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43화 (43/125)

제43화

나비에를 훈련한 지 몇 주가 지났다.

겉보기에는 크게 달라진 바가 없어도 폐활량과 근지구력, 최소한의 펜싱 스킬은 생겼다.

막 펜싱을 시작 했을 때에 그녀의 실력을 떠올리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래도 부족해.”

황태자를 감탄시키기 위해서는 더 출중한 기술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도 대회 때까지 그녀의 실력을 지금 이상으로 키우는 건 힘들었다. 신경 써야 할 일이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비에도 여러모로 제 할 일을 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그래서 우리가 내린 방법은 부상이 있는 척 연기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대회 날을 대비하고자 부상을 감안하고 시합하기로 했다. 그 탓에 나비에는 신발을 짝짝이로 신은 채 경기장에 나타났다.

그녀는 붕대를 감아 퉁퉁 부은 발을 내 쪽으로 향하더니 말했다.

“말한 대로 하고 왔어요.”

신발을 신고 붕대를 감아 발목만 볼록 튀어나왔다. 나는 이를 보고 말했다.

“붕대만 감는 건 별 의미가 없는 일이기는 해···. 제대로 고정이 되는 게 아니니까. 근데 어차피 우리는 연기만 할 뿐이잖아. 제대로 고정을 할 필요까지는 없겠지. 이거를 지적할 사람도 없을 테고.”

“아뇨, 하죠.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확실히 알겠어요. 이거는 제 인생에 두 번 다시 안 올 기회에요. 반드시 잡고 싶어요.”

나비에의 의지에 감탄했다. 맞는 말이었다. 만에 하나라는 게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져야 우리의 각본이 들통날지는 알 수 없는 법, 모든 일은 다 완벽하게 하는 쪽이 좋았다.

나는 반깁스를 델 스프린트를 구해와 그녀의 발목에 댔고, 붕대로 다시금 감았다.

“한동안은 불편할 거야. 대회 때까지, 그리고 며칠만 더 참아.”

“네, 이 정도야···. 허리띠 졸라매는 것보다 편하죠.”

작업을 마친 후, 우리는 준비선에 서서 자세를 잡았다.

공격권은 나비에부터였다.

그녀는 공격적으로 하라는 내 말을 들은 이후 확실히 적극적으로 찔러왔다. 이번에도 그러했으니까, 난 그녀의 공격을 지적했다.

“그게 아니지. 너는 왼쪽 발목을 다쳤잖아. 전진과 후진 반응이 같으면 안 돼. 후진할 때는 무게가 왼발에 실리잖아. 그러니 왼발을 축으로 움직일 때는 한 템포 늦게. 그리고 아프다는 거 살짝 티 내면서. 얼굴 살짝 찡그려줘. 알겠지?”

“네. 다시 해볼게요.”

나비에는 지적 한 번에 돌변했다.

내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충실히 따랐다. 단순히 부상이 있어 제 실력을 못 낼 뿐 아니라, 그에 분해한다는 걸 잘 드러냈다. 연기 쪽으론 타고났다.

훌륭한 연기에 감탄하며 짝짝, 손뼉을 쳤다. 훌륭했다.

“그거면 됐어. 완벽해.”

그러던 와중이었다.

이곳은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용 경기장이었다. 누가 오더라도 어색한 일은 아니었다. 한 명만 빼면.

아카데미에 운 좋게 같은 해에 입학한다고 해도 졸업할 때까지 얼굴 한 번 보는 게 어려운 학생. 제국의 황태자 카르테아 사비 이니에스피.

그가 어찌 된 일인지 경기장에 입장했다.

우리는 숨죽이며 바닥을 보는 척하고, 그를 곁눈질했다. 무슨 일일까 싶어 잠시간 기다리자 그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우리가 먼저 카르테아에게 인사하자, 그는 나비에의 발목을 힐끗 보더니 미간 사이를 끌어모았다. 그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발목은 왜 다쳤나?”

나비에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나를 힐끗거렸다.

예정에 없던 일인지라 당황스러운 듯했다. 여기서까지 말을 맞출 수는 없는 까닭에 알아서 하라고 턱을 까닥이며 신호를 보냈다. 나비에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말했다.

“걷다가 살짝 삐었어요. 크게 다친 건 아니라 움직일 만하고요.”

“그런데 펜싱을 하나? 쉬어야 하는 게 아니고?”

“대회가 얼마 안 남아서요.”

“대회라니?”

이게 보통이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열리는 자그마한 규모의 펜싱 대회 따위야 모르는 게 평범했다. 나조차도 나비에가 아니었다면 관심도 없었을 일이었다.

카르테아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카데미에 대회가 있는데, 거기에 나가요.”

“포기해. 발목이 아프잖아. 거기서 이긴다고 뭐라도 얻는 게 있나? 무엇을 위해서 무리하려는 거야?”

나비에는 괜찮다는 듯 웃더니 스프린트를 댄 발을 움직여 보였다.

“이게 처치가 과해서 심각해 보이는 거지, 말 그대로 살짝 삔 거라서요. 며칠만 지나면 나을 거에요.”

카르테아는 여기서 더 참견하는 건 어렵다 싶었는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내 쪽을 보더니 인상을 구겼다.

“익숙한 얼굴인데, 이름이 뭐였지?”

“라파엘 아이작이라 합니다. 아이작 가문에···.”

“자기소개는 됐네. 별로 듣고 싶은 이야기도 아니야. 것보다, 자네가 펜싱을 가르치는 모양이지? 그렇다면 우선 말려야 할 일 아닌가?”

“본인 의지가 확고하고···.”

“하. 답답하군. 그래, 그러면 나와 게임 하나 하지 않겠나?”

