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아가레스와 다투었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 아가레스는 칼에 뚫렸고, 썰렸다. 벼락을 맞았고, 마력 폭탄에 휩쓸리기도 했다.
피를 철철 흘렸고, 살이 타올랐다.
얼마나 아팠을까?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노릇이었는데,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지독하게 아팠겠지.
아가레스는 재생 능력 덕분에 피부에 흉터가 남지 않는다.
그의 피부는 깨끗했다.
하지만 북부에서의 전투에 몇 번이고 화살에 꿰뚫렸고, 칼침을 맞았다. 마수에게 물어뜯긴 적도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보다야 고통에 대한 내성이 뛰어날 테지만, 통증 자체가 줄어든 건 아니었다. 남들과 똑같이 아파한다.
그도 무지막지하게 아팠을 것이다. 그걸 상기하니 절로 솜털이 곤두섰다.
아가레스가 칼침을 맞은 건 전적으로 그의 잘못이었다. 모두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
벼락이 꽂히고, 폭탄에 죽다 살아난 건 눈곱만큼이지만 내 지분이 있다고도 말할 수도 있었다.
내가 강자였다면 무시해도 될 만큼 작은 잘못이지만, 어디까지나 난 약자에 불과했다. 그래서 아가레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해서 그를 찾아가 상황을 유리하게 설명하기로 했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빈손으로 갈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그에게 찾아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뭐라도 하나 줘야 할 것만 같았다.
“뭘 주지? 뭘 줘야 하지?”
애매했다. 입지도 않을 옷이나 먹지도 않을 간식을 줄 수는 없으니 머리가 아파 왔다.
그는 공작가의 영주로서 열심히 살았으나, 대충 입었고, 대충 먹었다.
특별히 기호라 할 게 없었는데, 굳이 취향 혹은 취미를 따지자면 내가 문외한인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악기 같은 걸 사다 주는 건 더할 나위가 없이 멍청한 짓이었으니 제외한다. 현대였으면 공연장 예매에 쓸 수 있는 상품권 따위를 주면 될 텐데, 여긴 상품권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면 어떡하지?
“방법이 있기는 한데.”
퓨어문 가문이 다스리는 영지에서 자연 발생하는 돌덩이 중에 특별한 게 있었다.
이름은 발온석. 말 그대로 열기를 발하는 돌이었는데, 현대로 치면 핫팩 같은 물건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효력이 떨어지지 않는 핫팩.
이렇게 보면 제법 쓸만한 물건이었지만, 발온석이 뿜는 열기 자체가 미약했다. 현대에 핫팩이 주머니에 넣고 잠들면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운데 비해 발온석은 끽해야 사람의 체온보다 살짝 높은 수준이었다.
추위를 버티는 데는 별 도움 되지 못했다. 거기에 채굴량까지 적으니, 가성비가 퍽 나쁜 물건이었다.
원작에서 비숏이 구해줘서 고맙다며 발온석을 아가레스에게 선물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때 아가레스의 반응은 무척 좋았다. 그 개고생을 하고 돌덩이 하나를 받았을 뿐인데도 기뻐하며 고맙다고 했다.
왜?
발온석이 그의 취향에 딱 들어맞아서?
아니었다.
그가 기뻐한 건 비숏이 줬으니까.
내가 그에게 발온석을 준다고 해도 그가 기뻐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나는 비숏이 아니니까. 원작의 비숏만큼 아가레스와 친한 사이도 아니니까.
사실 발온석이 열기를 뿜는다고 해봐야 극히 작은 열기였다. 막상 발온석을 북부에 들고 가면 열기를 뿜는지도 모를 터였다.
실용성이라고는 없는데, 장식으로 쓰기에는 생김새도 퍽 수수했다.
“그러면 남은 건 술인가.”
그가 술을 마신다는 묘사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난 술에 대해서도 조예가 얕았고, 특히나 이곳 음주 문화에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분야 혹은 품목이 정해졌으면 상황이 나아졌는데, 내게는 돈이 있었다.
어차피 가진 돈은 넘쳐났고, 앞으로는 더 많은 돈이 들어올 예정이었다. 아끼지 않고, 흥청망청 쓰자.
* * *
나는 아주 값비싼 술을 샀고, 발온석과 함께 그를 찾아갔다.
“오래간만이군.”
