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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47화 (47/125)

제47화

내가 영지에 도착한 건 해가 쨍쨍할 때였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각이었으나 내 동생들은 나를 피하는 건지, 이미 저녁을 먹었다고 했다. 먼 거리를 이동한 직후라 그런지 나도 식욕이 떨어져 저녁은 평소보다 더 간소하게 먹었다.

“저택을 떠나시고 제가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모를걸요? 사실 아카데미로 도망치는 건 줄로만 알았어요. 그게 요 몇 달간 여기 사람들 눈초리가 따갑기는 했잖아요? 그게 싫어서 아카데미로 가는 줄 알았어요.”

“하하, 그땐 내가 많이 부족했지. 그래서?”

“그냥 그랬다고요. 근데 그게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으하하···.”

코로망을 말 그대로 싱글벙글했다. 가만히 있다가도 이따금 바보같이 웃었고,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잘했어요. 잘했어. 이렇게 잘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흐흐.”

저택에 도착하고서부터 지금까지 코로망은 내 주위를 서성거리며 칭찬을 건넸다. 몇 번이야 괜찮아도 자꾸만 이러니 내심 부담스럽기도 했다.

“내일 아침은 어떻게 준비할까요? 아, 기상 시간은 어떻게 하실래요? 그냥 일어나실 때까지 깨우지 말까요?”

“오랜만에 봤다고 너무 신경 써 주지 않아도 괜찮아. 잠은 내가 알아서 일어날게.”

“아. 네. 알았어요.”

내 대답에 코로망도 자기가 흥분했다는 걸 안 듯했다.

그녀가 넘쳐나는 기운을 주체하며 목소리를 줄였다.

그녀는 내게 이만 쉬라고 하며 멀어졌다. 그렇게 혼자 남았다. 이제 내일은 뭘 할까. 늘어지게 잠이나 잘까.

그러던 때였다.

식당에 제리코가 들어왔다.

그간 내가 수련한 만큼 제리코도 열심히 몸을 키운 듯했다. 원래도 컸던 덩치에서 한참은 더 커졌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컨디션은 나쁜 모양이었다. 어디 아픈 사람처럼 얼굴색이 노랬다.

그는 나를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애가 이러는 건 처음 봤다. 아카데미를 떠나기 전에는 본 척도 안 하더니 내 지위가 달라지긴 했구나.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카데미에서 많은 진전을 이뤘다고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어, 고마워. 너도 잘 지냈지? 몸이 더 커진 거 같다?”

“예. 아주 잘 지냈습니다. 훈련도 열심히 했고요. 저는 어릴 때부터가 기사를 동경했지 않습니까? 그 꿈이야 버렸어도 검은 한 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제리코는 내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빼내더니 마주 앉았다. 그만 침실로 올라가 쉬려 했던 터라 떨떠름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제리코는 두 손을 모은 채 느린 어투로 말했다.

“강해지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압니다. 익스퍼트가 어느 수준인지.”

“기사를 봤구나.”

“예, 이 저택에 사는 사람 중에 그 기사를 안 읽은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기사가 진짜인지? 내가 진짜 익스퍼트에 올랐는지?”

“예.”

“진짜야. 그러니까 기어오르지 마.”

원작에 라파엘은 제리코를 싫어했다. 동생이면서, 아버지로부터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했으면서, 형이고 가주였던 자신보다 강했던 탓이었다. 가주 자리를 빼앗긴 이후에는 증오하기까지 했다.

라파엘은 제리코를 싫어했다.

그럼 나는?

잘 모르겠다.

좋고 싫고를 떠나서 별 관심 없다는 쪽이 맞을 거다. 얼굴 본 횟수도 양손에 꼽을 정도고, 대화를 나눠본 건 그보다도 적었다. 별다른 감상이 있는 쪽이 어색했다.

제리코를 조심하고, 경계했던 건 그가 내 영지를 노렸기 때문이었다.

그것뿐이었다.

