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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38화 (38/125)

제38화

침대에서 일어서며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4시.

해 뜨기 전에 어두컴컴한 새벽.

봄이 지나가며 부드러워진 새벽바람을 맞으며 연병장으로 향했다. 그 앞에서는 나비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어요….”

나비에는 졸린지 주먹으로 눈을 비비며 꾸벅거렸다.

굳이 새벽부터 불러내 훈련하고 체력을 키울 필요는 없었다. 운동을 꼭 새벽에 한다고 해서 효율이 더 높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나나 나비에나 서로 시간이 부족했다. 여러모로 바빴고, 규칙적으로 시간을 맞출 수 있는 건 새벽뿐이었다.

“일단 뛰자.”

오늘은 함께 새벽 운동을 하는 첫날이었다.

가볍게 같이 뛰어주며 템포를 맞춰주었는데, 나비에는 연병장을 채 2바퀴 돌기도 전에 숨을 헐떡이며 땀을 물처럼 쏟았다.

“흐억! 흐억!”

이러다 애가 죽을 것만 같아 속도를 줄이며 걸었다.

“배…. 배가 아파요.”

“그렇구나.”

“저, 죽을 거 같아요. 아아.”

“그렇구나.”

“허억. 이거 꼭 이렇게 뛰어야 하는 건가요? 약 같은 거 없어요? 힘 세지고, 뭐 그런 거요.”

“반칙이잖아.”

현대에 스테로이드나 성장호르몬 같은 물건을 구하거나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면 좀 더 편한 길로 갈 수 있겠지.

나비에가 반드시 펜싱 대회에서 우승해야 한다면 그런 수단도 동원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황태자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인상을 남기기만 하면 될 일. 노력으로 해낼 수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면 안 될까요? 내일부터 진짜 열심히 할게요.”

나비에는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이게 엄살을 부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막 운동을 시작했을 때는 근육통이 심하고, 여러모로 가볍게 하는 쪽이 좋기도 했다.

다만, 시간이 부족했다. 펜싱 대회는 앞으로 약 2달 후.

2달 안에 제대로 경기를 치를 수 있을 수준으로 실력을 끌어올려야 했다. 시간이 부족하니 빡세게 굴린다.

얘가 죽을 거 같으면 템포를 늦췄고, 정 안 되면 걸어서라도 뛰기로 한 거리를 완주했다.

그렇게 달리기를 끝낸 다음 가볍게 근력 운동을 맛만 본 다음 경기장에 들어섰다.

어제는 플러레를 직접 겨루며 나비에의 실력이 처참하다고 평했지만, 예상보다 상황은 양호했다.

경기장에서 기본기만을 따로 확인하니 오래전이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한 번 배웠던 티가 났다.

두 번 전진, 두 번 후진, 바닥치기, 점프 전진 등의 기본기를 시험한 후에 과녁을 따로 두어 전진, 찌르기, 후퇴를 10회 반복시키며 채점했다.

부족한 체력에 동작은 굼떴지만, 과녁을 찌르는 것 자체는 정확했다. 플러레의 끝이나 팔꿈치, 발의 각도 등을 보면 자세만큼은 제대로 배웠다.

어제 연습 경기해서 실력이 미흡했던 건 그만큼이나 실전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나는 이를 메꾸고자 나비에를 경기장 위로 불렀다. 준비선에서 자세를 잡았다. 알레를 외쳐줄 심판은 없어 직접 시작을 알렸다.

나는 나비에의 수준에 맞춰 신체 능력을 절제해가며 싸웠다.

굼뜨게 움직이며 느릿하게 찔렀고, 심지어는 뻔히 오는 플러레에도 나비에한테 맞춰 잠깐씩 기다렸다가 반응했다. 그럼에도 너무나 손쉽게 포인트를 따냈다.

나비에는 내가 봐주는데도 허무하게 지는 상황에 낙담했는지 어깨를 떨구었다.

“아무래도 전 재능이 없는가 봐요.”

“그래, 그런 거 같기는 해.”

하지만 신경 쓰이는 건 그게 아니었다.

“너무 포인트를 잃는 데만 신경을 몰두 세우는 거 같아. 그래, 공격권이 없을 때는 그렇다고 쳐. 그런데, 공격권이 있을 때도 소극적이어서는 안 돼.”

“점수를 따려고 최선을 다한 거였어요.”

