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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48화 (48/125)

제48화

상대를 보자마자 수준을 파악하는 눈썰미 같은 건 없어도 몸으로 뿜어내는 마나를 볼 수는 있었다.

제리코는 내게 과시하듯 마나를 뿜어댔다. 대련을 길게 할 마음이 없다는 듯 시작부터 마나를 갈아 넣었다.

푸른 아지랑이가 그의 몸을 타고 아른거렸다. 뿜어내는 마나의 양이 제법이었다.

라파엘을 상대로 필승을 자신할 만했다. 라파엘같이 나약한 놈이 아니라 웬만한 기사라도 제리코를 상대로 버티긴 힘들 듯했다.

무가에 태어난 귀족인 덕에 남들보다 빨리 마나를 접했다고 해도 많은 양이었다.

나도 그렇고, 쟤도 마나가 많은 걸 보면 아이작 가문은 칼이 아니라 마법을 배웠어야지 싶을 정도. 레오와 비교하자면 서너 배는 많지 않을까?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마음대로.”

내가 소드 익스퍼트에 오르며 마련된 대련 자리였기에 또다시 시험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불쾌했다.

또 자칫 힘 조절을 잘못해 제리코를 죽일 수도 있는 탓에 검기는 꺼내 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리코가 칼을 들어 올렸다. 빛을 받은 칼끝이 번쩍였다.

나는 배우다 말았지만, 아이작 가문 고유의 검술이란 게 있었다. 많은 마나를 타고나는 가문, 자연히 그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게 검술이 발전했다. 마나를 통해 강한 힘을 손에 쥐고, 적의 급소를 노리는 게 아니라 상대의 무기를 노린다.

제리코는 제가 평생을 연마한 검술을 실행했다.

오른발을 한걸음.

그는 전진하며 무게중심을 축발에 실은 채 회전했다.

원심력을 실은 검은 매섭게 다가와 내 검을 때렸다. 아이작 가문의 검술은 이후 상대의 반응에 따라 다른 검초로 이어졌다.

상대가 충격을 버티지 못해 검을 놓치거나 자세가 무너지면 목을 베었다. 몸의 균형이 흔들렸다면 한 번 더 온 힘을 실은 검격으로 확실하게 승기를 가져왔다.

그러나 상대가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받아냈을 경우는 상정하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상대일 때. 서로의 수준이 맞지 않을 때나 생길 일이었다. 이 경우에 답은 도주뿐이었다.

째애애애앵!

서로의 검이 부딪히기 직전까지 무방비하게 서 있었다.

제리코의 검과 맞닿기 직전에야 움직이며 검을 휘둘렀다. 체중도, 원심력도 싣지 않은 완력만으로 휘두른 검격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튕겨 나간 건 제리코의 검이었다.

두 검이 충돌한 직후, 정지한 내 검과는 달리 제리코가 쥔 칼은 크게 흔들렸다.

제리코는 검을 놓칠까 손잡이를 억세게 잡았다.

검과 함께 몸에서 훌쩍 멀어진 팔꿈치와 손을 끌어당겼다, 그는 휘청이며 두 걸음이나 후퇴했다.

제리코의 동공이 홍채에 점을 찍은 크기로 수축했다. 그는 얼굴을 구기며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끽해야 한 번의 충돌이었으나 검술에 문외한이라도 나와 제리코의 수준 차이는 알 수 있었다. 아니, 아이작 가문은 무가였다.

설령 검을 잡지 않더라도 검술을 보는 눈이라면 누구나 탁월했다. 대련을 관전하는 모두가 확신했다.

제리코의 패배였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걸 제리코라고 모를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금 자세를 잡았고, 싸울 준비를 했다.

더 무겁고, 더 크게. 빈틈을 내보이더라도 상대의 자세를 부술 수 있게. 승리의 파편이라도 잡기 위해.

양발의 간격은 어깨보다 조금 넓게. 활을 쏘듯 몸을 긴장시키고, 검을 잡아당긴다.

