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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44화 (44/125)

제44화

비숏은 새로운 연금술 치료제 개발에 바빠 다른 데에 눈 돌릴 여유조차 없었다.

나비에는 구태여 내가 참견하지 않아도 학업에 열중하며 성적을 관리했다. 이안과 제프린은 아카데미를 떠났고, 아가레스와 카르테아는 내 바람대로 움직였다.

이대로만 하자. 이대로만.

많은 것들이 당초에 계획에서 벗어났지만, 결과적으로 다 잘 됐다. 훌륭했다.

곧 있으면 아카데미의 기말고사. 시험을 치르고, 학기를 장식하는 축제가 끝난다면 방학이었다. 방학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잘 해왔다.

이곳에 떨어졌을 때만 해도 눈앞이 막막했다.

앞으로의 설계도를 그리고, 방침을 정하면서도 과연 이룰 수 있을까 낙담했다. 가끔 뭔가를 실수해서, 일이 안 풀려서 죽는 건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그간 했던 마음고생이 얼마였던가? 그것들이 전부 기우였다.

벌써 여기까지 왔다. 몇 주가 지나면 이 위험천만한 아카데미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문으로 돌아가 아가레스와 했던 약속을 지키러 가기 전까지는 잠시간 쉬자. 가문을 뺏으려는 동생들이야, 아카데미에서 만난 괴물들에 비하면 귀여웠다.

거의 익스퍼트에 올랐고, 마법도 성취를 거두었다. 다룰 수 있는 마법의 수는 적어도 실전에서 유용하게 쓸 수준에 올랐다. 동생들이라 해봤자 별거 아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새롭네.

막 이 세계에 떨어져서 제리코의 얼굴을 봤을 때는 한참 겁먹었다.

깡패 영화에 나오는 깡패보다도 깡패 같은 얼굴에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그랬던 놈을 별거 아니라 하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가문으로 돌아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생활을 잘 마무리하자.

그렇게 스스로에게 외치며 카르테아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는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고작해야 여가에 불과한 일이다. 본인이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대는 막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다 부상이 심해지면 어떡하려고.”

“죄송합니다.”

“순순히 수긍하는 걸 보아하니, 그대도 잘못되었다는 걸 아는 모양이군. 그럼 왜 알면서도 막지 않았나?”

카르테아가 예고도 없이 아침부터 찾아왔다. 어떻게 보더라도 예법 혹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나 이를 지적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어느 누가 황제 자리를 물려받을 황태자에게 지적질을 할 수 있겠는가?

심지 곧고, 신념 뚜렷하며 평생을 손해 보고 살 놈이 아니라면 일단 참고 볼 것이다. 나는 숙였던 머리를 더더욱 숙였다.

그는 내게 화를 쏟아내며 나무랐다. 왜 나비에를 말리지 않았냐고.

실수였다. 나비에한테 부상이라는 설정을 들이밀지 말 걸 그랬다.

일이 이렇게 복잡해질 줄이야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카르테아에게는 뭐라 변명해야 할까.

마음 같아서는 나비에의 탓으로 다 돌려버리고 싶었다. 걔가 박박 우겨서 이렇게 된 거니 따질 거면 걔한테 가서 따지라고 이 짐 덩이를 던져버리고만 싶었다.

하지만 안 될 일이었다.

이 모든 일은 다 나비에를 카르테아와 이어주기 위해서 벌인 짓이었다. 잘못했다가 당초에 목적까지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 내가 참자.

“그게 말입니다···. 전에 나비에가 말씀드렸듯이 큰 부상은 아니었습니다. 기능상의 이상은 전혀 없는데, 나비에가 미약하게나마 통증을 느낀다 하여 부목을 대었을 뿐입니다. 곧 있으면 거의 다 나을 겁니다.”

“그런가. 그럼 대회 때는 제 실력을 내겠군. 응원하겠다고 전해주게나. 경기도 보러 가겠다고.”

