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흠 그런가.”
그는 옆에 놓인 술병을 잡더니 병 채로 들이켰다. 굵은 목울대가 꿀렁이며 술을 넘겼다.
매운 음식은 술안주로는 최악이라고들 한다.
소화기에 문제가 있기도 하거니와 그 매운맛을 씻으려 술을 들이켜기 때문이었다.
아가레스는 쉬지 않고 술을 마셨다. 그의 옆에 빈 술병이 쌓였다.
“맛이 어떻습니까?”
“전에 했던 그게 더 나아. 이건 너무 매워. 먹기 힘들군.”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는 아가레스의 앞에 앉아 떡 하나를 먹었다.
확실히 이안과 먹었던 그것보다 훨씬 더 매웠다.
그간 혀를 강화하지 않았다면 나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나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내가 그의 승부욕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해보자는 건가? 고통을 견디는 거야 제국 누구보다 자신 있는데.”
“전 매운 거 잘 먹어서요.”
“그럼 이렇게 하지.”
아라게스는 내 앞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물 대신에 술을 마시는 거로. 이러면 좀 공평하지 않나?”
“예. 뭐 좋습니다”
나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
내가 술이 약하긴 해도 매운 음식 내성은 아가레스보다 몇 배는 강했다. 그리고 이건 실제 결과로 나타났다.
“흐읍···. 하···. 흐읍···. 하···.”
아가레스도 고춧가루 앞에서는 나약한 듯했다.
안구에 습기가 찼고, 연신 신음했다.
그는 떡 하나를 먹고도 술을 몇 모금씩이나 마셨다.
아무리 알코울 해독 능력이 뛰어난 아가레스라 해도 과한 음주였다. 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네는 매운 것에 익숙한가 보군. 하아··· 이거 내가 진 듯해.”
“술자리에 지고 이기고가 어딨겠습니까?”
“나한텐 있어. 뭐든지 이겨야 직성이 풀린단 말이야···. 어릴 때부터 그랬던 걸 보아하니 내 천성인 듯해. 하아···.”
“아, 뭐. 그럼 제가 져드리기라도 할까요?”
내가 술병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자 아가레스는 콧방귀를 끼며 웃었다.
“오늘 토벌이 자네를 괴롭게 한 모양이야. 그건 미안하게 됐네. 내일은 사람 닮은 것들을 죽이진 않을 테니 마음 풀게.”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아가레스는 취한 탓에 머리가 무거운 듯했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더니 횡설수설 말했다.
“내게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10년일 수도 있고, 100년일 수도 있지. 그보다 길 수도 있고. 문제는 이걸 모른다는 거야.”
취한 게 아니라면 하지 않을 이야기였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가능하면 빨리 모든 일을 끝내고 싶다.”
원작을 읽었다고 모든 걸 알지 않았다.
완결까지 본 것도 아니고, 중간에서 끊겼다.
거기다 북부에 얽힌 사정 따위야 어찌 돼도 좋은 소재였다. 어떻게 하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게다가 여기서 말을 잘못했다가는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술을 마셔 나도 취한 듯했다.
“몸을 뺏기는 게 무섭다면 계약한 악마를 죽이면 될 일 아닙니까?”
“내가? 무슨 힘으로.”
제국에서 아가레스를 대적할 이는 단 한 명도 없다시피 했다.
그는 불사의 전사였다. 설령 아가레스보다 수백 배 강하다고 해도 죽지 않는 적을 막기란 불가했다. 상대가 누구라도 결국에는 아가레스가 승리할 것이다.
상대가 악마만 아니라면 그러했다.
아가레스의 힘은 계약한 악마로부터 빌린 것이었다.
그의 힘으로 악마를 처단하는 건 불가했다. 이런 걸 말해준다고 한들 아가레스가 뭘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대공과 계약한 악마의 진명, 아마데우스라 합니다.”
흐릿했던 아가레스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눈의 초점이 제자리를 찾고, 빛이 번쩍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내 호칭이 바뀌었다.
아가레스는 나를 자네, 하고 부르더니 너라 칭했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이걸 대체 어떻게 알까? 그냥 알았다.
아니… 누나가 말해줬다.
