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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54화 (54/125)

54화

아가레스와 불편한 일을 남기고 잉그레드를 떠나는 게 내심 신경 쓰였다.

그가 져준 걸 보아하니 나를 고깝게 보지는 않는 듯했는데, 앙금이 생기기는 했을 거다.

가능하면 아카데미가 다시 학기를 시작하기 전에 해결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나는 그의 영지를 떠나면서도 그가 준 망토는 그대로 둘렀다.

망토가 상등품인 것도 있거니와 이건 꽤 요긴했다.

어느 때보다 인맥이 중요한 시대. 아가레스가 준 망토는 내가 북부의 대공과 친분이 있다는 증표였으니 썩 훌륭한 무기인 셈이었다.

아이작 영지로 귀환할까, 이안의 마탑으로 갈까 고민하다가 마탑 쪽으로 향했다.

칼질보다는 마법 쪽이 더 흥미가 갔다. 이번에 아가레스를 도우면서 마물과 싸우며 더더욱 그러한 생각이 강해졌다.

칼질로 마물을 잡는 데는 최소한의 거리가 필요했다.

내 팔을 쭉 뻗고, 한 걸음 안에는 마물에게 칼이 닿아야 하니 넉넉히 잡아도 4m. 나와 적 사이의 거리를 4m 안으로 유지해야 했다.

이거 너무 짧지 않나?

마물이 암만 약하다고 해도 생김새부터가 흉악했다.

으르렁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내는데,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움찔 놀라기 일 수였다.

반대로 마법은 얼마나 편한가.

수십 미터 거리를 두고 저 멀리에서 쏘기만 하면 되니 그 안정감에 연신 음음, 하며 감탄했다.

앞으로도 가능하다면 무언가와 싸우는 일 없이 살고 싶었으나 사람 일이란 모르는 법.

만약을 대비하고자 무력을 키워야만 했다.

상대와 거리를 잔뜩 벌린 후에 위험에서 해방되어 일방적으로 공격하기.

이게 가능한 건 마법뿐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이안이 위치한 마탑으로 향했다. 이런 기회가 2번 있지는 않을 테니까.

* * *

누나는 마법을 좋아했다.

무슨 게임을 해도 마법사를 했는데, 나름의 믿음 혹은 가치관이 있었다.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는 건 현실에서도 어쭙잖게 흉내 낼 수 있지만, 마법은 시골에 가 쥐불놀이를 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마저도 마검사 느낌이지 마법사는 아니라며 툴툴거렸다.

그 덕에 이안은 여러 혜택을 보았다.

남주들간의 서열 경쟁에서도 늘 상위권이었고, 여러모로 좋은 에피소드를 많이 챙겨갔다.

무엇보다 이곳에선 마법이 만능이었다.

칼을 휘두르고, 검기를 뽑고, 검강을 만들어도 끽해야 무언가를 부수고 죽이는 게 끝이었다.

검술 수준이 올라갈수록 더 잘 부수고, 더 잘 죽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와 달리 마법은 삶을 풍요롭게 했다.

촛불보다 몇 배는 강한 빛을 뿜는 전등부터가 그러했고, 겨울에도 콸콸 나오는 온수가 그러했다.

돈 좀 있는 놈들이 사는 저택에 들어가는 마법만 해도 수십 가지였는데, 마탑에는 족히 수백 가지의 마법이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마탑에 들어가기에 앞서 건물을 구경했다.

현대의 고층 아파트처럼 효율을 중요시한 디자인이었는데, 탑의 끝부분의 첨탑에는 둥근 아티팩트가 장식되어 있었다.

아티팩트는 빛을 흡수한 후에 스테인드글라스의 문양으로 빛을 반사해 허공을 수놓았다. 예쁘장한 게 관광지로서 역할을 하는 듯했다.

마탑의 입구에 안내원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이작의 영주인 라파엘이라 합니다.”

