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우리는 7층으로 이동했다.
7층에는 강의실이 주르륵 이어져 있었는데, 대개 나이 어린 마법사들이 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평균적으로 대략 8세에서 13세 사이인 듯했다.
마탑에 복장은 규정이 없어 입은 옷은 제각각이었는데, 한 가지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머리에 쓴 고깔모자였다.
마법사들은 오만하다.
남들은 다루지 못하는 신비를 만지고, 순수하게 재능만으로 그 수준이 정해지고, 마법을 배우니 선민사상에 물들기도 한다.
마탑에서는 그런 신입 마법사들을 가르치고자 고깔모자를 씌웠다.
저 우스꽝스러운 고깔모자는 ‘네 수준을 알고, 겸손해라.’ 의미의 바보 모자 같은 것이었다.
이안은 빈 강의실로 날 데리고 가더니 내 머리 위에 고깔모자를 씌웠다.
머리를 갸웃거릴 때마다 노란 고깔모자가 따라 움직였다.
이게 어색해 손으로 더듬었다. 다른 강의실에서 모자를 쓰고 수업을 받는 학생들보다 10살은 더 나이가 많았는데, 나를 놀리는 것만 같았다.
“이거 꼭 해야 해?”
“규칙은 규칙이라. 여기서 처음 마법을 배우면 누구나 하는 거야. 신경 쓸 건 없어.”
괜한 일에 입씨름하기도 귀찮아 이해한 척 답했다.
“그래, 그런 거겠지. 그냥 넘어갈게.”
“잘 생각했어. 굳이 너한테도 씌울 필요는 없지만, 예외를 두면 귀찮은 게 있어서 이해해줘.”
고깔모자를 쓰고 이안에게 마법을 배웠다.
그의 강의를 듣고 있으면 잘만 익히면 마법으로 못할 게 없다고 느껴졌다. 오히려 전투 마법만을 위해 마법을 익힌다는 게 낭비같이 느껴졌다.
마법은 그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이었다.
“동시에 여러 가지 마법을 쓰는 건 실력 있는 마법사들에게도 어려운 문제야. 이를 해결하려 여러가지 마법을 하나로 합치기도 하는데, 이를 중첩이라 해. 네가 말한 방한 마법은 두 가지 마법을 하나의 마법으로 중첩한 마법이야.”
방한 마법은 핵심은 외부의 열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몸에 열기를 뿜는 건 부가적인 문제였다. 대개 난이도가 다른 두 마법을 중첩할 때는 하나의 마법을 중심으로 삼고 다른 마법을 더하는 식이었다.
“외부의 자극을 제거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서 방한은 그 쓸모에 비해 과하게 어려워. 효율이 나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이를 배워두면 여러모로 활용하고, 응용할 수 있으니 열심히 해둬.”
* * *
그렇게 마탑에 머물며 잡다한 마법을 배우며 지냈다.
아카데미에서 훈련하고, 공부하고, 마법을 익혔던 그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의 패턴이었지만 마음만큼은 가벼웠다.
큰 문제들을 내려놓은 다음이었고, 성과를 내야 한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좋았다.
“잘했어. 소질이 있는 거 같은데. 외부에 같은 열을 방사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는 느낌으로···. 그래, 잘하고 있어.”
재밌었다.
“전투 마법 쪽보다는 이쪽에 더 소질이 있는 거 같은데.”
그런 듯했다.
“더위를 물리쳐? 더위가 사람도 아닌데 물리친다니 재밌네. 그래, 그것도 방한 마법과 원리 자체는 비슷해. 바깥의 열을 배제하고···.”
잡다한 마법을 하나씩 배웠다.
이제는 겨울에도 손 시릴 걱정 없고, 여름에도 땀 뻘뻘 흘리며 더위에 고생할 염려도 지웠다. 점점 더 내 미래가 밝아졌다.
이안 같은 대마법사의 수준에 오르지는 못하더라도 이렇게 하나씩 마법을 배워간다면 현대 문물 부러울 것 없다고 싶었다.
마법만 있다면, 못할 게 없었다. 그렇게 마탑에 머무르며 마법을 배웠다. 최고의 선생이 옆에 있으니 날마다 실력이 발전했다.