누나는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 그럼 라파엘이 아니라 제국의 누구라 해도 모를 정보였다.
술에 취해서 머리가 어질어질한 게 아니라면 절대 내뱉지 않을 정보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말이다.”
“그러게요. 하하···.”
말해주지 말걸.
술김에 내뱉은 말이라고 해서 주워 담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이 죽는 걸 보고 흥분했다. 거기에 술까지 마셨으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차라리 북부에 왜 저주가 내렸는지나 알았으면 더 좋았을 걸 그랬다.
아니 여기에 이유가 있었으면 좋았겠지 싶었다. 아마 아무 이유 없을 거다.
북부는 추워야 하는데, 지리적으로 볼 때 북부만 혹한이 몰아칠 순 없으니까 저주가 내린 걸 거다.
그냥 그런 이유겠지. 필요하니까.
“미안하다.”
아가레스는 병나발을 불다 말고 다시금 술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그는 천천히 술맛을 음미하며 목을 축였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 한둘쯤은 있는 법이지. 용기 내서 해준 말일 텐데, 자네를 후회하게 할 뻔했어. 자네의 호의는 감사히 받지. 말해줘서 고맙네. 이걸 어떻게 알았는지 캐묻지는 않겠네.”
멋쩍어 대답을 망설이고 있자, 아가레스는 제 술잔을 비웠다.
“나중에 말해줄 수 있을 때가 오기를 기다리지.”
* * *
마물은 자연히 발생한다. 막 태어난 마물은 대개 짐승의 형상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 성장할수록 모습이 변해갔다.
나는 아가레스를 따라다니며 마물을 사냥했다. 대개 마물이라 해봤자 흉포한 짐승에 불과해 병사들의 사격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물을 발견하면 대열을 맞춰 일제히 쇠뇌를 발사했다. 수십 발의 볼트가 동시에 날아가며 곰 형상의 마물을 격추했다.
다라라락.
볼트가 박힌 마물은 그대로 정지했다.
굳이 대공인 아가레스가 직접 병사들을 지휘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만큼이나 병사들을 효율적으로 마물을 제압했다.
* * *
아가레스가 혀를 찬 건 2시간이 지나서였다.
아 저런 놈이 있으니까 따라 나오는 거구나.
거대한 돌 괴물이 몸을 일으켰다. 3m 정도 크기의 원숭이였는데, 피부에는 털이나 가죽 대신 암석으로 덮였다. 병사들은 놈에게 쇠뇌를 갈겼는데, 볼트는 박히지 못한 채 튕겨 나갔다.
이를 본 아가레스가 내게 말했다.
“잡아주게.”
“예?”
“짐승이라면 다 같이 해볼 텐데, 그게 아니지 않나? 보통의 창칼로는 들지 않아. 검기가 필요해.”
무리한 요청은 아니었다. 그간 나는 제법 성장해서 어지간한 놈들을 상대로는 자신이 있었다. 걱정되는 건 딱 한 가지, 이번이 첫 실전이라는 점이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도와주셔야 합니다.”
“나만 믿게.”
아가레스가 몸을 사리는 건 어디까지나 힘을 아낄 필요가 있어서였다. 내가 다치겠다 싶으면 바로 나서줄 것이다. 아마도.
근접해 몸 써가며 싸우는 건 부담 돼 우선 화염탄을 쏴 보았다. 결과는 실패. 화염탄은 원숭이 마물에 직격하고 폭발하며 마물을 태웠는데, 큰 부상은 없는 듯했다. 놈의 돌 갑옷을 벗겨내고, 살을 쳐야만 했다.
칼을 빼 들며 아가레스에게 소리쳤다.
“위험하면 진짜 도와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그의 확답을 들은 후에 마물에게 뛰어들었다. 검기를 빚으며 칼을 휘둘렀다.
샤아아아악!
검기로 강화한 검은 부드럽게 마물을 종아리 피부를 베었다. 칼이 살을 가르고 들어가 근육을 썰었다.
거기에 마물은 큰 덩치만큼 둔했다. 나는 놈의 무릎을 밟고 뛰어올라 턱에서 머리로 검을 찔러 박으며 휘둘렀다.
파아악!
