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는 까닭에 잠잘 때 빼고는 기숙사에 있는 일이 없다시피 했다.
주로 마탑에서 마법을 연습하거나 연무장에서 체력 훈련을 하고, 카타리나에게 검술 교정을 받으며 대부분에 시간을 쓰고 있었다.
나를 찾아올 사람이 없기도 했고, 혹 있다고 해도 아카데미 학생이라면 수업 시간에 맞춰 찾아오면 되니 여태껏 문제가 생겼던 적은 없었다.
금일은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모두 받은 후 마탑에서 마법을 연습했는데, 막히는 부분이 있어 평소보다 늦게까지 마법을 시전했다.
그다음 검술학부의 단련장을 들렸고, 연병장을 다녀왔다.
기숙사에 복귀한 건 약 밤 10시. 아카데미의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자그마치 6시간이 지나서였다.
누군가 내 방 앞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그녀는 발걸음 소리에 화들짝 놀라더니 머리를 치켜들었다.
노엘이었다. 그녀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코입을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엘은 이마가 무릎에 닿을 듯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접은 허리를 서서히 일으키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게 비숏 양이 저한테 꿈이 뭐였냐고 묻길래 마법사라고 말한 거뿐이었는데. 그게 제가 거짓말을 안 하는 성격이라 ···. 죄송합니다.”
어젯밤 비숏은 나를 찾아와서 치료제를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에 많은 시간과 수고, 비용이 들어갈 예정이었다. 노엘도 이를 인지하고, 비용의 상당 부분을 댈 내게 사과하러 온 듯했다.
그럴 거까지야.
“아뇨, 괜찮습니다. 그녀가 선택한 일인데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게, 진짜 죄송해서···. 사실 저 마법 못 써도 괜찮거든요. 아니, 쓸 수 있으면 좋을 거 같기는 한데, 막 남한테 민폐 끼치면서 그렇게 고집부릴 일은 아니잖아요. 제가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이 아닌데.”
“…….”
“정말 죄송해서. 비숏 양한테도 제가 몇 번이고 괜찮다고 했는데···. 정말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하신 거 알겠으니 그만하셔도 됩니다. 마음이야 잘 알겠으니까.”
“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머리를 푹 숙였다.
나를 만나러 오기까지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지 잠긴 목소리로 주절주절 미안하다고 반복하는데, 괜히 내가 다 미안했다.
내가 그녀에게 괜찮다고 말한 건 그녀를 달래주려 빈말을 하거나 가식을 부리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오히려 비숏이 연금술에만 더욱 몰두할 계기가 될 테니 반기는 쪽이었다.
비숏은 걸어 다니는 폭탄 같은 존재였다. 그녀 자체로만 따로 놓고 보면 안전하지만, 어쩌다 황태자라도 마주친다거나 아가레스와 친분을 쌓을 수도 있는 일.
그녀가 연금술에만 시간을 투자하는 건 나로서는 좋았다.
노엘은 검지로 제 이마를 긁적거리더니 다시금 말했다.
“저도 일을 이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게 말이죠? 생각해보면 그렇잖아요. 엘제닉 병을 앓는 사람 중에 마법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어쩌면 이 세상에 저 하나뿐일지도 몰라요.”
“그래서요?”
“아깝고 너무 죄송해서요. 저도 바보가 아니라서 약을 새로 개발하는 게 얼마나 힘들지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저 하나 때문에 약을 새로 만드는 거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괜찮으니까 돌아가세요.”
일부러 귀찮다는 기색을 내비치니 노엘은 억지로 웃더니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정말 감사한데, 그… 괜찮으실 리가 없으시잖아요? 어떻게 비숏 양을 말려주실 수는 없으실까요?”
“알았습니다. 다시 말을 해볼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죠.”