“아니, 그러면 안 돼.”

“왜죠?”

“보기에 안 좋잖아.”

나비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나비에는 경기 중에 많은 시간을 경고선에 발을 걸쳤다.

플러레에서 득점할 수 있는 부분은 상체의 몸통과 머리뿐이었다. 신체의 말단을 노리는 것은 무의미하니 그렇게 틈을 노리기만 하는 방식은 비효율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취지에 맞지 않았다.

고작 친목이나 다지자고, 땀 흘렸다는 만족감이나 얻자고 대회에 출전하는 게 아니었다. 황후 자리를 위해서였다.

“공격적으로 나가. 네가 얼마나 승리에 절박한지 모두가 알 수 있게. 점수를 따면 리엑션도 크게 크게 하고.”

“음…. 그건 제 인상에 해가 되지 않을까요?”

나비에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얼마나 민감한지, 얼마나 신경을 쏟았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온갖 공을 들여가며 탑을 세웠다. 가벼운 타격에도 무너질 수 있는 탑. 그에 직접 위협을 가하는 일이었다. 그녀가 망설이는 건 이해가 갔다.

“지켜야 할 것과, 포기할 걸 구분해. 네가 해온 모든 게 다 황후가 되기 위해서였잖아.”

나비에는 한 차례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네, 좋아요. 해보죠. 그렇게 할게요.”

* * *

검기라는 게 있다. 마나를 잘 사용해서 검을 덮는 기술인데, 이걸 해내면 검이 몹시 날카로워졌다. 잘만 사용하면 철도 벨 수 있었다. 이 경지에 든 칼잡이를 사람들은 소드 익스퍼트라고 부르곤 했다.

공식적으로 소드 익스퍼트의 다음 단계인 소드 마스터에 오른 사람의 숫자는 둘이었다.

지금 내 검술 스승인 카타리나와 수도에서 백기사단을 이끄는 하오크 단장뿐이었다. 그렇다면 소드 익스퍼트의 숫자는?

이 또한 많지 않았다.

소드 익스퍼트 안에서도 하급, 중급, 상급으로 수준을 나눴는데 하급만 되어도 어느 기사단이라도 입단할 실력이었다.

상급이면 명문 기사단의 단장급이었으니 대단한 수준.

검기를 쓸 수 있다면 소드 익스퍼트.

“후우….”

이안에게 마법을 배우고, 또 홀로 독학하면서 마나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다.

아마 웬만큼 수준 높은 기사가 아니고서야 나 정도로 마나를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없을 거다.

이런 게 가능한 건 그래서였다.

마법을 쓸 때처럼, 마탄을 빚을 때처럼 마나를 몸 밖으로 방출했다.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리는 마나에 힘을 가하며 움직임을 제한했다.

그대로 검에다 가져다 댔고, 밀착시켰다. 마나의 막이 검에 착 달라붙었다.

“흐읍….”

철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찌이이이익!

톱질을 해 나무를 베는 감각으로 검이 철판을 갈랐다.

“하아….”

마탄을 쏠 때보다 몇 배로 필요한 집중력에 머리카락에 맺힌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방금 내가 펼친 검기를 가짜 검기라 부르기로 했다.

기사들이 쓰는 진짜 검기는 몸이 아니라 검을 통해 마나를 방출했다.

그 덕에 더욱 검과 밀착했고, 날카로웠다. 내가 뽑아낸 가짜 검기와는 그 값어치가 달랐다.

“하지만 이거면 뭐 된 거 아닌가….”

내가 가른 철판을 내려다보았다.

표면이 거칠긴 해도 일단 두 쪽으로 잘려있었다. 뭐가 됐건 간에 가르기만 했으면 된 일 아닌가?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 불과했고, 진짜 고수는 어떻게 판단할지 궁금해 카타리나를 찾아갔다. 카타리나는 내가 준비해온 게 있다니 눈썹을 찡그렸다.

“왜? 또 뭔데? 뭘 샀는데?”

“그게 아니라 익혀온 기술이 있습니다. 봐주십시오.”

혼자 있을 때 연습했던 것처럼 마나를 뽑아 검에 감았다.

그런 다음 호주머니에서 아까 전 절반으로 가른 철판을 허공에다 던졌고, 검으로 찔러 꿰뚫었다.

째애앵!

검이 철판을 뚫었다.

“어떻습니까?”

