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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41화 (41/125)

제41화

관객들 앞에서 카타리나와 나는 서로를 마주 봤다. 입학시험 때 썼던 그 대련장. 이곳에 다시 서니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는 각자 검을 뽑았고. 상대를 겨눴다.

내가 발전하기는 했나 보네.

전에는 카타리나가 내 쪽으로 검을 뻗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렸는데, 이제는 참을 만했다. 어쩌면 그냥 익숙해진 걸 수도 있고.

어떻게 싸워야 할까. 이걸 싸운다고 할 수는 있을까?

카타리나는 대련이라 칭했지만, 이건 끽해봐야 하나의 연극이었다. 내가 검기를 쓸 수 있다는 걸 더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쇼. 승자도 패자도 없는 무대.

‘적당히 맞춰주자.’

그런 마음가짐으로 검을 마나로 감쌌다. 카타리나와 검을 맞대기 전, 관객들에게 검기를 구경할 시간을 주었다.

-기사가 진짜였군. 진실로 저 어린 나이에 익스퍼트에 올랐어.

-저 검기라는 거 처음 봐요. 반짝반짝하네요.

카타리나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걸 듣더니 피식 웃었다. 그녀가 검을 좌우로 휘적거리더니 검기를 불어넣었다. 칼끝이 푸른빛으로 빛났다.

그녀의 검기와 내 검기, 겉으로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면 맞부딪친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를 시험했다.

째애애애앵!

손아귀가 얼얼했다. 검은 무사했다. 밀리는 감은 있는데, 충격을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싸울 만했다. 싸우는 흉내를 낼 수 있었다. 칼싸움에는 규칙 같은 게 있었다. 검초에 대한 정공법. 서로 이를 지키며 싸우면 아무리 거칠게 칼을 휘둘러도 안전하게 검술을 겨룰 수 있었다. 짜여진 각본대로 연기하는 배우와도 비슷했다.

째앵! 째앵! 째앵!

그렇게 몇 번 검을 부딪치며 뒤로 물러섰다. 카타리나는 잘 짜여진 극을 원했다. 나도 그에 협조하기로 했으니 최선을 다한다. 보기 좋은 칼싸움의 최소 조건은 많은 합이었다. 검을 오랫동안 부딪치며 합을 나눠야 했다.

이를 위해 템포를 조절하려 물러났다.

“야, 너, 뒤진다.”

또 뭐가 불만인 걸까.

카타리나는 쌍심지를 키며 눈을 부릅떴다. 사납게 뜬 눈에서 안광을 뿜어댔다. 가끔 카타리나가 험한 말을 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성난 기색을 보인 적은 없었다.

“제대로 해.”

지금까지는 예고편이었다는 듯 궤가 다른 일격.

카타리나가 수직으로 검을 휘둘렀다. 주변에서 압박해오는 무형의 힘에 다리가 굳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억지로 검을 들어 막아낸다. 째애애애앵! 무거웠다. 충격에 손아귀에서 검이 빠질 것만 같았다.

충돌 이후에도 카타리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무를 베려 톱질하듯 검을 위아래로 긁어댔다. 검이 부러질 위기에 왼발로 카타리나를 걷어찼다. 건물을 발로 민 듯 오히려 내 쪽에서 뒤로 밀려났다.

카타리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억지로 웃었다. 그녀는 칼끝으로 바닥을 찍은 다음 고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진지하게 해.”

“할 수 있는 거, 다 합니까?”

“어.”

“그럼, 합니다.”

파앙!

땅을 박차고 달려가 검을 내찔렀다. 봐주는 거 없이 전력으로 뻗은 검에 카타리나는 히죽 웃었다.

그 웃는 얼굴에 화염구를 쏘았다. 카타리나는 몸을 틀어 피했다. 나는 그녀의 발을 밟았다.

카타리나가 했던 것처럼, 검을 맞대고 밀어붙인다. 내 검기는 강도가 떨어져 오히려 조금씩 썰렸다. 버텼다. 그대로 화염구를 쏘았다. 파앙! 화염구는 카타리나의 복부에 명중했고, 폭발했다.

오러쉴드까지 일으킨 걸 보면 깜짝 놀랐나 보네.

나는 다시금 검을 휘두르며 생각했다.

