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나는 노엘이 5살 때 겪은 일을 알고 있었다.
노엘이 거주한 마을에 자신을 마법사라 속인 사기꾼이 들어와 공연을 펼쳤다. 그는 아티팩트가 아니라 화약을 이용한 도구를 사용해 불꽃을 만들었다.
고작해야 손바닥만 한 크기의 불꽃이 노엘을 홀렸다. 그녀는 그날부터 마법사가 되고 싶다고 바랐다. 그 바람은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그런데 치료제의 임상시험에 지원하다니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치료제를 복용하게 되면 영영 마법을 쓸 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물론 엘제닉 병은 환자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불치병이었다.
어차피 병을 달고 있으면 마법사가 되기란 불가했고, 결국에는 죽을 운명이니 치료제를 복용한다고 손해 볼 건 없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그러했다.
그러나 내가 노엘이었다면 결코 임상시험에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치료제가 막 완성된 참이었다.
시간이 지난다면 새로운 작용 방식의 치료제가 등장할 수도 있었고, 앞일이란 모르는 법이니 확정적으로 마법을 못 쓰는 선택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치료제를 복용하게 되면 몸속에 마나홀에 장애가 생기는 걸 알고 있습니까?”
노엘은 당차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공고문은 꼼꼼하게 글자 하나 안 놓치고 읽고 지원했습니다! 그 정도야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마나홀에 장애가 생기면 마나를 다루는 분야는 학습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마법 같은 걸 사용할 수는 없겠죠. 괜찮습니까?”
“그 정도야 알고 있습니다. 공고문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노엘은 아쉽다는 양 제 무릎을 탁탁 치더니 말했다.
“저도 마법에 흥미가 있기는 하고 배울 수 있으면 배우고도 싶고, 쓸 수 있으면 더 좋을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안 되잖습니까. 사람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지원자를 만난 다음 나머지 파트는 전문가인 비숏에게 맡겼다.
노엘이 시험에 적합한지 활력 징후 따위를 측정했고, 몇 가지 검사를 시행했다.
결과는 원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노엘이 시험에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치료제 바로 먹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저 마셔도 되겠습니까?”
성량은 뱃심에서 나온다는 게 낭설이었다는 건가?
목청 좋은 가수들 보면 풍채가 좋길래 그게 사실인 줄로만 알았는데, 노엘을 보고 있으니 그게 틀린 정보란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허수아비처럼 마른 몸에서 퍽 큰 소리가 나왔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난 노엘을 말린 다음, 그녀의 상대를 비숏에게 맡기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 * *
저녁에는 아가레스와 술 약속이 있었다. 아가레스가 나도 가볍게 마실만 물건을 구해놨다며 오늘 저녁 시간을 빼놓으라 했다.
이에 며칠 전에 이곳의 음주 문화와 관련된 책을 몇 권 읽어 주도를 암기해놨다.
일단 그날 실수를 몇 가지 했으나 크게 문제 될 거 같지는 않았다.
잘못된 짓을 한 게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 거였으니 아가레스도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날 아가레스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으니 넘어가도 괜찮을 듯했다.
술을 마시기로 한 약속 시각은 오후 8시. 아직 3시간가량 여유가 있었다.
남은 3시간 동안 훈련을 한 뒤에 아가레스를 만나기로 계획했다. 그러면 음주 탓에 훈련을 빼먹을 이유가 사라졌다. 시간이 짧으니 최대한 알차게 쓴다.
우선 웨이트의 방법을 바꾸었다. 슈퍼세트를 이용해 휴식을 줄여 빠르게 전신을 혹사했다. 그다음 검을 휘둘렀다. 마지막으로 유산소를 하려던 때였다.
몸에서 땀을 빨빨 흘린 채였는데, 연병장에서 비숏과 마주쳤다.
그녀는 허겁지겁 뛰어왔는지 이마에는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였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깐 다음 정말 미안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왜? 왜 그래? 무슨 문제인데?”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러면 왜?”