폐 깊숙이 산소를 밀어 넣고, 호흡기를 닫았다. 그렇게 공기를 몸에 저장한 후. 내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아악!”

제리코는 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마치 벼락이 떨어지듯 흉악한 검격이 나를 노리고, 낙하했다.

나는 그것을 툭 쳐냈다. 발경의 묘리를 사용한 반격이었으나 남들이 보기에는 손목 힘만으로 걷어낸 것처럼 보일 거다.

제리코는 밀려났다. 그는 두 눈을 부라리며 이를 갈았다.

제리코는 전력을 다해 공격하고, 나는 가볍게 방어한다.

이 과정을 몇 번인가 거쳤다. 똑같은 공방을 반복했다.

제리코는 점점 더 숨을 거칠게 쉬었다. 그의 검으로부터 체력이 다해간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가 검을 쥔 손은 점점 더 힘이 떨어졌다.

“하악! 하악!”

가만히 서 제리코의 다음 검격을 기다린다. 제리코는 언제쯤 항복할까. 기세를 보아하니 차라리 지쳐 쓰러지는 쪽이 빠를 듯했다. 어느 쪽이 됐건 간에 그리 멀지 않았다.

제리코가 눈썹을 찡그리자, 안구 주변 근육이 함께 움직이며 이마에 주름이 졌다. 그는 단내가 나는 입으로 말했다.

“왜 그렇게 강해?”

애가 미쳤나 보다. 주변에 보는 눈이 몇 개인데 말을 낮췄다. 그는 남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렇게 강하면 안 되는 거잖아. 지가 뭐 얼마나 수련했다고. 내가 몇 배는 더 열심히 했는데. 이건 불공평하잖아.”

“항복할래?”

제리코를 배려해서 권유했으나, 그는 이를 도발이라 여긴 듯했다. 안구 근육 주변이 일그러졌다.

“흐으읍.”

제리코는 산소를 빨아 마셨다. 공기가 그의 폐부 깊숙이 들어가고, 흉통이 확장한다.

“으아아아악!”

그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왔다.

땀에 축 젖어 얼굴에 달라붙었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쿵! 쿵! 쿵!

그가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땅이 울렸다.

그는 전력을 다해 검을 내리쳤다. 교본 같은 수직 베기.

째앵!

전에 했던 동작 그대로, 전보다 강한 힘으로 받아냈다. 서로의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잠시 잡아당겨 충격을 흡수하고 발경의 묘리를 더 해 튕겨냈다. 공격에 모든 걸 쏟아부은 제리코는 그대로 나가떨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제리코는 일어나지 못했다. 입안에 들어간 흙이 깔끄러운지 바닥에 침을 뱉었다.

“하악! 하악!”

그는 검도 내팽개친 채 하늘을 보며 숨을 헐떡였다. 더는 싸울 기력도 없는 듯했다.

“이쯤에서 끝내지.”

“아직 안 끝났어. 누구 맘대로.”

제리코는 칼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다리가 풀렸는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 맘대로. 결투도 아니고 대련 가지고 비장하긴.”

제리코를 남겨둔 채 저택 안쪽으로 이동했다. 구경꾼들은 눈치껏 흩어졌다. 연무장에는 제리코만이 남았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혼자 우는 듯했다.

* * *

대련을 끝내고 씻은 후에 의복을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은 후에야 또 한 번 큰 짐을 내려놨다는 게 실감 났다.

예상외로 빠른 성장에 제리코야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걸 알았지만, 그래도 끝을 보고 나니 마음이 가벼웠다.

천장을 본 채로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잠시간 방에서 쉬고 있으니 문 앞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블린의 목소리였다. 허락하자 이블린이 입장했다. 그녀의 손에는 반지가 둘 놓여 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막 빙의한 직후에 라파엘은 몸에 온갖 장신구를 끼고 있었다.

그게 답답해 다 풀어내며 반지 하나를 코로망에게 주었다.