그가 순순히 영지를 포기하고, 마음을 깨끗이 접는다면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안타깝게도 제리코는 조금 다른 듯했다. 그는 두 눈을 빛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제가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익스퍼트에 올랐는지를? 네가?”

“예.”

“어떻게?”

“어릴 때는 종종 대련했죠. 제가 형님보다 훨씬 작아 형님이 수월하게 이길 수 있을 때까지는요.”

“미안. 그땐 내가 유치했었네. 그래서? 한 판 붙자고?”

“예.”

잠깐, 제리코를 노려보았다.

그가 영지를 포기한다면 다 없던 일로 할 수 있었다. 그가 벌이려 했던 사건이나 계획 따위 묻어둘 수도 있었다.

혹시라도 이 침묵 동안 제리코가 욕심을 내려두지는 않을까 기대해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나 제리코는 확고한 듯했다.

이건 밟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 그러자. 하는 김에 사람들도 좀 부르고.”

아이작 가문은 무가였다. 명목상이나마 가장 강한 자가 가주가 된다는 구시대적인 가법이 남은 가문이었다. 내가 진다면, 특히 피를 나눈 형제에게 패배한다면 체면이 깎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오래오래 사람들의 이름에 오르내릴 거다.

그 위험을 감수해가며 제안하자 제리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먼 거리를 와서 그런지 좀 피곤하네. 내일은 늦게까지 잠잘 거 같은데, 중식 이후로 해.”

“기다리겠습니다.”

내게 인사하고 멀어지는 제리코를 보며 다짐했다.

죽이지 말자.

너무 다치게는 하지 말자

적당히 하자.

그에게 원한이 있는 게 아니었다.

다시는 가주 자리를 꿈꾸지 못할 정도로만 눌러주자.

이제는 식당에서 침실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와서 그런지 오늘따라 손님이 많았다. 이블린이 벽에 기대서서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는 눈이 마주쳐도 지나치더니 반듯하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 왜? 할 말 있어?”

“이미 아시는 사실이니 솔직하게 고하겠습니다. 제리코는 영지를 탐냈습니다. 그가 죽을죄를 지었음을 압니다.”

나는 계속해보라는 듯 눈만 깜빡였다. 이블린은 눈치껏 말을 이었다.

“살려주십시오.”

이블린은 피를 나누었니 어쩌니, 감성에 호소하지 않고 짧게 요구했다. 제리코를 살려달라고. 아무래도 내가 그를 죽일 줄로만 아는 듯했다.

하긴, 내일 결투 자리는 제리코를 죽이기 제법 괜찮은 자리였다.

날을 세우지 않은 검을 쓰더라도 내가 쥐면 명검이 된다. 제리코의 목을 어렵지 않게 벨 수 있었다. 이전에 라파엘은 제리코를 몹시 미워했으니 이번 기회에 죽이려 들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블린이 담백하게 제리코를 살려달라 말한 건 아마 거래를 위해서인 듯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눈물을 흘리는 척 연기라도 해가며 형제라는 걸 강조했을 것이다. 이토록 간솔하게 말하는 걸 보아하니 내게 내줄 게 있는 듯했다.

내가 왜 제리코를 살려줘야 하는지 따진다면, 거기에 가져다 댈 대답은 준비해뒀을 거다. 지금 이블린 혹은 제리코가 준비할 수 있는 것 중 으뜸으로 값진 것을 내놓겠지.

그런데, 그게 내게 쓸모가 있을까?

돈이라면 풍족했다. 이제 영주 자리도 확고히 다질 것이다. 그렇다면 제리코와 이블린이 내게 뭘 해줄 수 있나?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없다시피 했다.

“좋아. 제리코를 살려두지. 그리고 이건 빚으로 달아 놓을게.”

몇 단계를 건너뛴 내 대답에도 이블린은 반문하지 않았다. 곧바로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이블린은 숙였던 머리를 다시금 들었다.

“사실, 고백할 게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숨기고 싶지만, 숨길 수 없음을 압니다. 다 아실 텐데, 연기한들 가증스럽기만 하겠죠. 예···. 저도 제리코를 돕기로 약조했습니다.”