노엘은 내 대답을 듣고서야 겨우 고개를 주억거렸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혹시 나중에라도 만약에 저한테 화를 내고 싶으시면 제가 머무는 여관이 저쪽 뒤편에 있거든요? 거기서 저를 찾으시면 될 거예요.”
“알았습니다, 할 말 생기면 제가 찾아가죠. 그때 봐요.”
“네! 그때 뵙겠습니다! 이번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 * *
지난번에 말했던 황태홀, 황태자 홀리기 작전에 나설 때였다.
나비에를 황태자와 이어주기 위한 계획을 짜기 위해 우리는 근처 카페에 뭉쳤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음료와 간식거리를 주문했는데, 메뉴는 각자 골랐다. 나는 늘 먹던 조각 케이크를 시켰는데, 그걸 본 나비에가 툭 내뱉었다.
“단 음식을 좋아하시나 봐요?”
“왜? 이거 자주 먹어서?”
“네. 항상 그거만 드시잖아요.”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했다.
여기 케이크가 꽤 훌륭했다. 제빵에 대해 아는 게 없지만, 적어도 내 입속에 들어오는 빵이 몹시 부드럽고 크림이 달콤하다는 거쯤이야 느낄 수 있었다.
그 탓에 이곳 카페에 와서는 항상 이 케이크만 먹었었다. 현대에 있을 때는 단 음식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곳에 떨어진 이후 입맛이 변했다.
아직도 가끔은 두부와 볶은 김치를 같이 먹고 싶다거나 사골곰탕에 오징어젓갈이 떠오르긴 했으나 혀가 이곳 음식에 길들어졌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달달한 거에 손이 갔다.
이게 왜 그런 건가 하고 보니 이곳에서는 마음껏 즐길 거리가 없었다.
전자기기는 없다시피 했고,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보니 여가에 쓸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투자한 시간 대비에 만족감이 높은 걸 찾다 보니 그게 먹을 거였다.
매일 같이 맛난 음식을 찾는 건 아니라도 이따금 기회가 있으면 즐겼다.
“맛이 좋네.”
내 대답에 나비에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진짜 맛있는 케이크를 안 드셔 보셔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저희 영지에 정말 훌륭한 곳이 있는데, 나중에 시간이 괜찮으시면 놀러 오세요.”
“그래, 꼭 한번 먹어보고 싶네.”
나비에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치더니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광대를 향해 돌진하고 있던 입꼬리가 내려가고, 휘어져 있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뭘 할까요?”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턱을 까딱거렸다.
무도회에서 책을 읽어 황태자의 관심을 끈다는 계책은 통쾌하게 들어맞았다. 그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나?
새로움이었다.
뺨을 때리는 것은 죽은 클리셰지만, 그 존재 의의만은 지금도 남아 있었다.
새롭고 신선할 것. 남들은 가지 않은 길을 걸을 것.
나비에는 언제까지나 황태자에게 새로운 존재로 남아야만 했다. 보통의 영애들과는 다르다는 걸 강조해야만 했다.
“황태자가 지금 네게 가지고 있을 편견을 깨는 거로 가자.”
“편견이요?”
“아, 편견이라는 단어가 어감이 좀 별로였나? 그러면 선입견이라고 생각해보자. 너는 무도회에서 책을 읽었어. 황태자님은 네가 왜 그랬을 거로 생각할까?”
“음···. 자기 관심을 끌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그건 우리 생각이지. 아마 황태자님은 네가 무도회 같은 자리에서도 책을 읽을 정도로 학문에 열심인 거라 여기겠지. 여기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자.”
“어떻게요?”
“너 펜싱은 좀 해?”
귀족이라면 승마와 더불어 교양 같은 느낌으로 한 번쯤은 배우는 스포츠였고, 아카데미 안에서도 꽤 인기가 있어 즐기는 이들이 몇 있었다.
“잘하지는 못해요. 운동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그래? 그러면 이번에 배워야겠네. 펜싱을 배워서 아카데미 내부 대회라도 나가보자. 우승하면 더 좋고.”