카타리나는 순순히 내게 발을 밟혔다. 그녀의 초인적인 육체 능력을 고려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단순히 대련을 위해서 힘 조절을 하는 게 아니라 그녀 스스로 제약을 걸었음을 뜻했다.

이를 이용하면 한 방 먹일 수 있다.

내 검술.

카타리나에게 배운 검술. 카타리나에게 익숙할 검술. 내가 검으로 찌르든, 베든 카타리나에게는 뻔했다. 그러니 최소한으로 제한한다. 대신에 마법에 의존한다. 큰 검격으로 거리를 벌리고, 마탄과 화염구를 장전했다.

내 주변에 붉은 구체가 일렁이고. 푸른 탄환이 진동했다.

두둥실 떠오른 마법.

다루기 어려운 화염구를 먼저 직선으로 경로를 지정해 발포했다. 그와 동시에 마탄의 경로를 각각 그리며 카타리나의 발을 묶기 위해 돌진했다. 주문은 카타리나에게 접근하며 완성했다. 마탄이 내 뒤를 따랐다.

카타리나는 오러쉴드를 해제했다. 나와 비슷한 성능의 몸뚱이로 싸우겠다는 듯 검으로 화염구를 가르며 접근했다.

쉬익! 쉬익! 쉬이이이이익!

카타리나는 순식간에 일곱 개의 화염구를 베었고, 내 검격을 쳐냈다. 그와 동시에 자리에서 벗어나며 마탄을 피했고, 추격하는 마탄을 검으로 벗겨냈다.

“아!”

검을 저렇게 쓸 수도 있구나. 일격, 일격에 전신의 힘을 끌어 쓰는 게 아니라 몸을 철저히 분리했다. 카타리나는 전완만을 써가며 충격의 반동을 그대로 이용해 다음 검격을 더 빠르게 이었다.

내가 감탄하자 카타리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더 덤벼오지 않는 걸 보아하니 이쯤에서 끝내도 될 듯싶었다. 어쩌다 보니 내 검술보다 마법을 자랑한 것만 같아 멋쩍어 머리를 긁적거렸다.

대련을 끝내는 분위기에 뇌에서 카타리나의 검술을 몇 번이고 반복재생했다. 그녀의 움직임과 그에 따른 검의 이동. 마탄을 벗겨내는 기묘한 기술. 그게 어지럽게 서로의 꼬리를 물었다.

“아.”

뭐가 뭔지, 약간은 알 법했다.

* * *

레오는 둘의 대련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게 저와 같은 학부생이 펼칠 수 있는 실력이란 말인가.

주변을 둘러보니 저와 같이 검술 학부에서 온 놈들은 다 비슷한 반응이었다. 부러움과 탄식 그리고 찬사.

“어떻게 저 나이에 저렇게 싸울 수 있는 거지?”

“바로 기사단에 입단해 실전에 들어가도 괜찮겠어.”

레오는 그들의 말에 동의했다. 라파엘은 이미 학부생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라파엘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성장했다.

‘원래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레오는 아카데미에 막 입학했을 때에 라파엘과 대련했던 걸 떠올렸다.

실력 차이는 여실했지만,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수백 번 싸우다 보면 한 번쯤은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은 아니었다. 몇 번을 싸우든 이길 것 같지가 않았다.

분했다. 그리고 이건 검술학부만이 아니었다.

레오는 라파엘이 뿌려대는 불덩이와 마법의 탄환이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주변에 지팡이 들고 있는 마법사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결코 낮은 수준은 아니었다.

“저렇게 뛰어다니면서 영창을 해? 어떻게?”

“두 가지 마법을 섞어 쓰고 있어. 마법의 난이도만 따지면 평범한데, 그 운용이 신기하네. 누구한테 배운 걸까?”

레오는 입을 다물었다.

천재.

라파엘은 천재였다.

다른 이들도 라파엘을 천재라 불렀다. 어린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에 오른 검술 실력을 제외하고도 그러했다. 타고난 마나량, 마법의 운용, 전투 감각 그 모든 게 평범함을 벗어났다.

“별것도 아니군. 호들갑은.”

황태자, 카르테아를 제외하면 그리 평했다. 황실에서 대대로 흐르는 용혈. 용의 피는 사람을 강인하게 만들었다. 초대 황제를 제외하면 가장 피를 짙게 이었다는 카르테아가 보기에 라파엘은 수많은 기사 중 하나일 뿐이었다. 대단치도 않았다.