“그래서?”

배신했다는 걸 고백했음에도 내가 가볍게 넘겼으나 이블린은 놀라지 않았거나 놀라지 않은 척했다. 그녀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일 대련이 끝나고, 제 보물과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아마 만족하실 겁니다.”

* * *

라파엘과 제리코의 대련은 명목상 무가에서 자란 두 형제의 교류에 불과했다.

그들이 사용할 칼의 뭉툭한 칼날은 생선 대가리 하나 자르기도 버거웠다.

칼이라기보다는 철 막대기에 가까운 것을 들고 겨루니, 결투라 부르기에는 한 참 부족했다.

하지만 저택에 몇몇 고용인을 제외한 모두가 둘의 대련을 보러 모습을 비추었다.

가장 강한 자가 영주가 된다.

그 멍청한 가법이 오늘 힘을 발하리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오늘 대련에서 패배한 쪽은 저택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음을 인지했다.

저택에 구비 된 연병장.

그 위에서 라파엘과 제리코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여유롭기까지 한 라파엘과는 달리 제리코의 상태는 열악했다.

제리코는 지난밤 한숨도 자지 못해 축 늘어지는 몸을 이끌며 라파엘을 향해 걸어갔다. 어느 때보다도 컨디션은 최악에 가까웠지만,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련의 승패는 자신의 손에 달린 게 아니었다.

라파엘이 소드 익스퍼트에 올랐다는 기사가 거짓이라면 자신이 이길 거고, 기사가 진실이라면 패배할 것이다.

제 몸에 컨디션 따위야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기사의 내용은 아마 진실일 거야.’

제리코는 카타리나를 존경했다.

젊은 나이에 소드 마스터라는 하늘에 닿은 검술 실력을 제하고도 그녀가 걸어온 행보에 감동했다. 가난한 집안과 부족한 환경 속에서 끝끝내 꽃피었고, 꼿꼿했던 그녀가 사기를 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도 고작해야 자기 제자의 실력으로.

재능 없고, 노력해본 적 없는 라파엘이 몇 달 만에 익스퍼트에 올랐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있을 수 없는 일을 이룬 카타리나의 증언이라면 믿기에는 충분했다.

그렇다면 제리코는 왜 이번 대련을 제안했고, 고집을 부렸을까.

이것만을 위해 살아왔다. 영주가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니, 영주가 되지 못한다면 죽고 싶었다.

“날이 좋습니다.”

“그러게.”

하늘을 올려다보니 퍽 화창했다.

차라리 비라도 왔으면 좋았으련만. 그랬다면 이렇게 구경꾼들이 몰려오지 않았을 텐데.

제리코는 주변을 둘러다 보았다. 다 아는 얼굴이었다. 다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이제 어떡하지? 라파엘이 진실로 익스퍼트에 올랐다면 어떡하지? 어릴 때부터 수년간 봐온 사람들 앞에서 굴욕을 당할까? 라파엘이 자기를 죽일까?

모르겠다.

그저 빌자.

라파엘이 익스퍼트에 올랐다는 게 거짓이기를.

제리코는 대련을 준비하며 칼의 손잡이에 손을 얹자 움찔거리며 놀랐다. 칼이 자신을 향해 등신이라고 욕하는 것만 같았다. 그럴 거면 칼을 왜 잡았냐고.

이미 연병장에 나설 때부터 승패는 정해져 있었다.

라파엘이 익스퍼트에 올랐냐, 혹은 아니냐가 결과를 정했다. 그러니 제가 열심히 싸운들, 대충 싸운들 바뀌는 게 없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칼을 휘둘러왔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지금 제가 하는 짓거리가 그 기억을 모욕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하기로 했다.

상대가 익스퍼트라 해도 최선을 다하도록.

“푸핫.”

이블린이 듣는다면 며칠을 두고 갈굴 것이다. 질 걸 알면서도 왜 싸워? 질 걸 아는데 왜 구질구질하게 굴어? 그냥 항복해버리면 되잖아.

다 맞는 말이었지만, 그냥··· 그러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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