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그날 우리 대화했던 거 기억나요? 펜싱 대회 나가기로 할 때.”
“당연히 기억하지. 네가 못하겠다고 할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아니 그거 말고요. 우리 디저트 이야기했었잖아요.”
“그랬었나?”
“네.”
나비에는 식탁을 툭 치더니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그때 별것도 아닌 케이크를 맛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저희 쪽에 정말 괜찮은 가게가 있다고 말씀드렸고요.”
별것도 아닌 케이크, 꽤 맛있었는데. 그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아무래도 나비에는 나름대로 ‘괜찮은 가게’에 자부심이 있는 듯했다.
나와 눈을 마주치며 빨리 떠올리라는 압박에 바로 대답했다.
“아. 맞아. 그랬었지. 기억나네. 그게 왜?”
“그때 라파엘 님이 언제 한 번 저희 영지를 방문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영 소식이 없어서요. 이대로 있다가는 흐지부지 넘어갈 거 같아서 찾아뵀어요. 인제 보니 제 예상이 딱 맞았네요. 까먹고 있었죠?”
“너무 바빴어. 여기저기 벌려놓은 일이 많았거든.”
방학 때는 늘어져서 쉬려고 했는데, 이곳저곳 왔다 갔다 하며 칼을 흔들고 마법을 써댔다.
긴 고행이었다.
그간의 고생했던 흔적이 내 표정에 드러났는지 나비에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이해한 척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고요. 자, 선물이에요.”
나비에는 과자 상자 더미를 내밀었다. 대개 유통이 긴 과자가 많았는데, 금세 먹을 수 있는 마들렌 같은 빵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양이 굉장해서 식사 대신에 하나씩만 주워 먹어도 며칠은 버틸 듯했다.
가게에 들어가서 여기 있는 거 전부 포장해 주세요, 하고 주문한 듯한 양이었다.
나는 과자의 탑을 올려다본 다음 나비에한테 물었다.
“뇌물이야?”
나비에는 자기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고,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계산했다.
그녀가 이걸 그냥 줄 리가 없었다.
또 선물을 보내는데 사람을 시키는 게 아니라 직접 오기까지 했으니 과한 호의였다.
속내에 꿍꿍이가 있을 거다. 내 반응에 나비에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도와주신 거 보답하고 싶어서요. 사실 제가 황태자님과 잘 된다고 해도 얻는 것도 없잖아요. 사실 궁금하기도 했어요. 왜 이렇게 밀어주는 걸까 하고요.”
“얻는 거 없기는. 있어. 그런 거.”
“비숏 영애요? 에이, 잘 만나지도 않으면서. 조금은 다른 변명 거리를 생각하는 게 어때요?”
말해준다고 한들 믿지도 않을 듯해 입을 꼭꼭 싸매고 과자만 챙겼다.
양도 종류도 많은 걸 보아하니 한동안 입이 심심하지는 않을 듯했다. 만족스러운 선물이었다.
“고마워. 잘 받을게.”
“네, 아주 맛있어요. 나중에 아카데미로 갈 때도 챙겨갈 테니까, 드셔 보시고 괜찮다 싶은 게 있으면 연락 주세요. 그거만 더 싸가죠.”
“방학 때는 무슨 일 없었어?”
“아쉽게도 그렇네요. 무탈하게 지냈어요. 2학기 과목들 예습하면서요. 공부도 끝내놔서 2학기에는 여유로울 거 같아요.”
“황태자님과는? 무슨 연락 같은 거 없었어? 진짜?”
“황태자님께서는 몹시 바쁘신가 보네요. 제가 듣기로는 아카데미 졸업 후에는 자리를 이으실 듯해요. 그 때문에 황실에서의 일뿐이세요. 아카데미가 개학 후에도 한동안은 수업도 불참하실 듯하고요.”
“괜찮아. 그러면 아카데미로 돌아오기는 한다는 거니까. 그때 잘하면 되잖아.”
