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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35화 (35/125)

제35화

비싼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몸이 튼튼한 건지 숙취 없이 개운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술 먹고 자면 깊은 수면에 빠지지 못하는 법이었는데, 컨디션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2시.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든 탓에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팔다리를 움직여보니 몸은 가벼웠고, 눈은 말똥말똥했다.

훈련장에 내려가 검을 휘둘렀고, 철덩이를 들어 올렸다. 검술 실력이 발전한 것과 별개로 근력 자체가 전보다 확연히 강해졌다.

몇몇 기사들은 육체를 단련하는 걸 소홀히 하고 마나에만 몰두하기도 했다.

내가 볼 때 그건 바보짓이었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뭐든지 열심히 해야 했다.

“흐읍.”

산소를 한 차례 크게 들이마신 다음에 복압을 준 다음 철덩이를 들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지금 드는 무게를 1번 겨우 들어 올렸는데, 이제는 17번을 들 수 있었다. 그렇게 약 2시간 웨이트를 한 다음 잠시 숨을 골랐다.

그 후 바로 연병장으로 나가 트랙을 몇 바퀴 돌았다. 폐활량보다도 몸의 근육에 먼저 부하가 왔다.

웨이트를 고강도로 한 탓이었다.

무릎을 들고, 팔을 흔드는데 근육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를 참고, 폐가 터질 때까지 트랙을 뛰었다.

땀에 젖은 채로 기숙사로 돌아와 씻고 세탁된 옷으로 갈아입고 시계를 확인하니 6시.

막 식당이 열렸을 시각이었다.

식당에 내려가 간단히 아침을 먹었고, 마탑의 훈련장에 들어가 마법을 연습했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화염탄을 쏘아낼 수 있었다. 장족의 발전, 일취월장이었지만 만족하지 않고 감각을 유지하려 복습했다.

“어후. 힘드네.”

어제 아가레스와 술을 마신답시고 하루 치 훈련을 빼먹었다.

이를 만회하고자 새벽 댓바람부터 몸을 굴렸는데, 이제는 아카데미의 정규 수업을 들어야 했다. 오늘은 교양으로 ‘루인제국 천년 역사의 이해’가 있는 날이었다.

귀족이다 보니 좋은 성적이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기본은 해야 했다.

명목상 난 비숏을 따라 아카데미에 들어온 게 아니라 뭔가를 배우고 익히러 왔다. 최소한의 성적은 맞춰야지. 적당히 수업에 귀를 열었고, 적당히 암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피곤해 보이시네요. 어제 아가레스님과 술자리를 가지셨다면서요? 늦게까지 드셨나 봐요? 숙취가 남으신 건가요?”

옆자리에 앉은 나비에가 두 눈은 책에 고정한 채 나지막하니 말했다.

애는 귀가 참 밝기도 하네.

별의별 일을 다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어딘가 꺼림칙하기도 했다.

휴대폰이 있는 세상도 아닌데, 그런 건 다 어디서 주워듣는다는 말인가?

혹 누군가가 나와 아가레스와 술병을 들고 움직이는 걸 봤다고 해도 그걸 어떻게 알려 준단 말인가?

고작 그거 하나 보고하자고 졸래졸래 나비에한테 찾아갔을 리도 없는 일인데, 애는 모르는 게 없었다.

“너는 그걸 또 어떻게 아는 거야?”

“말씀드렸지 않나요? 저는 발이 넓다고요. 그래서 북부의 공작님과는 무슨 대화를 나누셨을까요? 저 궁금한데.”

“별말 안 했어.”

“입이 무거우시네요.”

“별말 안 했다니까.”

“네, 뭐. 그러셨겠죠.”

그러고 보니 애한테 물어볼 게 있었다.

“너는? 그때 황태자님이랑 어떻게 됐는데? 나 떠나고 무슨 이야기 했어?”

“저도 별거 없었네요. 라파엘님처럼요.”

“네가 그렇게 나오면 안 되지. 우린 한배를 탔는데.”

나비에는 장난이었다며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정말 별거 없기는 해요. 그냥 안부 인사를 조금 나누다 헤어졌으니까요. 그게 다예요.”