“하하, 그때 뵙고, 며칠 안 지났습니다.”
“어마어마한 일이 있고의 며칠이지.’
나는 그에게 경매장에서 큰돈 들여 사 온 술을 건넸다.
오우거인가 드래곤인가 몬스터의 이름이 붙은 술이었고, 18년인가 20년인가 된 술이었다.
“뭐지?”
“선물입니다.”
“자네가? 내게? 왜?”
“그때 일이 죄송해서 말입니다.”
“자네가 내게 미안해할 거는 없어. 오해가 생긴 건 자네 탓이기는 하나, 그걸 어찌 자네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나? 다 그 마법사 놈과 풀어야 할 일이지.”
“이안은 현재 아카데미를 떠났습니다. 디마겐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요.”
“그런가?”
“예.”
이안이 아카데미에서 자리를 비웠다는 말에도 아가레스는 불쾌한 기색은 아니었다.
벼락을 맞은 것에 원한을 느끼는 건 아닌 듯했다. 이안에게 분풀이를 할 것처럼 말하는 건 순전히 그의 입장 때문인 듯했다.
그와 대화로 일을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럼 지금 바로 한잔하러 가지.”
“술을 말입니까?”
“이곳에 온 이후 늘 자작을 했거든.”
갑작스러운 술자리 제안에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술을 마셔도 괜찮을까?
원작에 이 몸뚱이의 주인이 음주를 즐겼다고는 해도 오래전 일이었다.
지금 내 간은 수개월째 알코올 한 방울 해독하지 않았다. 필시 주량이 떨어졌을 텐데, 거부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라파엘의 술버릇이 뭐였지?
캐릭터 컨셉을 감안하면 결코 조용한 종류는 아닐 텐데.
아가레스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말했다.
“왜? 싫은가?”
“아닙니다. 좋습니다. 바로 가시죠.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내 방으로 가지.”
나는 술병을 들고 그가 묶고 있는 기숙사로 움직였다.
아가레스도 공부를 잘했던 걸까? 그는 장학생을 위한 특별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어쩌면 공작이라는 신분을 이용한 걸 수도 있을 거고.
그의 방은 현대에 미니멀리스트마냥 깔끔했다. 아니, 필수적인 가전제품조차도 없으니 더 황량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는 안주도 없이 마실 생각인지 부엌에서 잔만 둘 들고 왔다.
대개 귀족들이 음주할 때면 술만큼이나 술잔에도 신경을 썼다.
화려하게 장식된 고블렛을 쓰기도 했고, 술의 종류에 따라 갖가지 잔을 활용했다,
“받게나.”
아가레스가 내게 내민 잔은 투박한 목제였다.
치이이익!
아가레스에게 줄 술을 고를 때 추운 지방에 사람들은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신다는 편견에 내가 마실 것도 아니라는 안일함까지 곁들었다. 오우거인가 드래곤인가는 무지막지하게 도수가 높았다. 술병의 마개를 따자마자 강렬한 알코울 향이 방안을 채웠다.
“먼저 한잔하시죠.”
손에 술병을 든 채 슬쩍 아가레스의 눈치를 살폈다.
여기서도 술을 따를 때 상표 라벨을 가리고 그래야 하는가? 늘 하는 말이지만, 뭐든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기에 현대에서 배웠던 주도를 따랐다.
아가레스는 내가 술을 어떻게 따르던 관심 없는 눈치였는데, 제 술잔이 채워지기 무섭게 술병을 뺏어 내 술잔에 술을 따랐다.
“건배하지.”
그보다 술잔을 높이 들지 않게 조심하며 잔을 부딪쳤다. 아가레스는 술잔이 째앵 울리자마자 목에 술을 털어 넣었다.
나도 빨리 술잔에 출렁이는 술을 처리해야 하는데, 냉큼 마시기는 무서웠다.
그렇다고 몰래 술을 버리는 것은 소드마스터라도 되지 않는다면 아가레스에게 걸리지 않기란 어려운 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잠시간 망설였다.
답은 하나였다. 결국에는 마셔야 한다는 게 결론이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술을 입가에 가져오는데, 달짝지근한 향을 넘어서는 알코올의 냄새에 심장이 쿵쾅였다. 한 번에 마셔야 하는데 어떡해?
아니다. 이까짓 술 못 마실 이유가 없었다.
