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간신히 서로를 분간할 만큼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각자 검을 뽑아 자세를 취했다.
제프린의 스탠스가 입학시험 때의 대련 때와 달리 변했다.
그때보다 공격적으로 몸을 앞으로 구부린 자세. 폭발적인 전진을 위해 축을 당겼다.
저기서 초승달 베기가 무작위로 쏟아진다면 반응하기 어려울 듯했다. 그가 약점을 보완했다는 보장은 없지만, 양쪽에서 나온다고 가정하는 쪽이 옳았다.
“괜찮으면 시작할까?”
“예, 전 준비됐습니다.”
제프린의 대답을 들은 직후, 미리 모아둔 마나를 통해 마법을 시전했다.
제프린의 발밑에 구덩이를 팠다. 날이 어두웠던 데다가 워낙 은밀하게 마법을 펼쳐 제프린의 반응은 다소 늦었다.
특히나 앞으로 구부린 자세에서 구덩이가 파여 크게 휘청이고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치이이익!
역시나! 제프린은 소드 익스퍼트에 올랐었다.
그는 순식간에 검에 기를 불어넣어 흙벽에 박은 후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눈 깜짝할 만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도 검기를 만들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앙!
제프린이 오르는 벽을 향해 몸을 던졌다.
칼싸움에서는 지대가 높은 쪽이 유리했다. 게다가 제프린은 발 디디기도 불편했다.
제프린은 벽을 뛰어오르며 반격했다. 온 무게를 실어 수직으로 때린 내가 이득을 볼 수밖에 없는 교환이었다.
두 칼이 충돌했다. 서로 온 힘을 다한 일격에 제프린은 바닥으로 꺼졌고, 나는 구덩이 밖으로 몸이 튕겨져났다.
제프린은 묘기를 부리듯 벽에 검을 박아 버텼다. 그 후 날렵하게 몸을 회전시키며 땅 위로 치솟았다.
나는 장갑에 시동을 걸었다. 벽을 타고 오르는 제프을 향해 손을 뻗어 물을 뿌렸다.
돌덩이는 피하기가 용이했고, 불은 검기로 벗겨내면 그만이라 택한 원소였다.
쑤와아아아악!
물줄기가 폭포처럼 수직으로 쏟아지며 제프린을 덮쳤다.
제프린은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것으로 물줄기를 피하려 했으나 그보다 빨리 폭포가 쏟아졌다. 그는 폭포에 휩쓸려 구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프린은 이를 악물었다. 무릎을 구부렸다. 근육이 수축하며, 위로 힘껏 뛰어올랐다.
그는 단번에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 시도했는데, 물에 젖은 옷은 무거웠고 바닥은 미끄러웠다.
그는 전보다 느린 속도로 전진해왔다. 거기에 나는 불을 뿜었다. 화염이 구덩이를 가득 채우며 제프린에게 밀려들었다. 검기로 불길을 걷어낸다고 해도 연기에 쓰러질 거라 판단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제프린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목숨을 건 승부도 아니고, 기껏해야 서로의 솜씨를 겨루는 대련이었다. 그럼에도 제프린은 두 눈이 연기에 시뻘겋게 충혈된 채로 다가왔다.
그는 연기를 들이마시지 않으려 숨도 참으며 한 걸음씩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코앞까지 접근했다.
미친놈.
속으로 그에게 욕을 해준 다음에 머리를 굴렸다.
여기까지 왔으면 항복하리라 여겼는데, 기어코 대련을 이어가니 당초에 계획에서 벗어났다.
샤아아악! 샤아아악!
제프린은 검기를 두른 칼로 불을 가르며 전진했다.
이를 앞에 두고 해결책이 떠올랐다. 나는 불길을 쪼겠다. 제프린이 검기로 흩어버리기 전에 불을 퍼트려 사방에서 제프린을 감쌌다. 그리고 동시에 덮쳤다.
제프린은 오른발에 축을 둔 채 놀라울 만큼 빠르게 회전하며 불을 걷어냈으나 사방에서 다가오는 모든 불길을 다 막아내기란 버거운 듯했다.
