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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53화 (53/125)

제53화

아가레스는 주먹을 쥐었다가 피기를 반복하며 손바닥을 노려보았다.

그의 손에서 흑마력이 아른거렸다. 그는 이 힘을 어찌 다뤄야 할지 갈등했다.

가능하면 힘을 쓰지 않고 아껴 악마에게 몸을 뺏기는 날을 미루는 게 좋았으나 또 그럴 필요가 적어지기도 했다.

“아마데우스···.”

아가레스는 라파엘에게 들은 악마의 진명을 내뱉었다.

현실적으로 라파엘이 알아낼 수 없는 정보였으나 이를 넘기고, 그 쓸모부터 생각했다.

악마는 제 진명을 듣는 순간 그 힘을 잃는다. 천외천의 존재가 땅에 떨어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인간과는 태생부터가 달랐다.

그 무력은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은 악마로부터 힘을 빌린 처지. 자신이 그 악마를 쓰러트리는 건 불가했다.

놈을 쓰러트리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주 강한 놈. 라파엘로는 부족했다.

그가 익스퍼트에 올랐다고 해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의 스승인 카타리나라도 되지 않는다면 칼잡이가 악마와 싸우는 건 무리한 짓이었다.

그러면 또 누가 있나.

아가레스는 그날 제게 벼락을 떨어뜨렸던 마법사를 떠올렸다.

그래, 그놈이라면 뾰족한 수가 있을지도 몰랐다.

“큭. 하하하.”

아가레스는 제 꼴이 우스워 실소했다.

저와 계약한 악마 놈을 죽인다면 자신은 다시금 힘을 잃는다.

제가 힘을 잃는다면 무슨 힘으로 북부를 지키겠단 말인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제 땅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을 죽인다.

오히려 결론은 엉뚱한 쪽에서 나타났다.

힘쓰기를 아끼지 않는다. 아가레스는 저와 계약한 악마 놈이 제 육체를 빼앗고 이곳에 강림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 악마가 제 영지를 멸망시키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대체 누가 그 악마 놈을 막는다는 말인가.

아가레스는 라파엘을 떠올렸다.

그의 무력이라면 보잘것없는 바였으나 어찌 된 일인지 악마의 진명을 알고 있었다.

“아마데우스···.”

아가레스는 그 이름을 천천히 굴리며 되새겼다.

아마데우스. 제 몸을 차지할 악마의 이름이었다.

아가레스는 제 땅을 효율적으로 지키기 위해 아마데우스와 계약했다. 자신도 죽은 후에 혼을 내주는 것으로 끝날 거라 여겼다. 그게 아니었다.

아마데우스는 마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원했다.

그의 욕망이 이뤄진다면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이를 걱정해 아가레스는 아카데미의 방학 때 제 영지에 내려와서도 힘을 아끼려 했다.

“그럴 필요 없나···.”

라파엘이 아마데우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제 그 덕에 자신도 알게 됐다. 아가레스는 펜을 들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새롭게 얻은 정보를 기록했다.

아마데우스가 현신하더라도 그를 막을 수 있게.

* * *

나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아인종들은 뭘 먹고 살까.

여기는 작물이 쉽사리 자라지 않는다. 기후 때문이라면 귀리처럼 추위에 강한 작물을 농작하면 되지만, 그게 아니었다.

땅의 힘 자체가 약해 생명이 나기 힘들었다. 나는 거라고는 억센 잡초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면 북부에 아인종들은 뭘 먹고 살까.

잘 모르겠다.

여기에도 엘프나 드워프 같은 클리셰적인 아인종이 있으나 그들은 북부가 아닌 먼 쪽 지역에 살았다.

북부에 거주하는 아인종들은 잉그레드와 마찰을 빚는다고 두루뭉술하게 나온 게 전부였다.

아가레스는 아인종들이 마물을 사냥해 먹는다고 했다.

아마 반쯤 거짓말일 거다. 마물의 수야 부족하지 않다고 해도 너무 강했다.

고작 고기를 얻겠다고 사냥하기엔 지나치게 위험했다. 그러면?

뭔가 생존할 다른 수단이 있을 거다.

“궁금하기는 한데, 알 방법이 없네.”

아인종들의 주거지역에 가까워질수록 지형이 험하고, 추위가 강해졌다.

게다가 그들은 유목민처럼 은근히 거주지를 이동한 덕에 여태까지 살아남았다. 그들은 뭘 먹을까.

고민해도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에 눈을 감고 잠들었다.

* * *

“오늘부터는 내가 힘 좀 쓰지.”

아가레스들은 병사들을 동원하지 않은 채 나 하나만을 데리고 인근에 마물을 썰러 다녔다.

그는 흑마력을 아끼지 않고 풀어내며 마물을 베었고, 또 다른 편에는 아인종들이 도주하고 있었다.

내가 그들을 유심히 보고 있자 옆에서 아가레스가 쏘아붙였다.

“자네는 저들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 보는 건가?”

“예, 뭐. 그렇습니다.”

“자네에게 공감할 수 없네. 저 미개한 것들과 우리가 어떻게 같은 인간이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번식이 가능하면 같은 종이기는 했지만, 모른 척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아가레스가 말했다.

“그래도 자네를 존중해주지.”

내가 눈만 깜빡거리며 보고 있으니 아가레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적어도 자네가 보는 앞에서는 가능한 피하지.”

“예···. 감사합니다.”

병사들이 없으니 발이 가벼웠다. 우린 영지에서 빠르게 벗어나 먼 거리를 이동했다. 그러며 여러 아인종을 보았다. 머리에 뿔이 나거나 귀가 뾰족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궁금한 게 생겼다.

