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다 끝났다.
이제 내 영지는 안전했다. 비로소 내 집이라 할 수 있었다. 집이란 건 그저 사람 사는 장소가 아니었다. 마음의 안식처이자 보금자리. 모든 짐을 내려놓고 안락함에 푹 안길 수 있어야만 집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 이 영지는, 이 저택은 내 집이었다.
오늘은 뭘 할까? 집을 장만한 기념으로 특별한 일을 하고 싶었다.
나는 아침을 가볍게 먹은 후 주방장을 찾아갔다. 식사 직후에 주방장을 찾아가니 그는 기겁했다. 라파엘이 아침 식사가 마음에 안 들었다고 꼬장을 부린 적이 있는 듯했다.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가 조마조마했다.
일단 그를 안심시키고 보자고 덕담을 건넸다.
“아침 잘 먹었어. 언제 먹어도 느끼는 건데, 솜씨가 좋네. 아카데미에서는 자네가 해준 밥을 못 먹는다는 게 아쉬울 정도야. 요리에 비결이 뭐야?”
“아무래도 영주님께서 좋은 재료를 공급받을 수 있게 배려해주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아부에 억지로 웃음소리를 냈다.
“아아. 그래. 항상 만족스런 식사를 해줘서 고마워.”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고추라는 거 알아?”
난 주방장이 모른다고 할 줄만 알았다. 그가 모른다고 답하면, 고추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혹 내 설명과 비슷한 식재료가 없는지 물어보려고만 했다. 꼭 고추가 아니라도 비슷한 맛이나 색을 낼 수 있다면 괜찮았다.
놀랍게도 주방자의 입에서 기대했던 대답이 나왔다.
“네. 알죠. 알알하고, 맵싸한 맛이 나는 식재료지 않습니까?”
“알아? 와, 잘됐네. 혹시 그러면 고추를 따로 구할 수도 있을까? 가능하면 다양한 종류로.”
“예, 뭐…. 가능은 합니다만, 어디에 쓰시려는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내가 먹고 싶은 게 있어.”
“아, 그러시다면야 제가 마땅히 해드려야죠. 드시고 싶은 음식이 뭡니까?”
“아니, 아카데미에서 먹었던 건데 먼 곳에서 온 음식이라 하더라고. 주방장이 하기는 어려울 거야.”
“그렇다면 혹시 직접 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응. 그게 왜?”
주방장은 눈썹을 좌우로 꿈틀거리더니, 어색하게 납득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다양한 종류로 준비해 놓겠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니 잠시만 기다리시죠.”
주방장은 2시간이 걸려 여러 종류의 고추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내게 고추를 내밀며 설명했다.
“시장에서 사람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쪽 지방에 고추가 유행한 지 얼마 안 됐다고들 합니다. 원래는 저 먼 쪽 지역에서나 먹는 음식이었죠. 매운맛이란 게 흔히 독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먹을 거 없는 아인종이나 먹는 것이었죠.”
“아아.”
“그래서 그런지 시장에 풀린 양이 적었습니다. 가격이 제법 비싸던데, 고추를 산다고 돈을 많이 써서 말입니다. 이번 달 식비는 감축할까요?”
“아니야, 고추의 값은 내가 따로 줘야지.”
“감사합니다.”
그에게서 고추를 받고 주방으로 이동했다. 내가 뭔가를 하려는 기색이 불편했는지 혹은 나를 배려했는지 주방은 텅 빈 상태였다. 화재 시에 꽝꽝 울리는 벨이 뽀득뽀득 닦여있는 걸 보아하니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듯 했다.
하기야, 평소에 주방 출입 안 하던 놈이 먹고 싶은 게 있다고 돌연 칼을 쥐고 냄비를 들었으니 사고 터지기 딱 좋았다. 조심하자….
나는 3종류의 고추를 쥔 채 고민했다. 셋 모두 시뻘건 게 보기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돌았다. 그럼 이 중에서 무슨 고추를 사용해 떡볶이를 만들까.
“흐음….”
유심히 둘러보던 중에 가장 작고 주름진 품종을 선택했다. 생긴 걸 보아하니 빻아 가루로 만들기 쉬울 듯했다. 주방장의 설명에 따르면 맵기로는 이게 제일이라 하니 맛도 좋을 것이다.