물론, 그건 나도 매한가지였다. 이렇게까지 불을 섬세하게 다루는 건 처음이었다. 뇌가 망가질 것 같았다.
그 순간, 제프린이 불길 속에서 좌측으로 뛰쳐나오더니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나는 급히 마탄을 쏴 저지하려 했으나 제프린은 칼을 휘둘러 튕겨냈다.
내가 서 있는 땅에 마법을 갈겨 높이 치솟게 만들었다.
그다음 칼에 검기를 불어넣었다. 장갑이 있는 덕에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검기를 완성했다. 역시나 마지막에는 칼을 겨뤄야 할 듯했다.
상대의 검술이라면 알고 있었다. 붉게 충혈돼서 반쯤 감긴 제프린의 눈을 보면 여러 가지 수를 놓고 고민할 여유가 없을 터였으니 가장 자신 있는 것으로 나올 거다.
기술명은 초승달 베기.
상대의 기술은 정해졌다. 문제는 그 방향이었다.
왼쪽과 오른쪽. 둘 중 하나였는데, 찍어서 맞추기에는 제프린 손의 칼날이 퍽 날카로웠다.
그렇다고 두 방향 모두를 대비하는 것 또한 난감했다.
내가 제프린이라면 어떨까.
제프린이 내게 다시 도전한 이유는 지난번에 패배 때문이었다.
그 패배를 기점으로, 그 패배를 설욕하려 피땀 흘려 수련해서 이렇게 도전해왔다. 제프린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그때의 패배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때 제프린은 왜 패했지?
초승달 베기를 왼쪽으로밖에 쓰지 못한 탓이었다. 이를 만회하려 할 거다.
오른쪽.
난 칼을 들어 왼쪽 관자놀이를 보호하는 척 제프린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서로의 사정거리가 겹치는 순간, 칼을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휘둘렀다.
째애애앵!
서로의 칼날이 그대로 부딪치며 제프린의 검을 튕겨냈다.
두 칼이 충돌한 순간 수준 차이를 절감했다.
제프린의 검에 제대로 반응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나보다 훨씬 지쳤을 텐데도 칼에 실린 힘이 어마어마했다.
칼을 겨루는 합이 늘어날수록 불리해지는 건 내 쪽이었다.
다행히도 제프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마법과 피로에 판단력이 흐릿해졌고, 몸도 본래보다 굼떴다.
나는 한 손으로는 칼을 휘둘렀고, 남은 한 손으로는 마탄을 쏘았다.
칼이 크게 부딪쳐 서로 거리가 벌어질 때면 제프린의 발을 노리고 땅 계열의 원소 마법을 사용했다.
서로의 칼이 충돌하는 횟수를 최대한으로 줄이며 마법으로 상대를 어지럽혔다.
파아아앙!
마탄이 제프린의 가슴에 명중했다. 제프린은 그대로 칼을 놓쳤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흙바닥에 누워 숨을 헐떡이다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겼다. 내가 이겼다.
끝났다는 안도감에 피로가 몰려오고, 내가 흘린 땀이 끈적하게 느껴졌다. 나는 제프린에게 말했다.
“진정되면 집으로 들어와. 씻고 기다릴 테니까, 밥부터 먹자. 배고프네.”
저택으로 돌아와 창문 너머로 제프린을 구경했다.
그는 한참을 바닥에 누운 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저택 안쪽으로 들어오는 걸 확인한 후에 몸을 씻으러 이동했다.
피부에 이물을 씻어 보냈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후 복도 쪽으로 나가니 제프린을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옷에 흙이 묻은 걸 보아하니 씻기 전인 듯했다.
“씻고 와. 옷도 갈아입고.”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이만 돌아가려 합니다.”
“늦었잖아. 자고 가.”
시계를 보니 우리 둘이 싸우는 동안에도 시간이 흘러 자정 훌쩍 넘은 심야였다. 시간이 좀 늦었다고 제프린한테 위험하진 않아도 이동하기엔 여러모로 불편할 것이다.
“그러시다면…. 예, 감사합니다.”
* * *
제프린은 옷을 벗고 물줄기를 맞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라파엘과의 대련을 복귀했다.