비숏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뛰어와서 찬 숨을 천천히 고르더니 말했다.
“이번에 만든 엘제닉병의 치료제를 폐기해도 되겠습니까?”
“왜?”
비숏은 망설이다가 겨우 말을 토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동작하는 치료제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녀는 잠자코 내 대답을 기다렸다. 혹시라도 내가 왜 그런 수고를 들이냐 따질까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이유를 묻지 않기로 했다.
그야 구태여 귀로 듣지 않아도 알 법했다.
노엘이 제 원래 꿈이 마법사였다는 걸 말한 거겠지.
“그래, 그렇게 하자.”
나는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비숏이 혹시라도 내가 제안을 거부하지 않을까 염려한 건 치료제를 만드는 데 들어간 비용 탓일 거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 보면 그건 푼돈에 불과했다. 그까짓 거 버려도 괜찮았다.
비숏은 감았던 눈을 떴다.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감사합니다.”
여기서 이 화재로 떠들고 있으면 괜히 생색을 내는 거 같아 바로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그럼 시험 대상자에게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새로 치료제를 만들 테니까 집에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할까?”
“아뇨, 제가 대화해보니 한동안은 이 근처에서 머물겠다고 합니다.”
“근교에?”
“예, 숙박비는 충분하다고 합니다.”
“그래, 알았어.”
내가 순순히 넘어간 게 뜻밖이었는지 비숏은 멀뚱멀뚱 나를 쳐다봤다.
서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 뻘쭘했는데, 분위기를 깨트리고자 말했다.
“그러면 나 훈련하러 간다? 너도 고생해.”
비숏은 그 자리에 잠시간 더 서 있다가 어딘가로 떠났다.
* * *
“이건 벌꿀주라는 걸세. 자네가 가져왔던 물건처럼 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나름 내 고향에 명물이지.”
나는 아가레스가 따라준 술을 홀짝이며 마셨다.
꼴깍꼴깍.
꿀이 들어간 술이라길래 달달한 맛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꽤 독했다.
술의 도수만 따진다면 그리 높진 않은 듯했는데, 따로 향을 첨가하지 않아 더 그렇게 느꼈다.
“맛이 어떤가?”
“살짝 시큼하네요.”
아가레스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도 나를 따라 술을 마시더니 잔에다 대고 코를 킁킁거렸다. 그는 술의 냄새를 들이킨 다음 어깨를 으쓱거렸다.
“꿀 냄새를 풍기거나 단맛이 나는 것들이 있는데 그걸 가져올 걸 그랬나 보군. 실수였어.”
“아뇨, 괜찮습니다. 시큼한 걸 싫어한다는 게 아니어서.”
삐졌나?
만에 하나라도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까 눈치를 살폈다. 괜히 속이 조마조마하다. 눈앞에 아가레스를 두고 술을 마신다는 것만으로도 불편했다. 노심초사하며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하며 대해야 할 상대였는데, 술을 마시면 몸을 제어하기 어렵다.
난 정신을 바짝 차리며 천천히 술잔을 비웠다.
우리는 간단하게 술을 한 잔씩 마셨는데, 그러고 있으니 아가레스가 제 왼쪽 손을 손바닥이 보이게 피더니 톡톡 두들겼다.
“여기를 찔렀던 걸 기억하나?”
“그, 죄송합니다. 많이 아프셨죠? 제가 살살 찔렀어야 하는 건데.”
“그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야. 자네가 생각보다 강했다는 거지.”
“제가 말입니까?”
“그래. 꽤 놀랐네. 그럴 게, 사실 검술학부에서 수석을 했다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어중이떠중이들도 들 수 있는 트로피지.”
그의 말을 반박하려다 말았다.
꼭 내가 아니라도 제프린이라고 제법 괜찮은 놈이 있다고 말해 주려 했는데, 괜한 소리인 듯했다.
그러자 갑작스레 아가레스가 내 어깨를 두들기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하네. 자네 학부를 무시하려던 건 아니었어.”