돗자리를 펴 거기에 고추를 깔고 햇빛에 말렸다. 점점 수분을 잃어가는 저것들을 보며 어떻게 빻아야 할지 고민했다. 고춧가루의 색을 위해서도 씨를 빼는 건 확정이다. 문제는 그 후. 어떡해야 저걸 잘 빻을 수 있을까.
고민은 말린 고추를 주방에 가져가 씨앗을 뺄 때까지도 이어졌다. 어떻게 빻아야 할까.
내가 손이 멈춘 채 가만히 있자 저 멀리서 나를 보던 주방장이 다가왔다. 흡사 어린애가 뭔가 사고를 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듯해 창피했지만, 참았다.
“영주님, 혹시 제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이걸 좀 빻아 가루로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방앗간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예….”
주방장은 황당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영지민들은 의무적으로 영주 소유의 방앗간을 이용해야 하는데, 이때마다 이용료를 낸다고 했다.
아주 기초적인 상식이었기에 나는 깜빡한 척 능청스레 그랬었지, 하고 넘어갔다.
말린 고추를 들고 움직이며 라파엘에게 빙의해 차라리 다행이라고 느꼈다. 영주가 어리숙해도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는 영지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코로망이 있어 행복했다.
방앗간에서 고추를 빻았고, 주방으로 돌아가 떡볶이를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멸치를 우린 육수에 방앗간에서 빻아온 고춧가루를 부었다. 물엿 대신에는 꿀을 사용했다. 단내와 캑캑 기침 나는 매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양념을 저어 섞었고, 채소와 함께 떡을 부었다. 오늘 채소에는 파가 많았다. 내가 파를 좋아하는 탓이었다.
밀떡은 쌀떡에 비해 식감에 퍽 아쉽다. 그래도 장점이 있었으니 떡이 양념을 더 잘 먹었다. 빨갛게 물들어가는 떡을 보고 있으니 왈칵 침이 솟았다.
그렇게 떡이 바닥에 달라붙지 않게 저어주고 있는데, 코로망이 황급하게 다가왔다. 냄새를 맡고 그녀도 식욕이 돌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손님이 왔어요!”
“지금?”
“예….”
기별도 없이 무턱대고 온 걸 보면 예의가 있는 놈은 아니었다. 그러나 코로망이 자기 선에서 처리하지 않고, 다급하게 알리는 걸 감안하면 잡상인도 아니었다. 내가 알아야 할 손님이란 건데, 대체 누가?
그 손님이란 놈을 보러 가기 전에 떡을 하나만 시식하고 싶었지만 인내하며 말했다.
“그 손님이 누군데 그래?”
“믿기 어렵지만…. 자기를 마탑주라 해요! 내쫓으려 했으나 손에서 마나를 뿜어내는 기세를 보아하니 진실일 수도 있다 싶어요!”
“아.”
“누군지 아시겠어요? 들여보내도 될까요?”
“어, 내 친구일 거야. 아마.”
* * *
코로망의 말에 정문을 향해 가니 이안이 서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네. 얼굴을 보아하니 잘 지냈나 봐.”
“어, 잘 지냈지. 너는?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무탈해.”
“건강하게 만나서 다행이다. 배는? 점심 먹을 시간인데….”
“아직인데, 허기지지는 않아.”
“밥은 배고플 때 먹는 게 아니라, 먹을 때에 먹는 거야. 가자.”
나 홀로 먹으려던 떡볶이에 같이 먹을 상대가 생겼다. 배가 터지도록 먹으려 요리해 양은 넉넉했다. 이안을 주방 쪽으로 이끌었다. 이안은 여기저기를 은근히 둘러보며 나를 따라 들어왔다.
접시에 떡볶이를 덜어주자 이안은 음식과 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이게 뭐야? 접시에 담았으니 음식 같기는 한데”
“떡볶이. 맛있어. 먹어봐.”
이안은 포크로 떡을 찍어 입에 넣었다. 떡이 예상보다 뜨거웠는지 움찔하더니 끝끝내 씹어 삼켰다.
“맵다.”