거주는 근처에 여관에서 머물렀다. 마탑에 남는 방이 있다고 하나를 내주겠다는 이안의 제안은 너무 많은 특혜를 받는 듯해 눈치껏 거절했다.
이미 마탑 소속 마법사들의 눈총이 사나웠던 탓이었다.
이안이 마탑주로서 일을 처리하고, 다른 마법사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건 최근이라고 했다.
그에게 배우고 싶은 마법사들이 많을 텐데 내가 그 시간을 빼앗을 꼴이기도 했다. 마탑에 마법사들의 시기를 이해했다.
가끔은 근처에 관광지라 할 법한 곳을 둘러보기도 했다. 인건비가 싼 데다 현대의 건축 기술은 없어도 마법, 마법공학 덕에 현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건축물들이 있고는 했다. 그것들을 구경하며 놀라워했다. 그렇게 지냈다.
적당히 쉬면서 마법을 배웠다. 그러던 중에 가문에서 코로망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아이작 영지에 제프린이 찾아왔다고.
편지를 쥔 내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이게 무슨 돌발 사고인가?
제프린은 입학시험 때 내게 패배한 후에 백사자 기사단의 단장을 찾아가 검술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뼈를 깎는 수련 끝에 실력을 키웠고, 내게 다시금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편지를 구기고 이안을 찾았다.
“야, 싸움에 도움 되는 거 좀 알려줘. 나 급해.”
지금의 나로는 완벽한 승리를 장담하기엔 부족했다.
* * *
제프린이 내게 도전했다.
그의 도전을 꼭 받아줄 필요는 없는 법이었으나 원작을 읽은 나는 놈의 성격을 얼추 알고 있었다. 비숏의 부탁이 아닌 한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고집을 꺾지 않을 놈이었다.
이번 자리를 피하더라도 놈과 한 번쯤 검술을 겨루는 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일찍 끝내고 치우는 게 여러모로 마음이 편했다.
그러면?
그냥 싸우면 되나?
아카데미 입학 직전, 제프린의 검술은 익스퍼트를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그때 내가 그를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건 원작이라는 반칙 덕분이었다. 그의 기술과 약점을 모조리 알고, 상대의 행동을 예상할 수도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심리전에서까지 우위를 점한 덕에 승리할 수 있었다.
내게 유리한 점투성이였기 때문에 이겼다.
이번에도 그게 될까?
제프린도 제 약점을 알았으니 보완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익스퍼트에 올랐다면 검술만으론 내가 상대될 리 없었다. 싸운다면 필패일 듯했다. 그럼 내게 남은 건 딱 한 가지, 마법이었다.
마법으로 그를 쓰러트려야 했다.
“새로운 마법이 필요해.”
“왜? 전투 마법은 그만하면 된 거 아니야? 너도 그쪽보다는 마법의 중첩에 흥미 있었잖아.”
“저택에 돌아가서 싸워야 할 상대가 생겼어.”
“그게 누구길래 그래? 너 정도면 어디 가서 안 꿇려. 그게 아니면 목숨이 걸린 일이야?”
“아니, 아마 다치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만 상대가 강해. 검술만 따지면 나보다 뛰어날 거야.”
이안은 흐음, 하며 숨을 들이켰다. 검지로 턱을 받힌 채 고민하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마법으로 이기기는 어려울 거야. 네 검술은 경지에 달했어. 상대가 그 이상이라고 하면 네 수준에 마법으로 뭘 어떻게 하기는 무리야. 잡기가 통하진 않을 상대니까.”
부정하고 싶지만, 맞는 말이었다. 이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곧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꼭 제프린과 싸워서 이겨야 할까? 아니었다. 입학시험 때야 카타리나의 제자 자리를 두고 경쟁했지만, 지금은 다른 이야기였다.
그냥 져도 괜찮았다. 제프린도 제가 이긴다면 만족하고 돌아갈 것이다.
“근데 이기고 싶어.”
승패가 중요한 승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간 흘린 땀이 얼마인가. 져도 괜찮으니까, 이길 맘도 없이 싸운다는 게 억울했다.