그가 앞으로 얼마나 성장하든 관계없이 손가락 하나로 이길 수 있었다. 그렇게 라파엘이 박하게 여길 때였다. 카르테아는 검지로 제 이마를 짚었다.

‘내가 왜?’

카르테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파엘에게 왜?

평범한 시선으로 라파엘을 본다면 천재가 맞았다. 시간이 지나면 더 크게 자랄 재목이니 미리 친분을 쌓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카르테아는 잠시간 라파엘을 제 경쟁자라 치부했다.

왜?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가 제국에 잠재적인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가?

그가 황제의 자리를 탐내고 있는가?

전혀 아니었다. 카르테아가 라파엘을 껄끄럽게 느낄 이유는 전무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카르테아의 시선이 감탄하는 나비에를 향했다.

“내가?”

카르테아는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떠났다. 그럴 리가 없었다.

* * *

“너는 이거 믿어?”

“아니 절대. 내가 그놈을 아는데, 그놈이 소드 익스퍼트? 웃기지 말라고 해. 다 헛소리야.”

“검성이랑 사람들 앞에서 대련도 했다는데? 그래도?”

“아니, 내가 똑똑히 알아. 다 거짓말일 거야. 집에서 놈이 하던 꼬라지를 떠올려봐. 걔가 언제 검술을 연습했는데? 3류도 안 되는 실력으로 아카데미에 들어가 몇 달 만에 익스퍼트?”

제리코 아이작은 이블린이 펼친 신문을 뺏어 북북 찢으며 콧방귀를 끼었다. 조각난 신문이 바닥에 쌓였다.

이블린은 제리코가 한심하다는 양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그러다, 그게 진짜면? 우리 둘 다 망하는 거잖아.”

“내가 말했잖아! 이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놈이 진짜로 개과천선해서 아카데미 들어가자마자 매일 12시간씩 수련했어도 익스퍼트에 오를 순 없어. 네가 검술을 안 배워서 그러는 거야.”

이블린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그게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일단 정보가 들어왔잖아. 그럼 대비를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게다가 검성이 이를 보증했어. 사실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거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싸우지 마.”

제리코는 얼굴을 와그작 구겼다. 주먹으로 제 무릎을 쿵쿵 때리며 승모근 쪽이 뻐근하다는 듯 목을 크게 돌렸다.

“포기하자고? 영지를 그냥 넘기자고? 그게 말이 돼?”

“서두를 건 없다는 거야.”

“포기하자는 거 맞잖아. 라파엘이 돌아왔을 땐 넌 여기 없을 테니까.”

이블린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면 그렇게 생각해.”

제리코는 제 머리카락을 쓸었다. 막상 이블린이 말려주지 않으니 찜찜했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만약에 라파엘이 소드 익스퍼트에 올랐다는 기사가 진실이라면? 알고 보니 라파엘이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 검성의 가르침을 통해 익스퍼트에 올랐다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아이작 가문의 가법 때문이었다. 가장 강한 자가 영주가 된다는 가법. 최근에는 유명무실해져 장남이 가주 자리를 잇는 게 오래였으나 적어도 영지를 빼앗을 구실쯤은 되었다.

거기에 라파엘은 가신들의 신임까지 잃은 상태. 제리코가 라파엘과 대련해 승리하고, 이블린이 입김을 더한다면 영지를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든 계획이었다.

제리코가 라파엘을 이기지 못한다면 포기해야만 했다.

제리코는 꽤 오래전부터 아이작 영지를 제 것이라 여겼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제 손에 들어올 줄 알았다.

“난 포기 못 해.”

“포기 못 하면 어쩌게? 라파엘이 영지에 돌아왔을 때 싸우게?”

“어.”

“하아…. 그러면 그렇게 하든가. 죽지는 말고.”

제리코는 이블린과의 대화를 마치고 저택에 구비된 단련실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제 손바닥을 확인했다. 손바닥이 걸레짝일 될 만큼 검을 휘둘렀고, 수련했다. 다 영지를 빼앗기 위한 과정이었다. 가주가 되고 싶었다.

“절대로 포기 못 해.”

제리코는 검을 쥐었고,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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