카타리나는 엄지로 아랫입술을 위로 민 다음 치아로 잘근잘근 씹었다. 말없이 눈썹을 몇 번 까딱거리더니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대단하네.”

“아니, 칭찬해달라는 게 아니라 쓸 만한지 싶어서요. 진짜 제대로 된 검기랑 부딪쳤다가 잘못해서 깨질 수도 있으니까 걱정돼서요. 실전에서 쓸 수 있을까요?”

“너, 그거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

“가만히 서서 집중하면 5초 정도 걸리네요.”

“상대가 5초나 기다려주지는 않을 테니 못 쓰겠네. 없는 거보다는 나을 거 같은데, 너무 믿지는 마.”

그러더니 카타리나는 주먹으로 내 팔뚝을 툭툭 쳐댔다.

아프라고 때리는 건 아닌데, 왜 이러는 건가 싶었다.

“것보다 빨리 어디 가서 자랑이나 좀 하고 오자.”

“뭘 자랑합니까?”

“검성, 카타리나의 제자가 근 100년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최연소로 소드 익스퍼트에 올랐다고.”

“예? 이게 제대로 된 검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어차피 하는 꼴을 보아하니 길면 3년, 짧으면 1년 안에 진짜로 검기를 뽑을 수 있을 거야. 미리 자랑질 좀 하는 거지.”

“그걸 해서 얻는 게 뭡니까?”

“명성.”

이곳 기사들에게 명성은 제법 귀중했다. 기사들이 취업할 장소는 뻔하고, 한정적이었는데 꼭 실력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평판이나 명성이 실력만큼이나 비중이 컸다.

암만 실력 있는 기사라 해도 무명이거나 악평이 많으면 명문 기사단에 입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미 큼지막한 영지의 영주였으니 취업 걱정은 사족이고 기우였다.

“그런 거라면 괜찮습니다.”

팍! 팍!

내 팔꿈치를 쳐대는 카타리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평소보다 두 톤은 높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그간 해준 게 얼마인데, 이거 하나 자랑질 못 하게 하는데?”

“스승님은 이미 검성으로 이름을 떨치셨지 않습니까?”

“그거랑 이거랑은 다른 거지. 백사자 기사단 할배가 얼마나 자기는 제자 육성에 공들인다고 유세를 떠는데? 그 할배보다 내가 먼저 걸출한 제자 놈을 뽑아냈다고 세상에 알려야지.”

“그래도 이건 사실이랑 다른데….”

“야, 내가 가르쳐준 거 값어치가 얼마인지 네가 알기나 해? 내가 너 돈 받고 가르쳤냐? 아니면 뭐 선물이라도 뭐 달라고 한 적 있어? 그리고 이게 무조건 거짓말인 것도 아니잖아. 너 검기 쓸 수 있잖아.”

카타리나는 굉장히 고집이 세서 일단 마음을 먹었으면 꼭 하고 말아야지 직성이 풀렸다.

게다가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내게 내린 가르침은 아주 귀한 것이었다. 이렇게 간절히 원하는 걸 보아하니 이번만큼은 져주는 게 좋을 듯했다.

“알았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제야 내 팔뚝을 쳐대는 주먹이 정지했다. 카타리나는 활짝 웃더니 머리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좋았어! 그렇게 나와야지! 아, 그러면 나 이거 자랑하러 간다? 그 가짜 검기 그거 계속 꾸준히 연습해. 실전에서는 쓸 일 없을 테지만, 진짜 검기를 뽑는 거랑 감각이 비슷한 거 같으니까, 그거 계속하면 진짜 검기도 쓸 수 있게 될 거야.”

난 카타리나가 내가 검기를 쓸 수 있다는 걸 자랑한다길래 적당히 자기 지인들한테나 말할 거라 예상했다.

자기 제자가 이제 검기도 쓴다고 자랑질이나 몇 번 하고 말 거라 기대했다. 멍청한 짓이었다.

카타리나가 저지른 만행을 알게 된 건 며칠이 지나서 우연히 신문 기사를 보고서였다.

-초신성탄생!

-검성 카티리나의 제자이자 아이작 가문의 영주, 아이작 라파엘이 근 100년간 최연소의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에 올랐다. 카타리나 공의 말에 따르면, 라파엘은 입학 당시 수석을 차지했으나 다소 부족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지런한 노력과 카타리나 공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한 끝에 소드 익스퍼트에 올랐고….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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