“어. 매운 음식이니까. 맛은 어때?”
“아주 맵다. 아주 많이. 후우….”
다행히 맵게 잘 된듯했다, 그의 감상에 안심하며 나도 한 입 떡을 넣었다. 입술에 소스가 묻지 않게 입에 쏙 넣고 씹었다.
감상은… 이안과 똑같았다. 매웠다. 아주 매웠다.
아악! 아악!
라파엘은 맵찔이였다!
떡볶이의 맛 자체야 좋았다. 현대에서 먹던 그 맛과 퍽 비슷했다. 몹시 만족스러운 떡볶이였다. 하지만 라파엘의 혀가 이를 거부했다. 떡을 한 입 먹자마자 몸에서 열이 오르고, 땀을 뿜었다.
그래도 먹을 거야.
힘겹게 마련한 떡볶이였다. 포기할 수 없다. 매운맛을 버티기 힘든 것과는 별개로 떡볶이의 맛 자체는 출중했다. 이를 남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악! 흐악!”
내가 떡볶이를 마저 먹자 이안도 눈치를 보더니 식사를 재개했다.
우리는 땀과 눈물을 쏟으며 떡볶이를 먹어 치웠다. 떡을 하나 씹어먹은 후 잠시간 쉬었고, 서로 식사 예절 따위야 안중에도 없이 그릇에 양념을 바르며 하나씩 떡을 먹었다.
고향의 매운맛에 눈물이 줄줄 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이 걸려 떡볶이를 모두 먹어치운 후, 이안이 말했다.
“디마겐을 죽였다.”
“그렇구나.”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쳤다. 떡볶이의 매움에 앓고 있는데,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놀라지 않는구나.”
“어. 어. 죽인다고 했었잖아. 그러니까 네가 보이자마자 아, 이미 죽였구나 싶었지.”
“그런가….”
“소감은? 그렇게 바랐던 일을 이룬 거잖아. 생각했던 것만큼 통쾌해?”
“네가 듣는다면 소름이 돋을 만큼 잔인하게 죽였다. 그리 하면 통쾌할 줄 알았지.”
“어떻게 죽였길래 그러는데?”
꼭 알 필요는 없는 정보였지만, 퍽 궁금했다. 어쩌면 이안의 손에 죽는 게 디마겐이 아니라 내가 될 수도 있었다. 비숏과 이안이 이어졌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이미 피해간 미래였지만. 피하지 못했다면 어찌 됐을지 알고 싶었다.
이안은 디마겐을 죽인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듣고 있으니 어우, 아으, 으으, 절로 신음이 나왔다.
-그 새끼를 어떻게 쳐 죽여야 할까?
누나가 했던 말이었다. 아아. 이안은 사람을 이렇게 쳐 죽이는구나. 애랑 친구 해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구나. 그렇게 죽였구나.”
“더러운 이야기는 이쯤에서 관두자. 그럼 대접도 받았으니 이제 확인해볼까? 내가 아카데미를 떠나고 네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한번 보자고.”
“열심히 했지.”
“그 성과를 보자고.”
“어떻게?”
“공격해봐. 마음대로.”
싸워보자는 제안이었다면 바로 거절했을 거다. 자칫 잘못해서 한 대 스치기라도 하면 아플 게 아닌가? 하지만 이안은 자기를 마음껏 공격해보라 했다. 반격한다는 말도 없으니 마음 놓고 때릴 수 있을 거다.
“그런 거라면 좋지.”
나는 이안을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마법을 겨루다가 주변 건물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 외지 쪽으로 이동하니 이번에도 연무장이었다. 제리코와 싸웠던 그 장소.
이안은 두 팔을 벌리며 아래쪽으로 늘어뜨렸다. 소매가 긴 옷이 그의 손을 가렸다.
“공격해봐. 내 걱정은 말고.”
마법을 봐주겠다는데 사양할 필요 없는 제안이었다.
마나를 방출한다. 연기처럼 밀도 낮은 마나를 주변에 풍겼다. 언제라도 마탄으로 변환할 수 있게 준비한 후 이안을 살폈다. 내 공격에 전혀 대비하지 않는 무방비한 모습. 기다릴 것도 없이 곧바로 마탄을 발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