아가레스가 진정 저들을 죽이려 했다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자연히 발생하는 마물과 달리 저들은 인간이었다.

대를 잇지 못하게 멸하면 다신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를 입밖에 내뱉는다고 아가레스가 대뜸 사람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망설여졌다.

“이곳에 왜 작물이 자라지 않을까? 이곳 영주가 바뀔 때마다 모두가 했던 고민이었다. 그중에는 저 마족들 때문이라는 가설이 있었지. 놈들은 돌로 만든 지팡이로 땅을 치며, 놈들의 신에게 빌었으니까.”

나는 잠자고 아가레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것들을 뿌리 뽑으려 한 적도 있었으나 관두었다. 이곳까지 내려온 것들은 자기들끼리의 영역 다툼에서 패배한 놈들이야. 끝까지 밀고 가면 많은 무리가 있을 테니 괜히 건드리지 않았지.”

그는 나를 힐긋 보더니 말했다.

“내 힘을 저놈들에게 쓰기엔 아까우니 나도 그러려 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어진 듯해.”

“어··· 왜 그렇습니까?”

아가레스는 제가 덮고 있던 모피 망토를 내 목에 둘러주었다. 몹시 두텁고 부들부들했는데, 왜 이러는지 놀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중에 악마 놈이 내 몸을 차지했을 때 사람들에게 그놈의 진명을 널리 알려주게. 그리고 그 위험성도. 사람들이 빨리 몰려와서 그놈을 죽일 수 있게.”

때마침 마물 하나가 이쪽을 기웃거렸다.

오랫동안 이곳의 마기를 흡수했는지 제법 덩치가 큰 놈이었다. 곰을 닮은 형상의 놈은 네 발로 돌격해왔다.

“내가 잡지.”

아가레스는 칼을 빼 들었다. 그의 검이 묵빛으로 변하며 주변 빛을 흡수했다.

그는 단칼에 곰을 쩌어억 베었다.

마물의 검은 피가 사방에 튀었다.

“이야. 대단하시네!”

나는 아가레스가 내게 해줬던 것처럼 그에게 엄지를 들어줬다. 그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자네의 도움을 받는 건 오늘까지로 하겠네. 이제부터 나는 힘을 아끼지 않을 거야. 아마 몇 주가 지나기 전에 일을 다 끝내겠지.”

“아···.”

내일부터 사람을 마구마구 죽일 거라는 그의 선전 포고에 살이 떨렸다. 아가르스에게 아인종은 적이었다. 그들을 멸망시키고 제 땅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에 내가 참견해도 될까?

답은 아니었다.

“대공님, 그게 말입니다. 제가 사람 사이에 거리를 재고 그러는 게 잘 안 돼요.”

이유는 많았다.

여기 문화는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르니까. 가까이 지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위험한 처지였으니까.

그런데, 내 짧았던 인생과 오래오래 산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어봤을 때 솔직하게 말하는 것만 한 게 없었다.

“우리 친합니까?”

아가레스는 오른손으로 제 턱을 붙잡더니 주변을 힐긋거렸다. 그는 억지로 웃음소리를 냈다.

“그건 왜 묻나?”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좀 무례한 거 같아서요.”

“됐네. 그런 거라면 그냥 하게. 자네는 평소에도 충분히 무례했어.”

“예,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심호흡하고 말했다.

“대공께서는 저를 나약하다 여기시겠지만, 저는 살인을 꺼림칙하게 여기고, 피를 무서워합니다. 대공님과 친분을 나눌 수 있었고, 대공님을 다소 편히 대한 건, 대공님을 둘러싼 소문이 거짓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 소문들은 다 거짓이야.”

“예. 피를 마시고, 사람 고기를 먹고 그런 게 다 헛소문인 것을 압니다. 그런데···. 사람 목숨을 가볍게 다루시고,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거짓이네.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이유 없이 사람을 왜 죽이겠나?”

말장난이었다. 아가레스는 제 고집을 꺾을 뜻이 없는 듯했다.

“대공님께서 사람을 죽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왜, 사람을 죽이면 날 멀리할 건가? 그런다고 내가 아쉬워할 게 있을 거 같은가? 애초에 마족들은 사람이 아니야!”

“죄송합니다. 제 눈에는 사람으로 보여서요.”

아가레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눈매가 매서웠다. 그는 나를 노려보더니 한쪽 입꼬리만 억지로 올렸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나?”

“그냥··· 저를 소개했습니다. 저는 이런 놈이라서요. 대공님께서 사람을 쉽사리 해친다는 걸 마주하니 전처럼, 편하게 대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 편히 못 대하면 자네가 뭘 어쩌겠나?”

“대공님에 비하면 저야 자그마한 영지의 영주일 뿐이지요.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보통의 귀족들이 그러는 것처럼 저도 그럴 겁니다.”

침을 삼키고 말했다,

“대공님을 두려워할 겁니다.”

“내가 그걸 꺼릴 것 같나?”

모르겠다.

아카데미에서 아가레스의 주변이 비었던 건 순전히 그의 악명 탓이었다.

아가레스가 남들의 두려움을 사려고 의도적으로 숨기지 않은 소문 때문이었다. 아가레스는 남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걸 기꺼워했다.

그럼 나는? 우리는 꽤 친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친분이야 상대적인 거니까. 아가레스는 내게 몇 없는 친구였고, 아가레스에게는 나를 제외한 친구가 하나도 없으니 내가 둘도 없는 친구였다. 끼리끼리 노는 꼴이었다.

아가레스는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 후 옷을 힘껏 당기다 내팽개쳤다. 나는 버틸 수 있었지만, 순순히 넘어가는 쪽이 이로울 듯해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져주는 건 이번만이네.”

나는 냉큼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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