잘 넘어갔다.

그런데, 잠시만.

이걸 수긍해야 하나?

경기에서 간단히 패배하더라도 나비에가 부상이 있어 그렇다는 핑계를 써먹으려 했다.

여기서 긍정하고 넘어간다면 방패막이가 사라졌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울 듯했다. 카르테아에게 반박할 마땅한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그리 전해보겠습니다.”

“그럼 자네도 수고하게나.”

카르테아는 머리를 흔들며 멀어졌다.

나는 떠나는 카르테아의 뒤에다가 대고 인사를 건넨 후에야 깊은숨을 토해냈다.

이게 아침부터 뭔 일 이래냐.

한동안은 눈에 안 띄게 잘 숨어다니며 몸을 사려야 할 성싶었다. 이번 일로 생긴 문제는 크게 둘이었다.

황태자가 나비에의 부상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황태자가 나를 싫어한다.

우선 앞에 문제 탓에 나비에는 대회에서 조금 더 출중한 성과를 보여야만 했다.

1회전에서 탈락이라도 했다가는 곤란했다. 기말고사가 가까워 공부하기도 바쁠 텐데, 더 열심히 훈련해야 했다.

“하아···.”

그리고 황태자가 나를 미워한다. 암담했다. 지금이야 황태자지, 시간이 지나면 황제가 될 놈이었다. 고작해야 미운털 조금 박힌다고 불안해 떨 건 없어도 괴로웠다. 사람 일이라는 게 어찌 될지 모르는 법 아닌가.

이걸 어찌해야 하나.

금일 수업 시간 내내 이걸로 씨름하다가 방법을 찾은 듯했다.

나비에가 카르테아에게 잘 설명해주면 될 일이었다. 나비에가 카르테아와 이어지고, 둘을 이어주기 위해 내가 쏟아부은 노력을 카르테아에게 말해준다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면 카르테아도 조금은 고운 눈길로 나를 보겠지.

* * *

오늘에 모두 수업을 끝마친 후, 나는 나비에를 찾아갔다. 그녀에게 아침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며 카르테아와 잘 된 후에 해야 할 일 몇 가지를 일러주었다.

나비에는 자기만 믿으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에이···. 그야 물론이죠. 당연히 해드려야죠. 잘 된다면요.”

“잘 될 거야. 지금 문제가 생긴 건 잘되고 있기 때문에 생긴 거니까. 대신에 대회 준비는 조금 힘들 수도 있겠네. 네 부상이 가볍다고 말했으니까.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자신 있어요.”

나비에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애가 자신 있을 실력이 아닌데, 자신이 있다고 하니 내 귀를 의심했다.

나비에는 실실 웃더니 말했다.

“대회에 참가자들 명단을 보니 어느 정도 눈에 익더라고요? 아마 제가 좀 져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줄 거예요.”

“아아! 그런 묘수가 있었구나!”

“네···. 그래도 훈련하기는 할 거예요. 형편없는 실력으로 이겼다가는 티가 나잖아요? 그래도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는 거죠. 대회는 문제없어요.”

그런 방법이 있었네.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회에서 몇몇은 진심으로 임했을 거다. 이기기 위해 땀 흘려 연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고 해봤자 얻을 수 있는 건 만족감뿐이었다.

소수의 몇몇은 그 만족감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겠지만, 대부분은 아니었다.

나비에는 있는 집안 자식으로, 꽤 권세 높은 집안의 딸이었고, 아카데미에서 가장 발이 넓은 학생이었다.

기껏해야 대회에서 져준 거로 나비에한테 빚을 지울 수 있다면 퍽 남는 장사였다. 이 거래를 거부할 학생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왜 이런 발상을 하지 못했을까!

“대단한데? 최고야! 넌 천재야!”

“뭘요···.”

* * *

카르테아의 공습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평안했다.