그때 내가 코로망에게 줬던, 푸른 센터 스톤이 박힌 낡은 반지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이블린을 마주봤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내게 두 반지를 내밀었다. 같은 디자인에, 박힌 보석만이 각각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다른 반지였다.

“돌려드리기 위해 찾아뵙습니다.”

“그거를? 왜?”

“그야 원하실 테니까요.”

“아니···. 괜찮은데? 그리고, 그걸 네가 왜 가지고 있어? 너한테 준 게 아닌데.”

“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당황하지 않던 이블린이 입을 헤 벌리고 눈만 깜빡거렸다. 뻐끔뻐끔 입을 여닫더니 말했다.

“이걸, 하녀장한테 진심으로 줬다고요? 그게 진심이었다고요?”

“어. 그게 왜?”

이블린의 두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리고 그보다도 2배쯤 큰 크기로 입이 쩍 벌어졌다.

“이건 어머니의 유품이잖아요!”

누가 뜨거운 커피를 마시다 내 바지에 쏟은 듯했다. 화끈한 충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아! 그래서였구나!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는 했다.

낡은 반지일 뿐인데 코로망은 과할 만치 조심스레 반지를 다루었다. 어쩐지 딱 봐도 비싼 것들 사이에 유달리 눈에 띈다 싶기도 했다.

반지에 무슨 골동품적인 가치가 있나 보다 하고 넘겼다.

그게 아니었다.

반지에 그런 뒷사정이 있었구나!

꿈에도 상상 못 한 이야기를 마주하니 뇌가 정지했다.

이걸 뭐라고 변명할까? 어머니의 유품을 까먹고 남 줬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돌발 사고에 터질 기세로 심장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여기서 말을 고른다고 입을 다물고 있는 쪽이 오히려 더 수상하다. 나는 혀부터 움직였다.

“알아. 반지를 넘겼던 건 그때 내 사정이 난처해서였을 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그걸 취할 권리는 없지.”

“코로망이 줬어요. 자기가 가질 물건이 아니란 걸 알았겠죠! 가주께서는 진심으로 하녀한테 어머니의 유품을 넘길 생각이셨나요?”

“아니.”

뭐라고 변명할지 망설이며 잠자코 있자 이블린은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녀는 언제 흥분했냐는 양 호흡을 추스르며 심호흡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과했던 듯합니다.”

“괜찮아. 상황이 오해할 법했으니까. 내가 따진 건 네가 내게 상의도 없이 반지를 취했다는 거였어.”

“예, 이해합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갖고 싶었으면 내게 말부터 했어야지.”

이블린의 광대뼈가 실룩였다. 그녀는 말하기를 꺼리며 망설이더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갖고 싶다고 말했으면 주셨을 겁니까?”

“물론이지, 칼을 휘두르는데 그런 장신구가 얼마나 불편한지 너는 모를 거야. 내가 가지고 있어 봐야 장식장에 모셔두기밖에 더하겠나?”

내 말에 이블린은 다시금 입을 닫았다.

지금 반지를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님을 알 거다.

하지만 내가 언제까지 영지에 있을 거란 보장이 없었고, 언제 또 내 마음이 바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뜸 들이더니 말했다.

“주신다면 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미 빚을 졌는데, 더 큰 빚을 질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제가 어떡하면 좋을까요?”

“나중에 갚아.”

“원하시는 걸 끝까지 드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

저 낡은 반지에 무겁디무거운 사연이 있는 줄 알았다면, 그리 가볍게 다루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심 이블린에게 미안했고, 반지에 아무 감상도 없는 내게 넘기려 하니 멋쩍은 구석도 있었다.

물건의 가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이블린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석을 조금 예쁜 돌멩이로 보는 내가 받을 수는 없었다.

“예···. 그럼 반지는 제가 갖도록 하겠습니다.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언제라도 말씀해주십시오.”

이블린은 반지를 챙긴 후에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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