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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45화 (45/125)

제45화

나비에는 아카데미 입학 이전부터 적극 타지의 제 또래 귀족들과 친분을 쌓아왔다. 아카데미에 막 입학한 1학년이 마당발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런 까닭이었다.

나비에 러브원이라는 이름은 아카데미 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었다.

그녀는 여러모로 유명했다.

그런 그녀가 대회에 참가한다니 주목이 쏠리는 건 뻔한 일이었다. 본래라면 생각이 없었던 몇몇 학생들도 그녀를 따라 대회 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나비에의 우승을 바라는 나로서는 경사였다. 대회 참가자들의 평균 수준이 확 내려갔으니 나비에가 높이 올라갈 확률도 덩달아 상승했다.

대회는 검술 학부의 연무장을 빌려 실행했다.

입학시험 때처럼 관람객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고, 연무장의 중앙에 14m 길이의 경기대를 설치했다.

본래라면 금속 경기대가 있는 연습장을 사용했겠지만, 예상외로 구경꾼들이 몰려올 듯해 연무장에 경기대를 설치했고, 흙으로 채웠다.

현대처럼 전기 심판기가 있는 대신에 검술 학부의 교수가 정확히 판정해주는 식이었다.

대회가 시작하기에 앞서 관람객 좌석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여기에 내가 앉아 있는다고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한시라도 빨리 승패를 알고 싶었다.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나비에는 제 실력으로 승부하겠다고 선언하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실력이 얼마나 늘었길래 그러는 건지 직접 보고 싶었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도복과 보호대를 찬 선수가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마스크를 벗으며 얼굴을 보였다. 나비에였다.

“보러 오셨네요?”

“당연하지. 그간 쓴 노력이 어딘데.”

“의외라서요. 워낙 매정하신 분이니까 응원한다고 달라지지도 않을 텐데 시간 낭비하기 싫다고 하실 줄 알았어요. 얼굴 봐서 반가워요.”

나비에의 투정에 헛숨을 들이쉬었다. 내가 그렇게 박하게 굴었던가? 그랬던 거 같기도 했다. 하기야 나비에한테는 필요 이상으로 선을 그었다. 나도 애도 원작에서는 악역이었으니까. 같이 있으면 마이너스에 마이너스로 생각했다.

잠시간 과거를 훑고 있자, 나비에는 한숨을 내쉬더니 플러레로 바닥을 톡톡 때렸다.

“응원 오신 게 아니라, 진짜 보기만 하러 온 거셨네요.”

“아니야. 응원하러 왔지. 꼭 이겨야 해. 화이팅!”

“네···. 열심히 해볼게요.”

나비에는 경기장 쪽으로 이동했다. 오늘의 대회는 하루 만에 끝을 내는 것답게 토너먼트 식이었고, 세트 사이의 휴식이 2분으로 널널하다는 점 정도가 특징이었다. 대회가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자,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

아직 경기 시작까지는 시간이 넉넉해 자리가 많이 비었는데도 구태여 옆에 앉은 게 누구인가 궁금해 슬쩍 곁눈질했다.

밝은 금발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르테아에게 인사했다.

카르테아는 나를 본 척도 하지 않고, 경기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놀란 척할 거 없어. 인사도 그쯤 하면 됐으니 다시 자리에 앉게나.”

“예. 알겠습니다.”

“기어코 대회에 나왔구나.”

“들어보니 발목도 다 나았다고 하고, 최근에는 열심히 연습도 했는데 불참할 이유가 없었겠죠.”

“그런가…. 좋은 결과가 있기를 빌지.”

“네! 감사합니다!”

“자네한테 고맙다고 한 소리 아니야.”

* * *

나비에 러브원은 경기대의 위에 섰다. 제 발밑에는 지겹도록 보아온 선이 이어져 있었다.

발끝으로 바닥을 비벼보니 먼지가 휘날렸다. 금속과는 다른 생소한 느낌에 익숙해지려 발을 움직여 보았다.