마물의 턱부터 머리를 썰어냈다. 그 직후 마물은 정지했고 무너졌다.
이렇게 쉬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방어력만이 특별할 뿐이지 그다지 강한 마물이 아닌 듯했다.
“수고했네.”
아가레스는 내게 엄지를 치켜들었는다.
나는 괜히 창피해 얼굴을 숙였다. 괜히 엄살을 부렸네.
이후로도 나도 몇 번인가 화살이 박히지 않는 마물이 나오면 참전했다.
“수고했네. 잘했어. 벼락을 맞은 보람이 있었네.”
크게 강한 놈은 없어 무난하게 토벌이 끝났고 복귀 명이 떨어졌다. 아가레스는 내게 박수하며 등판을 두들겼다.
“생각보다 도움이 많이 됐어. 오늘은 힘을 아꼈지 뭐야.”
“그거 다행입니다.”
그렇게 영주성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인종 무리가 눈에 띄었다. 날이 어둑해질 때였고, 동작이 은밀해 나도 간신히 보았다. 아가레스도 눈치챘나 싶어 힐끗거렸다. 그는 눈을 부릅떴다.
아인종 무리의 동작은 날쌔 병사들이 따라잡기엔 무리인 구석이 있었다. 그 때문일까. 아가레스는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나도 간신히 따라붙을 만큼 날랜 속도였다.
아가레스가 칼을 빼 들자 검은 마력이 칼날을 감쌌다.
그는 순식간에 아인종 무리 중앙에 뛰어들었다. 아인종 무리는 단검을 뽑으며 동시에 아가르스에게 달려들었다.
아가레스는 그들의 공격을 방관했다.
단검이 그의 몸을 파고들었고, 사방에 피가 튀었다.
아가레스는 몸에 칼날이 박힌 채로 제 칼을 휘둘렀다.
사아악! 사아악!
그는 아이종의 목을 하나씩 베었다.
“운이 좋았어. 내 성을 넘보는 것들을 간단히 잡았지 않나!”
아가레스를 덮친 아인종들은 제법 실력 있는 놈들이었다. 아가레스가 입은 철갑옷의 틈새를 단검으로 잘 쑤셔 박았다. 갑옷을 입은 기사를 죽이기 위해 훈련 받은 놈들이었다. 아가레스의 말이 맞았다. 제때 놈들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영주성에 피해가 갔을 수도 있었다.
“마족들이 내 재화를 노린 건, 거의 1년 만이네. 요 며칠 자기들 영토를 들쑤시니 못 참고 튀어나온 듯한데, 이렇게 쉽게 잡다니 퍽이나 운이 좋았어.”
“예.”
“기쁜 일이지 않나? 자네 표정은 왜 그렇게 어두워?”
“제가 어리숙해, 사람이 죽는 걸 보니···.”
아가레스가 내 말을 끊었다.
“얼핏 보면 저들이 우리와 외양이 비슷하긴 한데, 그렇게 마음 쓸 것 없네. 나도 아동기 시절에야 자네처럼 괜한 데에 마음 쓰고 그랬는데 나이 들며 다 고쳤지. 자네도 곧 있으면 바뀔 거야.”
“예.”
아인종의 시체는 병사들이 처리했다. 우리는 영주성으로 귀환했다.
아가레스는 갑옷의 세척을 위해 벗어 병사들에게 넘겼다.
갑옷 밑에 구멍이 뻥뻥 뚫린 의복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내 시선을 의식한 아가레스가 말했다.
“마족들이 찌를 때 따끔하더군. 한 놈은 내 눈을 노리는데, 내가 먼저 목을 잘라 망정이지 하마터면 눈이 뚫릴 뻔했어. 눈이 찔리면 다른 데보다 몇 배는 아프다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내가 그럴 분수가 못 됐다.
“수고하셨습니다.”
“자네도. 마지막에야 내가 나서기는 했어도 오늘 마물을 상대로는 한 번도 힘을 쓰지 않았어. 다 자네 덕분이네. 오늘은 이만 쉬게나. 술 생각이 나면 날 찾아오게나.”
아가레스는 표정을 찡그리며 웃었다.
“어제 먹은 그 안주는 됐으니 명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