 화염탄을 만들었고, 이를 허수아비를 향해 발포했다.

팡! 팡!

화염탄의 위력은 그저 그랬다.

일반 마탄으로 허수아비를 격추했을 때랑 엇비슷했는데, 허수아비가 불에 조금 그을린 게 전부. 정공법으로 만든 화염탄이 아니라 흉내만 낸 탓이었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16시 30분.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화염탄을 만들었고, 발포하기를 반복했다.

* * *

비숏과 만나는 장소는 보통 동아리방으로 잡았다. 그녀가 카페처럼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장소를 기피한 탓이었다.

시간이 늦어 사람들이 빠지고 한산한 동아리방으로 들어오자 비숏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를 맞이했다.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푸석푸석했고, 눈이 움푹 파인 게 피곤함에 절었는데 눈동자는 초롱초롱했다.

그녀는 내가 딴소리할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양 머리만 숙여 인사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엘제닉 병의 치료제를 만드는데 지금까지의 진척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우선은 약을 만드는데 가닥은 잡았습니다. 재료의 목록을 짜는 일을 끝냈고, 이제는 그 배합과 조제 방법을 정하면 될 듯합니다.”

“이야, 대단한데? 엄청 빨라.”

“또 지난번에 말씀드린 재료 중에 결합을 거부하는 게 있었는데, 이를 대체하려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떠드는 비숏에게 최대한 열심히 맞장구를 쳐줬다.

아. 응. 그렇구나, 따위를 순서를 혼합해 말했다.

비숏은 이 수수한 호응에도 열을 다해 제 성과를 자랑했다. 그러더니 뭔가 난처한 게 있다는 듯 턱을 잡아당겼고,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를 만드는 일은 시행착오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일. 문제나 생기고, 벽에 막히는 일이라면 괜찮았다.

“왜? 뭔가 걸리는 게 있어?”

문제가 생겼다고 한들 내가 조언해줄 수 있을 리 만무했으나 다들 으레 그러하듯 묻자 비숏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약의 제조는 순조롭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약의 시험판에서 어떤 이상반응이 발생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용하는 재료들이 강한 탓에 부작용이 발생한다면 그 여파가 클 텐데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아.”

약을 만들었다고 바로 특허를 내고 시장에 판매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약의 안정성을 검토하는 시험을 몇 차례 거쳐야 했는데, 흔히들 짐승에게 투약한 이후에 그 반응을 살피고 인간에게 임상시험을 가했다.

비숏이 고민하는 이유는 엘제닉 병이 인간에게만 발생하는 탓.

짐승에게 실험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표본을 얻지 못한 채 엘제닉 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투약해야 했다.

이럴 땐 주로 노예에게 강제로 실험하거나 가난한 이들에게 보상금을 주고 자원을 받았는데, 비숏은 그게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그게 걱정되는 거면, 이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원자를 받으면 되지 않을까? 엘제닉 병은 불치병이고, 치료제가 없는 상황이니 지원자가 나올 거야.”

“하지만 지원자들은 부작용을 크게 앓을 수도 있습니다. 심하면 죽을지도 모르죠. 치명적인 이상반응을 보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지원자를 받는다는 게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원작에서 없었던 일이었다.

원작에 비숏은 부작용 따위를 언급하기는 했으나 지금처럼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아마 당시에 비숏은 연금술에서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대박작을 연달아 터트리며 자신감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탓이겠지.

성공을 향해 계단을 오르듯 승승장구했던 원작의 비숏에 반해, 지금 내 눈앞의 비숏은 아무것도 없었다.

흙뿌리망초의 새로운 사용법에 대한 가닥을 잡기는 했으나 나로 인해 놓쳤다.

그녀는 성공해본 경험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제가 만들 결과물을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사람의 건강, 생명과 연관된 일이니 더더욱 그럴 테고.

그럼 이제 내가 그녀의 자신감을 북돋을 수 있는 말을 해주면 될까?

으음.

이건 아닌 거 같은데.

그녀가 앓고 있는 문제를 자신감의 부재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건 너무 섣불렀다.

그녀에게 다 잘 될 거야, 넌 할 수 있어 따위의 응원을 하는 건 쉽지만 그 결과물을 내가 보장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가 비숏이 대차게 실패하고 나를 원망한다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는 아니었다.

“답이 있는 일은 아닌 거 같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야. 노예를 사 실험하거나 지원자를 받거나.”

“그렇습니까.”

비숏은 눈을 내리깔았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호흡을 고르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해했습니다. 답이 있는 문제는 아닌 듯하군요. 그래도 그렇다면 지원자를 받는 쪽으로 하겠습니다.”

“지원자에게 줄 보상금은? 그건 어떻게 할까?”

“지금 당장은 대답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대답은 다음에 준비해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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