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마차에서 내려 잉그레드에 발을 디뎠다.
딱딱한 바닥에서부터 냉기가 솟았다. 잔잔한 한풍은 돌가루가 섞인 듯 날카로웠다. 숨을 들이쉬니 호흡기가 어는 듯했다.
말로만 듣던 지독한 추위에 외투를 하나 더 걸쳤다.
아가레스가 내 방문을 일러두었는지 병사들은 나를 보자 기계처럼 진행했다.
그들은 몇 가지를 기록하고는 나를 영주 성 내부로 이끌었다.
그들의 뒤를 졸졸 따라 걸으며 군복을 훑었다. 상비군이라는 티가 좔좔 흘렀다.
대개 북부대공이라면 꼭 하나씩 가지고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아가레스도 물론 가지고 있었는데, 면세 혜택까지 있으니 돈이라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 돈을 군에 투자한 듯했다. 병사들의 장비 질이 좋았다.
잉그레드는 땅이 몹시 넓으면서도 농사를 짓는 게 어려웠다.
추위야 호밀이나 감자 따위를 심어 넘길 수 있었지만, 땅에 내린 저주에 작물이 버티지 못하고는 했다.
잉그레드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풀 때기는 잡초뿐이었다.
이에 식량을 다른 곳에서 들여왔는데, 고기만큼은 자급하려 시도했다.
영지는 거대한 목장을 만들어 짐승을 방목하는 식으로 관리해 고기를 얻었다.
병사를 따라 걸어 영주성 내부에 입장했고, 곧 아가레스의 알현실에 도착했다. 병사는 내게 묵례하더니 제 일을 하러 떠났다. 난 아가레스의 방문을 두들겼다.
“들어오게나.”
문을 열고 입장했다.
아가레스는 커다란 철갑옷을 입고 있었다.
본래 아가레스는 남들보다 체구가 컸는데, 갑옷까지 걸치니 거인 같은 풍모가 있었다.
갑옷의 양 끝에는 견장까지 붙어 어깨에 머리가 5개는 들어갈 듯했다.
“반갑습니다. 약속을 지키러 이렇게 찾아뵙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네. 먼 곳에서 찾아온다고 수고가 많았어.”
아가레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학기가 끝나고도 날이 제법 지났는데 그간 잘 지냈나?”
“예. 뭐. 이루려던 일은 모두 이루었습니다.”
“그거 잘됐군.”
나는 아가레스에게도 안부 인사를 물은 후에 궁금했던 것을 입에 올렸다.
”네···. 그런데 왜 갑주를?”
“나도 다치면 아프니까. 아픈 건 누구나 싫은 법이지.”
싸우러 갈 때면 몰라도 왜 이곳에서까지 갑옷을 차고 있냐는 질문이었지만, 구태여 따지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레 화제를 옮기려 말했다.
“대공님, 당시에 저희가 나눈 약속은 제가 토벌을 돕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상세한 사항은 정해두지 않았었죠.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흠···.”
아가레스는 턱을 붙잡은 채 내가 입은 복장은 훑더니 말했다.
“옷부터 갈아입게나. 갑옷으로 환복하고 외투를 걸쳐.”
“예.”
아가레스는 곁에 시종을 시켜 내게 방 하나를 내주었다. 시종을 따라 걸으며 주변을 곁눈질했다.
내가 예상한 것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명목상 내가 토벌을 돕는 것은 맞으나 적어도 첫날 정도는 그가 손님으로 맞을 줄 알았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토벌을 준비한다니 예상보다 험난했다.
나는 따로 챙겨온 갑옷을 입었다. 늘 그렇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법이라 누가 들이박아도 다치지 않게 튼튼한 갑옷을 챙겨왔다.
준비는 언제나 철저해야 했다.
이를 입고는 바람 정도는 막아줄 바람막이를 둘렀다. 갑옷이 크다 보니 이보다 두터운 것은 활동하기 불편했다. 갑옷을 입은 후 아가레스에게 돌아갔다.
아가레스는 책상머리를 손끝으로 톡톡 두들겼다.
“가져온 옷은 그게 전부인가?”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이거보다 두터운 건 움직이기 힘들어서요.”
“흐음···. 그래 뭐 알겠네. 그럼 이리 와서 앉게나. 내가 일정을 일러주겠네.”
아가레스는 단대호를 사용한 지도를 통해 각 진지와 마물 혹은 마족이 있을 만한 곳을 교육해 주었다.
그 내용이 아주 상세해 꼭 나도 교전에 참여할 것만 같았다.
“먼 곳을 온다고 피곤할 테니 오늘은 이만 쉬게. 토벌은 내일부터일세.”
