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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46화 (46/125)

제46화

축제가 열렸다.

낮에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꼬치구이를 사 먹고 밤에는 불꽃놀이를 보며 광장에서 춤을 추기도 하는 그 시기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바람도 솔솔 불어 야외에서 놀기에는 딱 좋은 날씨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비에는 카르테아와 약속을 잡았다 하고, 그 외에 나머지 놈들은 축제가 열리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듯했다. 나도 그러했다.

며칠 후면 아카데미에 학기가 끝나고 방학에 들어선다. 이제 가문으로 돌아간다.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게 변했다. 우선 나만 해도 그랬다. 많이도 강해졌다. 몇몇 괴물만 조심하면 어디 가서도 두 눈 부릅뜰 수준은 됐다.

그리고 친구라 할 법한 놈들이 생겼다. 지금은 아카데미를 떠난 이안이 그랬고, 나비에와 아가레스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었다. 이렇게 여기는 건 나뿐만이 아닐 거다.

제 영지에 맛있는 거라도 숨겨뒀는지 아가레스는 남들보다 빨리 귀환할 채비를 마쳤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인사를 한답시고 내 숙소를 방문했다.

“곧 있으면 각자 영지로 돌아가겠군.”

“예, 그렇습니다. 하루빨리 집으로 가고 싶네요.”

“약속은 기억하고 있겠지? 내가 그 마법사 놈을 봐주는 대신에, 자네가 나를 도와주기로 했었지 않나?”

“물론이죠. 그걸 어떻게 까먹겠습니까.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자네도 영지에 처리할 업무들이 있을 터이니 기한은 넉넉하게 1달을 주겠네. 1달 내로 북부로 오게나.”

1달, 아가레스의 말대로 넉넉한 시간이었다. 나를 배려한 제안에 흔쾌히 수긍했다.

“예, 그리 하겠습니다.”

“그러면 북부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옷은 따뜻하게 입고 오도록. 여름에도 북부의 눈은 녹지 않으니.”

“네. 그때 봐요.”

아가레스가 떠나고, 나도 짐 정리를 시작했다.

옷가지와 잡다한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자니 그간 참 열심히 살았다 싶기도 했다. 사교적인 자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단출한 옷 몇 벌과 훈련에 필요한 도구 몇이 전부였다.

짐 정리는 금세 끝이 나, 훈련장으로 나가 카타리나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방학이라고 놀지만 말고 훈련도···. 아니, 아니다. 방학인데 연병장에서 하루 내내 칼만 휘두를 게 아니라 사람도 좀 만나고, 좀 쉬어. 그 휴식도 훈련이라 하니까.”

“항상 휴식은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다음 날 훈련에 지장에 안 가게 말입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좀 놀기도 하라고. 네 또래 애들이랑.”

“네. 종종 어울리고는 합니다. 카타리나 님은 뭘 하실 계획입니까?”

“수련.”

“제게는···.”

“난 늙었잖아. 그리고 나 말고 칼질에 미친놈이 있어서, 그놈 이기려면 계속 수련해야 해.”

백사자 기사단의 단장 이야기였다.

원작에는 이름만 등장하고 모습은 비춘 적 없는 인물. 소드 마스터에 오른 기사가 한 명뿐이라면 너무 희귀해 보여 만들어진 캐릭터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카타리나 님도 방학 기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개학 후에 뵙겠습니다.”

“그래. 그때 보자. 어디 다치지 말고 돌아와.”

그리고 훈련장 한 편에서는 레오가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사람이 오고 가는 데도 무관심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제 방학인데, 너는 어쩔 작정이야?”

“아, 저는 이대로 아카데미에 남아 있으려고 합니다. 본가로 돌아가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해야 할 일도 없으니까요. 차라리 여기에 남아 검술을 연마하려 합니다. 아, 혹시 괜찮으시다면 마지막으로 한번 겨뤄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래, 짧게 하자.”

훈련복을 입은 게 아니라 땀을 흘리고 싶지는 않았다. 레오의 검을 피하고, 쳐내고, 찔러 금세 끝을 냈다.

레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진 게 분한지 내게 인사하고는 등을 돌려 바닥을 쾅쾅 찍었다.

마지막으로 연금술 동아리를 들렀다. 길버트는 외부 일 때문에 자리를 비웠는데, 비숏이 혼자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가볍게 눈인사를 하더니 실험 도구에 집중했다.

“방학인데, 어떻게 할 예정이야?”

“가능한 한 빨리 약을 만들고 싶습니다. 아마 이대로 아카데미에 남아 연구를 계속할 성싶습니다.”

“고생이 많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바쁜 듯하니 눈치껏 빠져주었다.

돌아가기 전에 만날 사람은 다 만난 듯해 그대로 기숙사를 향했다. 슬슬 해가 저물고 있었다. 주홍빛 노을이 하늘을 물들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자연히 배가 고파 기숙사 식당에서 배를 채웠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해가 져 있었다. 어둑한 밤하늘 사이에서 드물게 별이 반짝였다.

다시금 기숙사로 돌아가던 때였다.

퍼어어엉!

하늘에 폭탄이 터졌다.

현대에서 봤던 것보다는 단조로운 폭발이었다. 하늘로 쏘아진 폭탄은 폭발하며 사방으로 불씨를 튀기며 반짝였다,

불꽃놀이는 첫발이 터진 직후에 연속에서 하늘로 솟구쳤고, 폭발했다.

나비에는 오늘 꼬치구이도 먹었을 것이고, 카르테아랑 잘 놀기도 했을 거다. 지금은 같이 불꽃놀이를 보고 있겠지.