“도와줘.”
이안은 제 머리카락을 뒤로 쓸더니 살포시 웃었다.
“그래, 한 번 해보자.”
* * *
원작에서 백사자 기사단의 단장, 하오크는 이름뿐인 캐릭터였다. 카티라나와 함께 제국의 두 명뿐인 소드마스터로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실제로 등장한 적은 없다시피 했다. 그랬던 하오크가 제프린을 가르쳤다.
원작과는 다른 방향으로 성장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오크와 카타리나의 검술은 성향이 다르다고 나오기도 했으니까, 분명 원작가는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원작에 제프린은 후반부에 들어 소드마스터에까지 오르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검술에 특징은 속도였다.
쾌를 중시한 검술을 장기로 삼아 이를 끝까지 발전해나갔다.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컸지만,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여러 가능성을 두고 고민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이안과 상담하며 어떻게 제프린과 싸워야 할지 방법을 모색했다.
“상대의 검술이 너보다 뛰어나다면, 마법만으로는 무리야.”
“칼이랑 마법 다 써야 한다는 거지?”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겠지.”
“어렵겠네.”
마법은 극도의 집중력을 요구했다.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며 싸우는 와중에 마법을 시전하고, 조준한다는 건 고되었다.
특히 위력이 강한, 수준 높은 마법일수록 더 그러했다. 제프린을 상대로 하기엔 힘들 듯했다.
현재 내가 주력으로 사용하는 전투 마법은 두 가지였다.
마탄과 화염탄.
화염탄이 마탄의 상위호환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마탄의 장점은 짧은 영창과 적은 마나 소비, 짧은 집중으로도 시전할 수 있으니 몸을 움직이며 쓰기엔 더 요긴했다.
반대로 화염탄의 경우에는 시전하는 데 여러모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그만큼이나 위력이 배로 강했다.
이미 몸을 써가며 싸울 때 쓰기 좋은 마법은 익힌 이후였다.
여기서 뭘 더 추가해야 할까 골몰하는 찰나에 이안이 말했다.
“원소 마법을 배워야 해.”
“시전이 쉬우니까?”
“어. 그리고 네 적성에 맞아. 원소 마법은 쉽고, 간단한 마법이지만 재능과 가장 연관이 큰 마법이기도 해. 타고난 마나, 마력이 받혀주지 않으면 아무리 매진해도 성과가 없는 마법이니까. 반대로 마나와 마력만 괜찮다면 가장 효율 높은 마법이지.”
“배우는 데 얼마나 걸릴까?”
“목표에 따라 다르겠지. 쉬운 마법이니까 마법 자체의 가능만을 따지면 일주일이면 될 거야.”
이안에게 마법을 배우며 제프린과의 싸움을 구상했다.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제프린이라면 어떻게 할까.
그러다 몹시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떠올렸다. 입학시험 때 했던 대련에서 내가 이길 수 있었던 결정적인 열쇠.
그건 제프린의 절초를 파훼한 덕이었다.
제프린이 사용할 수 있는 검술 중 으뜸이라 하면 초승달 베기였다.
눈동자가 따라붙기도 힘든 쾌속한 검격은 반응조차 하기 난감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초승달 베기는 반드시 왼쪽을 향했다.
입학시험 때에 나는 왼편을 미리 막아두는 식으로 초승달 베기를 봉쇄했다. 그러나 그때 대련 이후 긴 시간이 흘렀다. 제프린, 그 노력가라면 초승달 베기의 약점을 보완했을 것이다.
역시 제프린의 사거리 안에서 싸움은 피하는 게 정답이었다.
“마법에 의존도를 더 높여야겠어.”
나는 코로망에게 정확히 3주 후에 가문으로 돌아가겠다고 전했다.
3주 후에 제프린과의 대련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안의 옆에서 오래오래 마법을 배운 후에 대련을 하고 싶었지만, 아카데미의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는 일을 끝내고 싶었다.
열의를 불태우며 명상에 들어갈 때, 이안이 내 머리를 가리키며 지적했다.
“모자는 쓰고 해야지.”
나는 머리에 고깔모자를 얹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