“예?”

“별거 없네. 자네의 실력을 보고 싶을 뿐이니.”

카르테아의 제안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여기서 우리가 연습 경기를 하면 승패가 나오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모르겠다. 다만, 카르테아한테는 뭔가 다른 듯했다.

“장비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플러레와 장갑, 신발 따위야 경기장에 널린 것을 써도 마스크나 도복은 카르테아가 꺼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카르테아는 잠깐 고민하는 척하더니 말했다.

“공용을 쓰면 될 거 아닌가.”

“예, 알겠습니다.”

명색이 황태자의 제안이었다.

거부할 수도 없어 경기를 수긍했다. 카르테아가 먼저 공격을 시도했다.

* * *

자신 있던 그의 태도와는 다르게 카르테아의 자세는 그리 좋지 않았다.

무릎을 과하게 구부렸고, 플러레의 방향이 지나치게 높았다. 아마 펜싱을 배운 경험이 적거나 오래된 듯했다.

그러나 그 직후 카르테아의 몸이 움직였다.

마나 연단으로 단련된 안구는 카르테아의 동작을 포착했다.

전진 후 찌르기.

동시타 판정 시 공격권 소유자의 득점으로 인정됐기에 정석이라면 정석이었으나 카르테아는 과했다.

보폭이 크며 흉곽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이대로 팔을 쭉 뻗어 반격하면 내 득점이었다.

하지만 안구와는 다르게 몸이 따라가지 못했다. 카르테아의 접근이 기겁할 만큼 재빨랐다. 마나를 쓰지 않고는 반격하는 게 불가했다.

쿠욱!

카르테아의 플러레가 내 가슴에 닿았다.

나는 이제 막 팔을 움직이려는 시점이었다.

초인적인 속도에 순간 마나를 썼나 싶었으나 그게 아니란 걸 바로 직감했다.

용혈이었다. 카르테아의 몸에 흐르는 짙은 피.

그게 카르테아의 한계를 지웠다. 마나와 같은 기공을 쓰지 않고도 막대한 힘을 뿜었다.

경기를 이렇게 치를 셈인가?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카르테아가 히죽거리더니 말했다.

“아. 규칙은 알고 있네. 이런 스포츠에서 마나를 쓰는 건, 매너가 아니라지? 물론 나도 그를 알고 있네. 나는 마나를 쓰지 않았어.”

방금의 찌르기는 순수하게 완력으로만 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보고 마나를 쓰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황태자의 명령인데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일.

나는 순순히 점수를 내주었다. 경기는 순식간에 끝났고, 점수 하나 내지 못한 채 패배했다.

접대 축구도 아니고, 접대 펜싱은 처음인지라 떨떠름했다. 이게 뭐지?

이런 경기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카르테아를 보니 놀랍게도 몹시 만족한 듯했다. 그는 마스크를 벗으며 웃는 얼굴을 보였다. 그는 내게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수고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그는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의 시선은 나비에 쪽을 향했다. 나비에의 눈치를 살폈다.

아아!

아아아아아!

알겠다. 깨달았다.

카르테아는 나비에한테 이미 마음이 있는 듯도 했다.

때문에 나비에한테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고, 이런 일을 벌인 듯했다. 또 그러니 나비에 주변을 맴도는 내가 눈에 밟힌 것이고, 괜히 시비를 건 것이다.

이곳 기준으로도, 현대 기준으로도 성인을 넘었다고 하기에는 유치한 구석이 있지만, 원래 그런 캐릭터이기도 했다.

그가 왜 이런 짓을 한 건지 정확히 이해했다.

이번에는 그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사납게 뜬 눈에 오싹했다.

내게는 적대적인 태도였는데, 아무래도 그가 오해한 듯했다. 나비에와 이따금 함께 몇몇 음식을 먹고는 했다. 같이 있는 시간이 꽤 길기도 했다.

로맨스 판타지의 남주인공에게 질투는 기본적인 특성 아닌가?

카르테아가 질투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는 나비에와 거리를 두는 쪽이 좋을 듯했다.

‘비숏만 떨어뜨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다른 문제가 생겼네.’

카르테아의 질투심을 키우고, 애를 닳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지만 과할 만치 위험했다.

자칫 잘못했다가 내게 화가 미칠 수도 있었다.

카르테아는 거의 다 잡은 물고기였다. 구태여 위험을 감수해가며 모험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그만 내버려 두자.

카르테아는 나비에한테 발목 조심하라고 당부하더니 내 쪽을 몇 번 힐끗거리더니 떠났다.

나비에는 카르테아가 떠난 걸 확인하고야 후우 한숨을 뱉었다.

“깜짝 놀랐네요. 비상사태였는데, 우리 나름 잘 대처했어요.”

나비에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잘 된 거 같네.”

“네.”

“황태자님이 너한테 마음이 있는 거 같다.”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나비에의 대답에 폭소가 터졌다.

웃음을 참으려는데, 배를 잡고 어깨를 들썩였다. 이야, 이제 주인공 다 됐네. 남 일에는 눈치가 기가 막힌데, 막상 자기 일에는 둔감한 게 전형적이라 몹시 우스웠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따로 하자. 가능하면 각자 알아서 움직이자고.”

“네?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황태자님께서 질투하신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닐 거에요. 그리고 저희가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문제가 생길 일은 피하는 게 좋으니까.”

“으음.”

나비에는 잠시간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동안은 그렇게 해요. 대신에 일이 다 끝난 다음에는 친구 하고요.”

“우리가?”

“네.”

“나야 환영이지.”

우리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나비에는 황후에 오른다. 높이 높이 올라갈 애가 친구 하자고 말하니 수락할 수밖에.

“이거 약속이에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