안내원은 내 이름이 자유 입장 허가가 돼 있다고 답했다.

마탑의 안쪽으로 입장하자 웅장한 크기의 철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였다. 내가 놀라서 서 있자, 곁에서 날 지켜보던 접수원이 웃으며 다가왔다.

“아, 마탑을 방문하신 건 처음이시죠? 처음 방문하신 분들은 당황하시는데···.”

시시덕거리며 설명하는 접수원을 배려하며 묵묵히 있었다.

평생 시골에 거주하다가 처음 대도시를 방문한 사람을 대하는 안내원의 태도에는 은근한 우월감이 있었다.

“자, 보세요. 여기에 화살표로 된 표시가 있죠? 이게 어디로 이동할지를 나타내는 표시인데, 마탑의 지하에는 마법 연마에 필요한 연습실이 구비 돼 있고, 그 외에 마탑의 주요 시설은 상층에 있습니다. 마탑주님을 뵈러 방문하셨으니 상층으로 이동하셔야겠네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접수원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서서히 열리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보며 짝짝 박수하더니 사람을 소개하듯 엘리베이터 쪽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보셨죠? 이렇게 버튼을 누르면 문이 열리는 식인데요···.”

접수원은 나를 따라 엘리베이터 입장해서는 17층까지 있는 버튼을 하나씩 가리키며 웃었다.

“여기에 있는 숫자가 무슨 의미냐면요. 이 엘리베이터 이동 수단을 타고 이동할 층수를 가리키는 건데요. 이 버튼 하나만 딸깍 눌러주면 바로 그 층수로 이동하는 거죠. 신기하죠?”

“네. 그러네요.”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이안이 있을 곳으로 갔다. 마탑에 여럿 있는 강의실이었다.

근래에 들어 이안은 마탑 소속의 다른 마법사들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일이 잦다고 했다.

금도 강습 중이라 했는데, 내가 방해하는 꼴이 될까.

그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안의 수업이 끝난 건 20분가량이 지나서였다.

강의실 뒷문 쪽에 서서 수업이 끝나길 기다렸다.

뒷문으로 학생들이 하나, 둘씩 나왔는데 대개 머리털이 희끗희끗했다.

마탑의 주인이 직접 교육하는 수업.

듣기 위해서는 마탑에서의 지위던 높던 눈에 띄는 재능이 있던 뭐라도 하나는 필요했겠지.

이렇게 보니 확실히 이안이 보통 마법사가 아니긴 했다.

투욱!

그때 누가 내 뒤에서 등을 쳤다. 통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전조조차 없는 일격에 화들짝 놀라며 앞으로 껑충 뛰었다.

뒤돌아보니 이안이 서 있었다.

공간 이동을 사용한 듯했다. 사람 놀리는 데 거창한 마법까지 쓰니 내심 당황했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빨리 왔네. 일이 있다면서.”

“끝났어.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재밌을 거 같아서 그랬는데,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네. 미안. 일단 내 방으로 가자.”

쟤가 웬일인가 싶었는데, 대충 받아주기로 했다.

“네 방이 있어? 여기서 먹고 자?”

“나는 그래.”

하기야 이 큰 마탑에 마탑주를 위한 개인 방 몇 개쯤이라면 있을 법도 했다.

나는 이안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는 층수가 적힌 번호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신기하지? 전 전대 마탑주가 설계한 건데, 그때면 마도 공학이 지금처럼 발달하기도 전인데 이런 걸 생각하다니 대단한 거 같아. 나도 어렸을 때 이걸 보고 살짝 놀랐거든.”

“응. 나도 이런 거는 처음 보네. 아주 신기해.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을까?”

“마탑에는 이런 거 많아. 가기 전에 다 구경해. 이젠 시간 많잖아.”

“그래. 그럴게.”

* * *

우리는 마탑의 최상층으로 이동했다. 이안은 꼭대기 층을 혼자 쓰는 듯했는데, 마탑주의 개인 공간이라 그런지 입구부터 태가 났다.