‘가능하면 적극적으로 득점을 노릴 것. 공격권이 없을 때도 지나친 후진은 삼갈 것.’

이건 보여주기 위한 경기였다. 승리보다도 중요한 게 따로 있다는 걸 명심하며 심판의 알레를 기다렸다. 대회에 참가자는 64명. 총 5번의 승리를 따내면 우승이었다.

나비에는 마스크를 쓴 채 머리를 들어 상대를 탐색했다.

마른 체구에 부자연스러운 손을 보아하니 플러레를 놓은 지 오래됐거나 초심자인 상대였다.

두 번 전진 후에 찌르기.

상대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점수를 내주었다. 아주 손쉽게 점수를 따냈다.

다른 참가자들도 이럴까?

아마 아닐 거다. 그냥 운이 좋았던 거겠지.

나비에는 수월하게 첫 승을 따내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경기도 이와 비슷했다. 나비에는 간단하게 승리했다. 상대도 다른 참가자를 이기고 올라왔을 텐데,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실력으로?

나비에는 제 몸을 내려다봤다.

끽해야 2달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제법 노력했다. 꽤 발전했다. 딱 그 정도였다.

이렇게 대회 참가자들을 압도하기엔 여러모로 부족했다. 그럼에도 이토록 쉬이 이겨내다니 기시했다.

“잘 하시네요.”

상대는 점수 하나 따지 못하고 3세트를 내리 지고도 헤실헤실 명랑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나비에도 상대에게 운이 좋았다고 답을 하며, 라파엘이 왜 웃지 말라고 다그쳤는지를 알 법하다고 회상했다.

지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건 그리 보기 좋지 않았다.

왤까?

나비에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

입꼬리가 찢어지게 웃는 연습을 한 건 그래서였다. 언제나 웃고 있으려 노력하며 살았는데. 남 웃는 얼굴을 언짢게 여긴다니 어딘가 어색했다.

왜 그럴까 고민하니 곧 답이 나왔다.

대회에 참가한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고, 서로 원했던 상대가 달랐기 때문이다. 나비에는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 나온 사람과 겨루기를 바랐다.

그와 반대로 상대는 대회에서 적당히 겨루고 친목을 다질 상대를 원했다.

이것 봐라.

“나비에 영애분은 아카데미에서의 사교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시고, 학문에도 열심히 하시더니···.”

상대는 마스크를 벗으며 제 얼굴을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나비에는 상대의 얼굴을 본 순간 두뇌가 회전했다.

그랬구나.

상대가 어떻게 1차전을 뚫었는지 알았다. 대진표라면 미리 나와 있으니 1차전에서 이긴다면 나비에를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이런 대회에서 ‘우연히’ 만나 연을 쌓는 건 무도회 따위에서 말 한 번 붙이는 것보다 몇 배로 진한 인연이었다.

하급 귀족이라면 돈 꽤나 쓰더라도 원할 인연이었다.

애는 했구나.

나비에는 라파엘에게 했던 제안을 떠올리고는 피식했다.

그러나 상대는 그 웃음을 달리 해석한 것인지 얼굴에 화색이 돌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다음 경기도 잘 치르시길 바랄게요. 관중석에서 응원하고 있을 테니 끝나고 다과라도 같이 드시지 않으실래요? 저희 영지에서 차를 가져왔는데, 어떠세요?”

“미안해요. 뒤에는 따로 약속을 잡아둬서요. 이름이 뭐라고 했죠? 다음에….”

“네!”

운이 좋게도, 혹은 불행하게도 다음 상대는 제대로 된 선수였다.

시합 전 인사만 봐도 전에 상대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 듯했다.

공격권은 상대부터였다. 상대의 전진은 큰 키만큼이나 보폭이 컸다.

상대는 칼치기 후에 찌르기로 점수를 빼앗았다. 나비에는 순식간에 실점하자 위기감이 들었다.

여기서 지는 건가?

나쁘지 않았다. 3차전 정도 올라왔으면 할 만큼 했다.