“예?”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걸 알았다.
지금 나비에한테는 제대로 된 경기 1세트를 뛸 체력이 있을지도 미지수인데,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연습하고 훈련해서 아카데미 대회에 나가 우승하라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끽해야 학부생끼리의 대회였고, 마나 사용자가 아닌 이들을 위한 대회가 따로 있으니 경쟁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어도 꾸준히 취미로 즐겨온 이들과의 수준 차이는 확연했다.
그럼에도 이를 권한 건 마땅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
“싫으면 네가 다른 의견을 내봐. 내 머리로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이거뿐이니까.”
“하지만···. 이건 진짜 아닌 거 같아서요.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운동 쪽과는 정말 거리가 멀어요.”
“그래, 나도 알아.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네가 우승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러면 왜?”
“네 마음가짐이 그래야 한다는 소리야.”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이유로 스포츠를 즐긴다.
누군가는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게 좋아서.
누군가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한 수단으로.
누군가는 자신이 정한 종목이 유달리 즐거워서.
아카데미에서 펜싱을 즐기는 영애들 대부분이 이에 속할 거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오로지 그 스포츠를 잘하기 위해서, 남들과 경쟁해 승리하는 걸 목적으로 피땀을 흘리기도 했다. 나비에는 여기에 속해야 했다.
“아마 네가 경기를 뛴다고 하면 황태자님이 보러 올 거야.”
“예? 아닐 거 같은데요? 그 정도로 친한 건 아니라서.”
“친하지 않더라도 무지막지 궁금할 테니까. 어? 그때 걔 책이나 보는 애 아니었어? 테니스 대회를 나간다고? 무슨 일이지? 막 이런 생각이 들 테니까.”
“아.”
포크로 케이크를 조각내고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고, 음료를 마셨다.
몸서리를 칠만큼 단맛을 음료가 씻어주니 개운한 감이 있었다.
“내 말뜻은 대회에 출전한 네 의지가 중요하다는 거야. 경기에서 점수를 빼앗겼는데, 웃는다? 이런 건 절대 안 된다는 거지. 플러레를 던지고 부수지는 않더라도 네 승부욕을 보여줘야 해.”
나비에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승부욕이요?”
확실히 나비에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여태껏 살면서 남과 경쟁을 해본 적도 몇 없을 거고, 특히나 그게 운동 같은 분야라면 더 그랬을 테니까.
나비에는 승부욕이라는 단어를 몇 번인가 중얼거리더니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한 차례 몸 안에 공기를 다 빼낸 다음 그녀가 말했다.
“좋아요. 해보죠.”
“그러면 지금 바로 가자. 실력 한 번 보게.”
* * *
평소 검술을 익힐 때 사용하던 칼과 내가 쥔 플러레는 쥐는 법부터가 차이 났다. 플러레는 손목이 아니라 손가락을 이용해 움직였는데, 나비에가 내 파지를 보고는 말했다.
“독특하게 쥐시네요? 카타리나 님께 펜싱도 따로 배우셨나요? 마나 사용자들의 펜싱은 좀 다른가 봐요?”
“아니, 그건 아니야.”
모든 스포츠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형되고 발전했다.
현대 펜싱의 경우, 꾸뻬의 비중이 커지며 파지가 다소간 변화하며 특히 손목의 위치가 바뀌었다.
나는 나비에와 마주 보고 섰다.
뭐든지 간에 그 실력을 확인하는 건 붙어보는 게 제일이었다.
나와 나비에는 상대를 향해 인사했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플러레의 방향이 틀렸어.”
“아! 너무 오래간만이라….”
간단하게 검사해본 나비에의 문제점은 이러했다.
경기를 치르는 동안 플러레를 들고 있기도 힘든 근력. 부족한 폐활량과 정식 경기를 소화할 수 없는 근지구력.
부족한 기술까지.
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