졌다. 왜?
라파엘의 기습적인 마법.
거기부터가 시작이었다. 마법을 익혔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그렇게 능숙할 줄은 몰랐다. 시작부터 말려들었다.
아니, 그 이전인가?
대련의 시간부터 라파엘이 의도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라파엘이 은밀하게 마법을 썼다고 해도 눈치채는 게 늦었던 건 한밤중이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그의 계획 속에서 놀아났다. 제프린은 제가 패배한 이유, 변명 거리를 물색하다가 주먹으로 벽을 때렸다.
‘다시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라파엘의 칼과 제 칼이 충돌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두 칼 다 검기가 쌓여 있었다. 다소 어색한 구석이 있었지만, 그도 자신과 같은 익스퍼트에 올랐음을 뜻했다.
공평하게 해가 뜬 낮에, 심판을 두고 겨뤘다면 달랐을까?
유치한 생각이었다.
검술은 죽고 죽이는 기술이었다. 언제부터 공평을 따지고, 심판을 뒀단 말인가.
제프린은 패배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다짐했다.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라도 진 건 진 것이었다.
‘그러면 이제는 어떻게 할까?’
라파엘에게 이긴다면 아카데미에 복학하려 했다.
보고 싶은 얼굴이 있었다. 비숏 퓨어문.
퓨어문 가문의 영애인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쓸모를 인정받고 싶었다.
라파엘을 상대로 이긴다면 그렇게 될 것만 같았으나 지금 평가해보자니 멍청한 발상이었다. 비숏이 그리 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었다. 제멋대로인 고집이었다. 그러면? 그럼 이제 뭘 해야 할까?
제프린은 주먹을 쥐었다. 강해지고 싶었다.
* * *
깨끗한 옷을 입자마자 배에서 신호를 보냈다.
마차에서 이것저것 주워 먹기는 했어도 제대로 된 식사는 아니었고, 또 격렬하게 몸을 움직인 탓에 열량 소모가 많았다.
나는 하인에게 부탁해 간단한 요깃거리를 받아 제프린에게 찾아갔다.
“배고프지?”
“괜찮습니다.”
“내가 배고파서 그래. 같이 먹자.”
먹을 걸 들며 자연스레 물으려 했는데, 제프린의 얼굴에 처연한 구석이 있어 아무렇지 않게 말 거는 게 부담됐다.
슬쩍 눈치만 살피고 있으니 제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검술만 따지면 제가 더 강했습니다.”
대련의 이야기였다. 나도 동의하는 바라 가만히 듣고 있으니 제프린이 말했다.
“그러나 그 외에 모든 부분에서 제가 모자랐죠. 저는 이게 경험 부족해서 발생했다 생각합니다. 검술만 닦는 것으론 뛰어넘을 수 없는 부분이죠.”
그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2학기에는 잘 부탁합니다.”
“복학하는 거야?”
“네. 하오크 단장님 밑에서 배우는 건 정말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시야가 열리는 듯했죠. 기사단에서의 대련도 좋았습니다.”
“그러면 왜? 기사단에 계속 머물러도 괜찮은 거 아니야?”
“이곳에 오기 전에 비숏 영애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도 들었죠. 아마도 제가 걱정할만한 일은 생기지 않을 테고, 그러니 기사단에서 검술을 쌓는 것도 좋겠죠. 어쩌면 그 편이 더 빠르게 성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왜?”
제프린은 한숨을 쉬었다. 제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의 손잡이를 더듬었다.
“기사단에서 수련할 때면 잡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대로 돌아가면 그때 그대로겠죠. 한 번은 이기고 가야겠습니다.”
“넌 이기고 튀겠다는 말을 당당히 하는구나.”
궁금했던 것을 대충 풀고는 방으로 돌아와 취침했다.
제프린은 새벽같이 일어나 해가 뜨기 전에 어딘가로 떠났고, 이어달리기에서 바톤을 교체하듯 다음 사람과 교대했다.
나비에였다. 그녀는 제 영지에서 디저트를 챙겨와 방문했다.
“저 보고 싶었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