푸른 마나의 흐름이 바닥을 타고 쭉 이어지며 이안이 걸어가는 족족 알아서 문이 열렸다.

“여기 있는 것들 대부분 내가 만든 거야.”

“대단해. 멋있어. 와.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대.”

“나는 마법 잘하니까.”

“그래, 네가 최고다.”

탁탁.

이안이 발바닥으로 바닥을 두 번 두들기자 바퀴 달린 상자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흡사 현대의 캐리어 가방을 닮았는데, 이안이 손을 뻗으니 음료 두 잔이 튀어나왔다. 이안은 한 잔을 내게 내밀었다.

처음 도시에 방문한 농촌인의 심정으로 박수하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신기해라.”

“이거도 내가 만들었어.”

“우와. 여기에는 몇 가지 마법이 들었을까? 신기해라!”

“열두 가지. 냉각과 보온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게 핵심인데, 바퀴로 이동할 수 있는 무게가 보기보다 커야 해서 난이도 있는 기술이라 상용화는 느릴 거야.”

이안은 말을 하더니 허공에다 쓰러지듯 뒤로 누웠다.

그러자 놀랍게도 허공에 공기가 뭉치며 그를 받쳤다.

이번 건 진심으로 신기해 그를 따라 하듯 몸을 눕혔는데, 나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안은 쿡쿡 웃으며 염동으로 나를 일으키고는 다시 염동으로 밀쳤다. 이번에는 나도 공기로 된 방석이 내 몸을 받아줬다.

“그래서, 할 일이라는 게 뭐였어?”

”아가레스 기억해? 그와 한 약속이 있었어.“

나는 북부에서의 일을 간략히 요약해 이안에게 설명해주었다.

내 설명을 들은 이안은 코웃음을 쳤다.

”잘도 그놈이 네 말을 들어주겠네. 말만 그렇게 하고 네가 떠난 후로는 아인종들을 죽였을 거야.“

”아닐 거 같은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닐 거 같아서.“

내가 이 소재로 이야기를 관두고 싶어 하는 티를 내자 이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서 네가 왜 온 거더라, 그래 마법이었지. 뭐가 배우고 싶어?“

”마법의 종류? 그때 네가 말했잖아. 효율 높은 거에 집중하라고.“

”그야 그때는 네가 그런 거를 원했잖아. 남들이랑 싸울 때 필요한 거. 보통 전투 마법이라 부르는 그쪽 계열. 나는 그거 아니라도 다 잘해. 뭐든지.“

이안이 칭한 전투 마법은 대개 단순한 구석이 있었다.

강력한 무언가를 쏘아 맞힌다는 식으로 정형화되어 실생활에 유용한 마법에 비해 간단했다.

내가 구태여 그런 마법에 시간을 쏟지 않는 이유기도 했다.

실생활에 쓸모 있는 마법들은 대개 시중에 아티팩트로 나오니 차라리 돈을 쓰는 쪽이 유용했다.

그러나 이번에 잉그레드를 방문하며 몇 가지 아쉬운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방한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티팩트는 기본적으로 마석으로 충전해 사용하는 식이었는데, 대부분 출력이 정해져 있고는 했다.

방한 마법처럼 쓰임이 뻔한 아티팩트는 더 그러했다.

방한 마법이 걸린 망토를 입어도 어느 지방에선 땀이 나게 덥고, 또 어느 지방에서는 열기가 부족해 입은 티도 안 나기도 했다.

더위를 피하는 아티팩트나 도구들도 이와 비슷했는데, 이왕 실생활에 쓸모 있는 마법을 배운다면 이쪽이 좋을 성싶었다. 이를 이안에게 설명하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야 쉽지. 따라와.“

이안과 함께 다시금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나는 이게 신기한 척 눈을 깜빡였다. 피식 웃는 이안을 보아하니 내 연기가 제법 훌륭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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