그걸 생각하니 다음번 축제 때는 꼭 나도 꼬치구이를 먹어야겠다 싶었다.

* * *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그맣게 난 창을 통해 바깥 풍경이 휙휙 지나가는 걸 구경했다. 드디어 끝났구나.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나를 죽일 수도 있는 놈이 몇이나 있는데, 그것들과 함께 있으니 숨 쉬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스트레스였다.

입학하고 몇 주가 지나서는 웬만한 위험 요소들을 대부분 제거했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항상 주변을 경계하고 의식해야 했었다. 늘 말하는 바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는 법이라 자칫 무슨 실수라도 해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까닭이었다.

이제는 그마저도 끝이 났다.

집에 돌아가서는 뭐 하지? 요리라도 해볼까. 그래, 시뻘건 떡볶이를 하는 거다. 고추라는 게 꼭 한국에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조선 시대에는 고춧가루가 없어 새하얀 김치를 먹었다. 김치가 시뻘겋게 변한 건 일본을 통해 고춧가루가 들어온 이후였다. 고추만 있으면 재료는 다 괜찮을 듯도 한데, 주변 영지를 수소문해 고추를 찾아보자.

간장이 없으니 멸치로 진하게 육수를 내고··· 고추장을 만들기 힘드니 볶은 채소로 단맛을 내고··· 아니, 채소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그러면 꿀을 넣어볼까?

어떻게 떡볶이를 조리할지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영지에 도착했다.

내 집.

내 안식처.

나는 마차에서 내리며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아카데미에서의 내 목표는 비숏과의 관계를 풀고, 그녀가 다른 남주들과 이어지지 못하게 막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남들이 보기에는 그럴듯한 것들을 여럿 이루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내 성적.

검술학부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이미 영지를 소유한 귀족에게라면 조그마한 자랑거리에 불과했으나 아이작 가문은 검술을 숭상했다. 만약 수석을 차지한 이의 성이 아이작이라면 조그마한 자랑거리가 아니라 대단히 큰 자랑거리였다.

그다음으로는 내 교양 성적.

점수 따기 좋은 과목만 담은 덕에 만점이 수두룩했고, 평균 학점으로 본다면 아카데미 전체에서도 손꼽을 성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난 소드 익스퍼트에 올랐다.

앞서 이룬 두 가지를 가볍게 만드는 업적이었다. 검기를 완벽하게 다루는 진짜 소드 익스퍼트에는 못 미쳤으나 그래도 검기라 칭할 수 있는 기술을 펼칠 수 있었다.

내 나이 또래에 익스퍼트는 전무했고, 재능 있는 몇몇만이 나보다 서너 살 많은 나이에 익스퍼트 올랐다.

남들이 보기에는 내가 천재로 보일 거다.

이것만으로도 좁았던 가문에서의 입지와 낮았던 평판을 찢어버릴 수 있었다. 이건 나 혼자만의 감상이 아니었다. 봐라. 대문을 열어주는 코로망의 표정이 환하지 않은가. 얼굴에서 빛이라도 뿜을 듯했다.

“어서 오세요.”

코로망은 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내 도착과 함께 나를 반겼다.

“오랜만이네.”

“네,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코로망과 안부 인사를 나누며 저택 안으로 입장했다.

* * *

“왔네. 어쩔 거야?”

“어쩌기는···. 해보는 수밖에 없잖아. 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 진짜 익스퍼트에 올랐는지는 내 손으로 확인하겠어.”

“기사가 진짜면?”

제리코는 이블린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예전이었다면 막연히 그럴 리가 없다고 단언하며 자신감을 드러냈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카타리나는 명예를 중시했다. 그런 그녀가 라파엘이 익스퍼트에 올랐음을 기사를 통해 알렸다. 만약에 그 기사가 거짓이라면 카타리나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이다.

카타리나가 허락했다면 진실로 익스퍼트에 올랐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라파엘은 머저리였다. 재능 없는, 남들보다 느린 둔재이면서도 노력조차 하지 않는 버러지였다. 라파엘이 저택에서 지냈던 생활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랬던 놈이 사실은 누구보다 빠른 천재였고, 아카데미에서는 열심히 노력해 어린 나이에 익스퍼트에 올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제리코는 노력해왔다. 재능이 있다는 말도 몇 번이고 들었다. 흘린 땀의 양을 따진다면, 라파엘보다 족히 수십, 수백 배는 많은 거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익스퍼트라는 경지는 멀기만 했다.

‘네가 먼저 익스퍼트에 오르면 안 되는 거잖아!’

제리코는 늘 노력해왔다.

라파엘이 검술학부에서 수석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더욱 노력했다. 라파엘이 익스퍼트에 올랐다는 기사를 본 후에는 몸을 불태우듯 노력했다.

“만약에··· 놈이 진짜로 익스퍼트에 올랐다고 해도 붙어 볼 거야.”

제리코의 대답에 이블린은 한 박자 늦게 손으로 턱을 괴며 성의 없이 말했다.

“그래, 그러던가.”

이블린은 오답인 걸 인지하고서도 끝까지 나아가는 이들을 경멸했다. 헛수고인 걸, 멍청한 짓인 걸 알면서도 왜 구태여 멈추지 않는다는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간의 제리코가 노력해온 세월을 알고 있는 이상, 그를 말리기란 불가했다.

라파엘이 제리코보다 강해졌으니 그냥 포기해버린다면, 그간 제리코가 흘린 땀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검에는 눈이 없어. 하수가 고수를 이기는 건 모래알만큼이나 흔한 일이야.”

이블린은 이미 제리코가 라파엘을 고수라, 자신을 하수라 칭했다는 걸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제는 구경만 할 게 아니라 움직여야 할 때라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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