무탈한 일상이 계속되었다. 내가 바라왔던 평화로운 생활이었다. 요즘 따라 하는 일마다 잘 풀리니 위기감이란 게 사라져 게을러지고 싶어질 수준. 내가 여기에 떨어졌을 때의 목표부터가 그러했다.

생존한다. 그리고 노동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놀고먹는다.

매일같이 놀고먹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하지만 잠시만 더 참기로 했다.

땀은 흘린 시기에 따라 그 값어치가 달라졌다.

땀의 가치는 지금이 으뜸이었다. 조금만 더 참는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났고, 아카데미의 기말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원래 생활을 유지하며 틈틈이 책을 읽었다. 그렇게 아카데미에서의 두 번째 시험을 맞이했다.

내 시험의 결과는 중요한 게 아니었지만, 대부분 과목에서 만점 혹은 만점에 버금가는 점수를 받았다. 이왕이면 좋은 점수를 받는 게 좋지 않겠는가?

나는 내 성적표를 대충 확인한 다음에 나비에를 찾았다. 나비에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런 결과가 나온 게 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냈구나!”

“네, 만점이네요. 공부한 보람이 있었어요.”

“잘했어. 대단해. 최고야.”

“네, 하하···.”

모든 일은 다 완벽하게 돌아갔다. 남은 건 나비에의 펜싱 대회뿐이었다. 이도 이미 승부 조작을 다 끝내놓았으니 걱정할 게 없다시피 했다.

“드디어 시험이 끝났네요. 그런데 말이에요. 한 최근 몇 주 동안은 공부보다도 훈련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썼던 거 같아요.”

“더 대단한데? 그런데도 만점이야? 너 천재인 거 아니야? 이 참에 이 길로 나가버려?”

“하하···. 자다가 근육통 때문에 깨기도 하고, 안 하던 걸 하려니 훈련 때면 죽고 싶기도 하고, 많이 괴로웠죠.”

“잘했어! 그걸 참고 버텼구나!”

“네, 그랬죠. 그런데, 그걸 참고 버티다가 멍청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승부 조작을 더 그럴듯하게 하자고 이 고생을 하고 있나.”

나비에는 회의감이 든듯했다. 그러나 이건 일순간의 감정일 뿐이었다. 나비에가 고통을 감수하고, 노력하는 건 승부 조작을 잘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황후가 되기 위함이었다. 나비에의 곡해를 교정해줘야 한다.

“아니야. 그게 아니지.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겠어. 그런데 들어봐봐.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는 일을 하지는 말자. 나도 공명정대, 정정당당, 이런 말 좋아해. 그런데 좀 가려가면서 하자는 거지. 별것도 아닌 거잖아.”

“네. 별것도 아닌 일이죠.”

“그러니까, 그냥 하자. 정답이랑 오답이 있으면 정답을 골라야 하잖아. 우리 하던 대로 하자.”

나비에는 실실 웃었다.

이게 웃을 일이야?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겠어?

답답해 말없이 노려보고 있자 나비에가 입을 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저도 무리한 목표를 잡는 건 싫어요. 그냥···.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죠.”

“할 수 있을 거 같은 거잖아. 실패하면?”

“실패요? 제가 첫 시합부터 지면요?”

“어.”

나비에는 뭐가 또 즐거운지 웃어댔다.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중요한 건 제 의지, 태도라고요.”

“그래도 이기면 좋잖아. 우리 확실하게 하자.”

“이기도록 노력할게요.”

어쩐지 일이 너무 잘 돌아간다고 느꼈다. 조만간 어디서 문제가 하나 터지겠구나, 싶었는데 그게 여기였다.

어떻게 할까?

여태까지 나비에는 내 말을 잘 따라왔다. 강하게 밀어붙인다면 결국에는 승부 조작에 가담할 것이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지면 미워할 거야.”

나비에는 히죽거리더니 대답했다.

“이거 절대 지면 안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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