그의 설명을 다 들으니 아무래도 망한 듯했다. 나도 싸워야 할 성싶었다.
아니, 함께 토벌을 하러 온 건 맞지만, 내가 그렸던 그림은 나는 들러리처럼 옆에 있는 것이지 본격적으로 토벌에 뛰어든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가레스는 병사를 소모하기 아까워 해 상당수의 전투를 홀로 치러 왔으니까.
이는 원작과는 다른 전개였다.
그렇다고 이걸 따지고 들 수도 없는 처지.
나는 그에게 수긍한 척 고개를 끄덕이고 아가레스가 내어준 방으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방이 많았는데, 그중 손님 맞을 준비가 된 곳은 하나였다. 성의 규모에 비해 시종의 수가 적었다.
나는 고춧가루를 구석에 내려둔 채 침대에 누워 휴식했다.
* * *
그러다 꾸벅, 잠이 들은 나는 밤중에 배가 고파 눈이 떠졌다.
“뭔, 여기는 손님에게 밥도 안 주나. 아니… 난 손님이 아닌가.”
나는 가져온 육포 조각을 씹고는 아가레스를 찾았다. 그는 홀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왜? 잠이 오지 않나? 자네도 한잔하겠나?”
주량은 작아도 숙취는 없는 몸이었다. 그러나 내일 칼을 휘두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 거절했다.
그는 아쉬운 척도 하지 않고 자작했다.
“대공님께서는 홀로 거대한 마물을 대적한다고 들었는데, 토벌 시에 많은 병사를 이끄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가레스는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을 펼쳤다.
검은 힘이 스멀스멀 올라와 술잔을 쥐고 흔들었다. 원을 그리며 술잔의 내용물이 출렁였다.
“이 힘. 내가 원해서 얻은 거지만 썩 좋은 게 못 돼.”
“예?”
“대개 악마의 힘을 빌리는 놈들은 영혼을 저당 잡지. 악마들은 계약자들이 죽으면 그 영혼을 취하는 것으로 힘을 나누어준다. 그게 보통이 계약이야.”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다. 묵묵히 아가레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조금 달라. 보통의 흑마법사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한 힘을 얻었지만, 대가로 더 큰 것을 걸었다.”
아가레스는 주먹으로 제 가슴팍을 두들겼다.
“이 몸뚱이. 시기가 지나면 나와 계약한 악마 놈이 내 몸을 취하러 올 거야.”
“아···.”
그런 설정이 있기는 했다. 원작에서는 극의 후반부까지도 아가레스가 몸을 뺏기는 조짐은 없다시피 했지만, 여기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가레스는 검지로 천장을 가리키더니 제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그때 마법사 놈에게 벼락을 맞고서 깨달았다. 이 힘을 낭비하면 몸을 빼앗기는 시기가 더 당겨진다.”
“아아.”
그가 몸을 사리는 건 아마 그 탓인 듯했다.
“알겠습니다.”
“벌써 돌아가나?”
“내일 있을 싸움이 무서워서 마음이 심란하네요. 돌아가서 명상이라도 하려 합니다.”
“알았어. 그러게나.”
“그럼 내일 뵙죠.”
현실을 직면하니 우울함이 덮쳐왔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 같기는 했다.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싸워야 한다. 아직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연습 삼아 하는 대련이야 수백 번 했어도 뭔가를 죽이려고 든 적은 없었다.
침실로 이동하며 다짐했다. 망설이지만 말자고. 해야 한다면 하자고.
* * *
다음날 토벌에서 나는 말을 타고 아가레스와 함께 이동했다.
그는 무장 상태가 출중한 상비군을 이끌었다. 그들의 복장을 보아하니 경계를 서는 병사와 직접 토벌에 나서는 병사를 따로 구분한 듯했다.
경계병들도 병사답지 않게 군기가 바싹 들었는데, 이들은 더했다.
하기야, 맞닿은 적국은 없어도 최전선의 병사였다. 그들은 긴 행군에도 잡담조차 하지 않았다.
아가레스는 내게 의견을 구하지도 않으면서 지형과 마물 따위를 설명했는데, 느닷없이 내게 말했다.
“마족과 마물 중 무엇을 몰아내는 게 더 급하다고 생각하나?”
아가레스가 처음으로 내게 질문했다. 무언가 계책이나 정보를 얻고자 함이 아니라 순수하게 내 생각이 궁금한 듯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마물입니다. 마족과는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고 하지만 의사소통이 불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물은 다릅니다. 놈들은 시간이 지나면 더더욱···.”