순전히 운으로 올라온 자리였지만, 라파엘도 뭐라 하지 않을 거다. 이기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나비에가 플러레를 상대에게 찔러 넣었다. 상대는 능숙하게 나비에의 공격을 피한 후, 그녀의 플러레를 쳐내고자 시도했다. 나비에는 팔꿈치를 들며 칼치기를 피했다. 후진 후에 빠른 전진. 내리며 전진, 뒤쪽 다리를 끝까지 피며 플러레를 밀었다.

팡뜨. 득점이었다.

누가 피부를 살살 간지럽히는 듯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작전대로 해야 하는데.

마음을 고쳐먹으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는데 자꾸만 입꼬리가 살랑거렸다.

재밌었다.

즐거웠다. 반드시 이기고 싶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제 감정대로 하다가 일을 망치는 게 아닌가.

염려했던 일은 상대의 공격권에 그대로 벌어졌다.

몸을 움직이며 도망치는 것은 비효율적인 방식이었다. 경기장의 너비는 고작해야 2m.

준비선에서 마지막 경고선의 거리까지는 5m.

플러레를 이용한 방어가 아니라 무작정 물러서고, 좌우로 몸을 트는 건 우습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비에는 그 멍청한 짓을 했다.

경기에서 이기려고 무리하게 실점을 피하다 보니 당초에 계획을 새까맣게 잊었다. 도망치다가 끝끝내 점수를 잃고서야 이래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야. 나는 달라.’

나비에는 앞서 겨뤘던 두 명의 상대를 상기했다. 그들과 달랐다. 그들은 플러레가 무서워서, 펜싱이 어색해서 도망쳤다. 나비에는 그들과 달랐다. 이기기 위해서였다. 나비에는 준비선으로 돌아가는데 문득 무도회에서 읽었던 책이 떠올랐다.

제왕학에는 그런 구절이 있었다.

-두려움을 정복하는 자가 세계를 정복한다

푸핫, 웃음이 나왔다. 그게 지금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나비에는 상대에게 다가섰다. 상대는 칼치기를 좋아했다. 또 칼접촉을 좋아했다.

나비에는 꼭 시험받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상대가 제가 어떻게 반응할지 구경하려는 것만 같았다.

나비에는 느닷없이 날아올라 찔렀다. 실점하기 딱 좋은 선택이었는데, 예상조차 하지 못한 수였는지 상대의 반응이 느려 득점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 * *

“잘하죠?”

“기술적으로 뛰어나진 않아.”

나는 카르테아의 말에 실소가 터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지난번 카르테아와 플러레를 겨뤘을 때 그는 우악스럽게 힘으로만 몰아붙여 왔다. 자기는 뭐 얼마나 스킬이 뛰어나다고 남을 그렇게 평한다는 말인가.

놀랍게도 나비에는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3번째 시합에서의 상대를 간신히 이겨 체력이 다 빠진 것 같았는데, 그 이후의 상대가 별 볼 일 없었던 덕이었다. 어쩌면 나비에가 우승을 원한다는 걸 눈치채고 져준 걸 수도 있었다. 어쨌건 나비에의 실력이 며칠 사이에 무섭게 늘었다. 놀라울 정도였다.

나비에가 결승에서의 마지막 득점에 성공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아서는 찾아가서 축하라도 해주고 싶은데, 여기 옆에 계신 놈의 눈총이 무서웠다.

“가는 거냐?”

“네. 이제 다 끝났으니까요. ”

“네가 가르쳤지 않나? 가서 칭찬이라도 아니면 축하라도 해주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데.”

눈을 깜빡였다. 카르테아로서는 내가 나비에와 가까이하기를 꺼릴 텐데, 이리 말하니 또 의외였다.

“네,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리하죠.”

나는 관람석에서 내려가 나비에를 찾았다. 마스크를 벗은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플러레를 하늘이 향하게 흔들었다.

“제가 해냈어요!”

“축하해.”

짝짝.

나는 박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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