“예? 어 상관없기는 합니다? 맘껏 무시하셔도 괜찮은데.”
아가레스는 내 말을 자연스레 무시하더니 다시금 말했다.
“그때 내가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나? 자네가 디마겐이라는 흑마법사보다 내 영지에 도움이 될 듯하다면 자네에게 협조해주겠다고 말했었는데.”
“예, 그러셨습니다.”
“이미 그 마법사 놈이 디마겐을 잡으러 떠났으니 그때 약속은 지키지 못할 듯해. 대신에 이렇게 하면은 어떻겠나? 난 이번 여름에 다시금 한 차례 마수를 토벌할 거네. 그때 자네가 날 도와준다면, 마법사 놈이 내게 벼락을 떨궜던 건 묵과하지.”
여름이라면 아마 아카데미가 방학했을 때를 의미할 터였다.
마수 토벌이야 정기적으로 했던 일이니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듯하니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무조건 수락해야 할 제안이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이것이었다.
“이안을 용서해주신다는 겁니까?”
아가레스는 이안을 굉장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했는데, 이리 순순히 감정을 풀어준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아가레스는 이에 답했다.
“하하하, 그걸 어떻게 용서하겠나? 벼락이 오죽 따끔했어야 말이지. 내 말뜻은 그게 아니네. 내가 그를 벌해야 하는 건, 내 체면 때문인 게 제일 컸네. 내 개인적인 원한이야 부가적인 거지.”
“예.”
“내가 그 마법사 놈을 고깝게 보는 거야 어쩔 수가 없겠지만, 자네를 믿어주겠네.”
“이안이 대공님께 벼락을 떨구었다는 걸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는 거 말입니까?”
“그래. 그때 일은 묻어두는 거로 해두지.”
이득이다.
토벌을 도운다고 해봤자 내 역할은 뻔했다. 아가레스가 흘리는 자잘한 마물 몇 마리를 잡고 거들면 되겠지.
일단은 나도 한 가문의 영주였으니 북부를 방문한다고 치면 손님 대접을 해줄 터였다. 용병처럼 막 굴리지는 않을 거다.
아가레스가 왜 이런 의견을 발의했을까? 나만 좋을 일인데.
전후의 일을 고려해서 생각해보니 아마도 지난번에 선물이 잘 먹혀든 듯했다. 술이랑 돌덩이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이번 제안은 그 보답이라고 여기는 게 맞았다.
“좋습니다. 그리하죠.”
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가레스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는 황당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리 순순히 승낙해도 괜찮겠나? 내가 무슨 일을 시킬 줄 알고?”
“무리한 걸 요구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
“거 참 무리한 믿음이군. 뭐 좋네. 그러면 거래는 성사된 거야. 나는 마법사 놈이 내게 벼락을 떨궜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그 일에 침묵하고, 자네는 여름에 마물 토벌을 돕는 걸세.”
“예, 좋습니다.”
“구두 약속으로도 괜찮나? 계약서라도 작성할까?”
“에이, 그러실 거 없습니다. 서로 믿지 않습니까?”
“알겠네. 잔 들지.”
전에 술을 마신 거에 간이 적응했는지 꽤 오래 술을 마셨는데도 취기가 돌지 않았다. 아가레스는 정말 술을 물처럼 마셨는데 눈빛 하나 바뀌지 않은 걸 보면 지난번 드래곤오우거 보다도 도수가 낮은 듯했다. 나는 아가레스의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런데 말이야, 무슨 일인가?”
“예?”
“오늘은 상표를 가리지 않아서 말일세.”
취한 건 아니었지만, 알코올이 들어가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가지는 못했다.
이걸 왜 물어보는 거지? 술병의 어디를 잡았건 우연일 수도 있는 일인데.
무언가 목적이 있는 질문이었다. 문제는 그 목적이 뭔지 도통 모르겠다는 거고.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서두르지 않겠네. 여름이 되며 알 수 있을 테니.”
아가레스는 술을 홀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