아가레스가 내 말을 잘랐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틀렸네. 급한 건 마족이야. 마물이 성장하는 것보다 그것들이 세를 불리는 게 빠르니. 오늘은 잘 보게나.”
나와 아가레스는 뒤에 병사들을 데리고 영지에서 벗어나 일대를 돌아다녔다. 주로 아인종들의 생활 구역을 침입하며 그들에게 얼굴을 비추었다. 몇몇 종족들은 우리가 보이는 순간 도주했는데, 이따금 냅다 덤벼들기도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근접하기도 전에 화살에 꿰여 죽었다.
심장이 쿵쾅였다. 놀라 아가레스를 바라봤다. 아가레스도 날 보고 있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나를 시험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시험하려는 건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구태여 내게 아인종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만 같았다.
왜?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여기서 나대지 않는 게 내게 가장 이로운 선택이란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모르겠다.
나는 이기적인 놈이라서 내 생존과 행복한 생활이 우선이었다.
그러니 여기서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게다가 아가레스가 왜 악마와 계약했는지까지도 알고 있었다.
어느 아인종 무리의 공습 때문이었다. 아가레스가 아인종을 증오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또 궁금한 게 있었다.
이는 호기심을 채울 뿐인데 아가레스가 화를 내지는 않겠지 싶어 말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개간도 할 수 없는 땅을 소유하면 뭐가 좋은 겁니까? 구태여 저들을 몰아내는 이유가 뭡니까?”
“이곳은 곡식이 나지 않는다. 사냥할 짐승도 부족하지. 저것들은 뭘 먹겠나?”
“마물이겠죠. 저들이 마물을 사냥해준다면 대공께서도 이로운 것 아닙니까?”
“실패하면 어쩔 것 같나? 내 영지로 내려온다. 마족은 보통 비루하지만, 특출난 것들이 있다. 놈들은 성벽을 뛰어넘고, 내 재화를 훔친다. 그 과정에서 병사들을 몇 죽이는 건 덤이지.”
나는 입을 닫았다. 나는 외지인이었다.
여기서 아가레스가 한 고민을 모르고, 이곳 사람들이 느꼈을 괴로움을 모른다. 여기서 사람 목숨이 어쩌니저쩌니, 떠들어봐야 멍청한 소리일 뿐이었다.
내가 이상한 거야, 하고 중얼거렸다. 내가 외지인이라 괜한 곳에서 트집을 잡는 것이었다. 여기선 이게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물고 다니기로 결심했다.
* * *
하루를 아가레스를 따라다니며 보냈다. 밤이 찾아왔고, 별이 반짝였다. 우리는 영주 성으로 복귀했다.
성에 돌아온 직후, 아가레스는 역시나 술부터 찾았다.
피는 사람을 흥분시킨다. 정신에 피로를 더한다. 아가레스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했고, 이를 술로 지우려는 듯했다.
“오늘은 저도 같이 자리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게.”
오늘 토벌에서 내가 한 일이라고는 아가레스를 따라다닌 것뿐이었다.
아마 나를 괴롭히려는 아가레스의 심술이었겠지. 그게 분했다. 나도 그의 얼굴에서 눈물, 콧물 쏙 빼줄 작정이었다.
주방을 빌렸다. 밀가루를 사용해 떡을 만들었다.
고춧가루를 아낌없이 풀며 떡볶이를 만들었다. 용강로에 강철을 넣은 듯 양념이 이글거리며 떡을 삼켰다. 그간 혀를 단련해 매운맛이 익숙해졌다고 해도 내심 겁날 만큼 떡볶이는 붉었다.
양념 냄새가 코를 쑤시자 켁켁 기침이 나왔다.
나는 떡볶이를 들고 아가레스에게 돌아갔다. 아가레스는 나를 기다리면서 혼자서 술을 몇 잔 들이켠 듯했다.
“전에 했던 그 음식인가? 오늘은 좀 붉구나.”
“예. 전에 했던 건 원래 조리법과는 조금 달리했던 겁니다. 이게 원조죠. 전에 것보다 훨씬 맛이 좋을 겁니다.”
아가레스에게 떡볶이를 내밀며 기대했다.
술을 물처럼 마셔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는 놈, 칼에 찔려도 표정 좀 찌푸리고 마는 놈.
과연 이거도 아무렇지 않다는 양 넘어갈 수 있을까?
아가레스는 포크로 떡을 찍었고, 입에 넣었다.
“맵군.”
포크에 떡을 입 안에 넣은 아가레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눈을 깜빡이더니 코로 숨을 길게 뿜었다. 안면 근육이 자유분방하게 꿈틀거렸다.
“나를 독살하려는 건가? 독으로는 날 못 죽이는데.”
“그냥 매운 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