“콜록콜록!”
알코울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점막을 자극했다.
한 모금 삼키자마자 독한 알코올 냄새에 기침을 토했다. 억지로 입을 닫으며 마시기 힘들다는 걸 숨기고, 술잔을 끝까지 비웠다.
“맛이 좋구나.”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아으. 쓰린 속을 달래며 술판을 확인하니 아가레스의 술잔은 반쯤 차 있었다.
주도라는 게 지역마다 다른 법인데, 하물며 소설 속 세상과 현실의 차이였다. 구태여 원샷을 해낼 필요는 없었던 모양.
“술을 좋아하나 보군.”
아가레스는 내 잔이 빈 걸 확인하더니 다시금 술병을 쥐었다.
나는 잔을 쥐고 살짝 기울여 그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아카데미에 온 이후로는 처음입니다.”
“그래, 그래 보이네.”
그는 슬쩍 술잔을 내 쪽을 향해 내밀었다.
술을 따르라는 제스쳐 같았는데, 잠깐이나마 고민했다. 술잔이 비기 전에 술을 더 따르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말이 있기도 했고, 또 빨리 좀 마시라고 재촉하는 듯해 꺼려졌으나 끝에는 아가레스의 잔을 채웠다.
“잔 들게나.”
“예.”
우리는 또 술을 들이켰는데, 알코울이 벅차 술을 홀짝이는 척만 하고 잔을 내려놓았다.
아가레스는 맹물을 마신듯한 얼굴로 날 보더니 말했다.
“자네는 재밌군. 신기해.”
“뭐가 말입니까?”
금세 도는 술기운에 억지로 정신을 붙잡으며 대답하자 아가레스가 웃었다.
“꼴을 보아하니 말을 해줘도 못 알아듣겠군. 괜히 기력을 낭비하기는 싫으니 다음에 말해주겠네. 다음에는 자네도 마실 수 있는 물건으로 내가 준비하지. 오늘은 이만 돌아가게나.”
내가 빨리 취한 탓일까?
술자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이 났다. 그래도 다행인 건 축객령을 내리는 아가레스가 나를 못마땅해하는 건 아닌 듯했다.
오히려 뭐가 재밌는지 히죽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집에 가서 푹 자자.
“아, 맞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발온석을 꺼냈다. 이걸 준다는 걸 깜빠하고 있었네.
“그건 또 뭔가?”
“발온석이라고 하는 겁니다. 열을 내죠.”
“내게 주는 건가?”
“예, 선물입니다.”
아가레스는 돌을 엄지로 문지르더니 피식하고 웃었다.
“그래, 고맙네. 잘 가게나.”
* * *
아가레스 잉그레드는 빈 술잔을 스스로 채웠다. 그는 술을 홀짝이며 직전의 술자리를 회상했다.
‘흑마법사의 손에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다지?’
라파엘은 방탕하게 술을 즐긴다는 소문과는 다르게 음주에 미숙했다.
그러나 그가 웃어댄 건 그와는 별개였다.
라파엘이 따른 주도.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이와 술자리를 하는 데 익숙한 분위기였다. 그가 백작위의 귀족이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술을 따르는 방법이나 마시는 동작, 그 모든 게 이상했다.
주도에 미숙해 어색한 게 아니라 마치 다른 나라에서 온 것만 같았다.
‘그래, 마족 놈들이 술을 그리 따랐었지.’
마족 중 위계질서가 특히나 엄하고 냉정한 족속들이 있었다.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사람 간에 서열을 따졌고, 작은 풍습에서도 서로 간의 우열을 중시했다.
예를 들면 술자리에서 잔을 부딪칠 때 하급자는 상급자보다 잔을 높이 들지 않는다, 따위가 있었다.
마족끼리도 문화가 달라 이런 주도가 있는 종족은 소수였다.
라파엘은 이를 어떻게 알았을까? 책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닌데.
‘코로망이라고 했던가?’
아이작 가문의 하녀장은 수완가로 나름 이름을 떨쳤다.
꼼꼼하다는 하녀장이 교육을 도왔다는데, 설령 안 가르쳤을망정 잘못 가르쳤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라파엘은 대체 그런 주도는 어디서 배웠다는 말인가.
“재밌군.”
아가레스는 혈색 하나 바뀌지 않은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밤이라 하기에는 이른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