“별거 아니긴. 황태자님이 누구한테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 아닌데. 그거면 충분히 잘 된 거지.”

“흐흐, 그렇긴 하죠.”

나는 나비에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었는데, 그때 마침 교수의 입에서 ‘시험’이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나비에는 하던 말도 멈춘 채 교수의 말을 경청하며 펜을 움직였다.

“킥.”

그게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낯설어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자 나비에는 잠깐 눈동자만 돌려 보더니 다시금 필기했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하자고.”

* * *

비숏은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혹은 피난이라도 가는 듯 폭발적으로 움직였다.

사람이 어떻게 그리 에너지가 넘칠 수 있는지 놀랄 지경.

지난번에 만나고 헤어진 지 며칠이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성과가 생겼다며 나를 호출했다. 각자 일과를 마치고, 알아서 저녁 식사를 한 후에 연금술 동아리방에서 만났다.

“오셨습니까?”

비숏은 퓨어문 가문에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녀에게 딸린 하녀가 없다는 의미였는데, 그게 여실히 티가 났다.

그간 연금술에만 불타올랐는지 여러모로 초췌했다. 그녀는 피로한지 다크서클이 짙고 움푹 파인 두 눈을 꾹 누르며 날 맞이했다.

“반가워.”

“예 저도 반갑습니다. 그리고 치료제를 완성했습니다.”

그녀는 책상 위에 떡하니 포션 병을 올려두었다.

몹시 자랑스럽다는 기색이라 박수하며 평소보다 빠른 어조로 말했다.

“대단한걸? 이렇게 빨리 만들 줄은 몰랐어. 어떻게 한 거야?”

“지원해주신 덕분입니다.”

나는 비숏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감탄하는 척 포션 병을 잡고 유심히 보았다.

“이야, 대단한데.”

의도적으로 과장하며 비숏을 추켜세우기는 했어도 반쯤 진심이었다. 이렇게 빨리해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 가지 걸리는 건 포션의 색깔이었다. 그게 어색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원작에서는 푸른색이라 했는데?

아마 치료제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다른 탓인 듯했다.

내 눈앞에 있는 비숏이 공부한 것과 경험이 원작에서의 비숏과 차이가 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보십시오.”

비숏은 실험용 쥐를 가져오더니 푸른 액체를 쏟아부었다. 발광하는 모양새와 푸른 꽃잎이 있는 걸 보아하니 마나와 관련된 포션인 듯했다.

쥐는 포션을 맞더니 눈이 파랗게 물들었고, 털의 색이 전체적으로 푸른색을 띠었다.

“물망화와 다른 시약을 배합한 것입니다. 이리 하면 인위적으로 짐승한테도 엘제닉 병에 걸린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거죠.”

“아아.”

“여기에 치료제를 먹여보겠습니다.”

비숏은 장갑을 낀 손으로 쥐의 입을 벌렸고, 깔때기를 통해 치료제를 부었다. 그러자 쥐의 눈과 털 색깔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치료제의 효과는 간단합니다. 복용자의 몸속에 있는 마나를 녹이고, 마나를 생산할 수 없는 체질로 바꾸는 거죠.”

“응? 그런 게 가능하다고?”

내 반문에 비숏은 눈을 깜빡이더니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이미 몸속에 많은 마나를 모았다면 거부 반응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엘제닉병 환자들을 대상으로라면 괜찮을 겁니다. 그들은 몸에 마나를 쌓을 수가 없으니.”

“영영 마나를 못 쓰는 몸이 되는 거잖아. 그걸 싫어할 환자들이 있지 않을까?”

“마법사들같이 마나를 다루는 능력이 생계와 밀접한 경우에야 거부하겠지만, 엘제닉 병을 앓는 사람 중에 마법사가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이거면 된 듯합니다.”

치료제의 원재료가 다른 탓인지 효능마저도 바뀌었다.

원작에서는 깔끔하고 편리하게 그냥 병 자체를 고쳐주었다.

이렇게 병의 치료 원리 따위는 등장하지도 않았다. 하물며 몸속에 마나를 녹여버리다니, 방식이 과격했다.

“그래, 그러면 임상은 어떻게 할래? 지원자에 대한 보상은?”

“부작용이 발생할 경우에는 가능한 제가 책임을 지고 싶습니다.”

“돈으로 해결되는 부분은 내가 도와줄게.”

이건 비숏이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비숏은 마지못해 수긍했다.

“감사합니다.”

“부작용이 발생했을 때에 보상은 그렇게 한다고 치고, 그러면 보상은?”

“무조건적인 사례는 지양하고 싶기도 합니다. 병을 앓는 사람 중에 금전만을 목적으로 임상시험에 지원하는 환자는 피해야 하니까요.”

“그래, 그렇게 하자.”

치료제가 원작의 것과 달라졌다. 사실 이 정도쯤이야 넘어가도 무방했다.

치료제의 효력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 별일 없을 터다. 하지만 달라진 전개 때문에 피해를 볼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막연히 병이 낫는다면 마법을 배워야지 생각하던 환자들.

내가 그들까지 배려해줄 여유가 있지는 않았으나 찜찜한 부분이 있었다.

원작에서도 비숏은 엘제닉 병의 치료제를 만들었었다.

왜? 단순히 그럴 능력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었다.

그녀는 반드시 치료제를 개발해야 한다는 사명감 아래에서 움직였다. 왜 그랬을까?

노엘.

그녀는 나중에 비숏이 사귈 친구였다.

노엘은 제 어머니의 병을 유전으로 이었다. 노엘은 엘제닉 병을 앓았다. 이에 슬퍼한 비숏이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는 에피소드였는데, 노엘은 그런 말을 했었다.

-병이 낫는다면 꼭 마법을 배우고 싶어.

치료제가 이대로 출시된다면 노엘은 꿈을 이루지 못할 터였다.

냉정하게 본다면 내가 고려할 사항은 아니긴 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배려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비숏에게도 노엘과의 관계는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우정이었다.

이대로 치료제를 내도 괜찮은 게 아닐까?

비숏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그녀가 어느 남주 캐릭터와 이어지면 나는 죽는다.

이에 나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고 있었다.

면식도 없는 누군가의 꿈을 위해서,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은 비숏의 우정을 위해 험한 길을 가는 건 사양이었다.

비숏은 드물게 미소를 짓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부모가 자식을 보듯 애뜻한 눈빛으로 치료제를 보고 쓰다듬었다.

“아직 남은 일이 많지만, 치료제의 개발은 끝났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니 개운하네요.”

“응. 그간 고생 많았어.”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아직 남은 일들이 많으니 좀 더 힘내야죠.”

“그러면 임상 공고는 바로 내도록 할게.”

대게 신약에 대한 임상 공고에는 거쳐야 할 과정이 많았는데, 길버트에게 부탁하니 일사천리였다.

공고를 통해 임상시험에 지원자를 모집했다. 시험에 대한 사례금은 없다시피 했고,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음을 공지했다.

그 때문인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지원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사례금이라는 게 꼭 나쁜 건 아니잖아.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게 아닐까?”

“예, 저도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꺼려지는 건 어쩔 수가 없군요.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보면 안 되겠습니까?”

“나야 너만 괜찮다면 상관없지.”

나와 비숏은 공고를 수정해야 하나 고민했고, 갈등했다. 그러던 때였다. 지원자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이 약의 개발자이신가요? 와, 저는 나이 많으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상상했는데, 엄청 젊으시네요? 젊은 나이에 치료제도 개발하시고 정말 대단하신 거 같아요.”

광대뼈가 푹 튀어나왔고, 동공이 다 보일 듯 큼지막한 두 눈은 움푹 들어갔다. 주홍색 머리카락은 큐티클이 상해 꼭 빗자루 같았다.

임상시험의 지원자는 거미처럼 얇은 팔과 다리를 장난감 병정 같이 휘두르며 입장했다.

지원자의 이름은 노엘.

마법사를 꿈꾸는 그녀가 직접 시험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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