카르테아는 황좌에 앉기 전에 황후의 자리를 정할 거다. 내가 바랐던 방향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무리하게 일을 계획하지 않아도 이 흐름을 타면 됐다.
“학기가 열리면 뭘 할까요?”
“황태자님 꾀기 위해서?”
“네.”
“중요한 건 자연스러움이니까, 너무 억지로 사건을 일으키려고 하지는 말자. 학사 일정에 맞춰서 움직여야지.”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카르테아는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에 제 짝을 정할 것이다.
그 전에 나비에가 더 강하게 카르테아의 눈에 들어야만 했다.
퓨어문 가문은 굴지의 명가가 맞았지만, 황가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황비로 뽑하기엔 가문이 아쉬웠다.
카르테아가 정말로 나비에를 깊이 바라는 게 아니라면, 정략혼의 가능성도 있었다.
나비에는 그게 불안한 듯했다.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내 위로에 나비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음에도 없는 말은 못 하시는 줄 알았어요.”
“맞아. 그런 말은 잘 못 해. 이건 진짜 잘 될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고마워요. 의욕이 좀 나네요.”
나비에는 정말로 내게 선물을 주고, 인사를 하러 방문한 듯했다. 그녀는 곧바로 볼일이 있다고 말하며 떠났다.
* * *
나비에를 배웅한 후에는 그토록 원해왔던 생활을 영위했다.
해가 지기 전에 침대에 눕고는 해가 중천에 뜬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식사를 거르고, 나비에가 선물로 준 과자를 씹었다. 이번 건 견과류가 붙은 젤리였는데, 떡 같은 식감에 무지막지하게 달달한 맛이 특징이었다.
어찌나 단맛이 강렬한지 혀에 닿는 순간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끝맛은 쌉싸름했는데, 이게 중독성이 있어서 자꾸만 손이 갔다.
해야 하는 일은 하나도 없었고, 종일 늘어졌다. 꿈꿔왔던 생활이었다.
“지겹네.”
나는 연무장으로 나가 칼을 쥐었다. 수련은 힘들고, 괴로웠다. 하지 않아도 된다면 영영 칼 쥘 일 없이 살고 싶었다.
하지만 딱 하나, 아쉬운 게 있었다. 내 어정쩡한 실력이었다. 소드 익스퍼트에 반쯤 걸친 상태였다. 조금만 더 하면 벽을 넘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여기서 머무르자니 아까운 면이 있었다.
내 몸을 위해서도,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깊은 잠이 들기 위해서도 몸을 움직여주는 건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수련할 이유를 하나씩 만들면서 조금씩, 짬이 날 때만 수련했다. 그 외에 시간은 즐길 거리를 찾는 데 쓰며 보냈다.
요 며칠간 잠만 자다가 깨달았다.
뭐든지 과하면 질리는 법이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집착하기보다는 조금씩 자주 즐기는 방향이 정답이었다.
그러니 삶을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걸 많이 찾고 만들어야 했다.
이곳의 문화는 현대와는 다르니 여기에 맞춰 나를 개발하려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우선은 악기를 건드려봤다.
한 사람의 인생에 즐길 운동과 연주할 악기가 꼭 하나씩은 필요하다는 말은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다.
나도 이참에 악기 하나를 배워볼까 싶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악기는 피아노였다. 아마 아가레스 때문이겠지.
나는 저택에 있는 건반을 두들겨보았다.
놀랍게도 나름대로 소질이 있었다. 마나를 익히면 몸 쓰는 일에는 뭐든지 능해지는 건지 미스 터치가 적었고, 여러 기교를 간단히 습득했다.
악보를 외우는 것까지도 능해 몇 년만 붙들고 있으면 이거로 밥벌이도 할 수 있을 듯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거로 돈을 벌 생각은 없었다. 애당초의 목표가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지 않나.
“푸흡.”
일 안 하는 걸 꿈꾸면서, 취미 생활을 즐기다 돈 벌 수 있겠다는 발상을 떠올린다는 현실에 실소가 터졌다. 이런 노동자의 정신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오로지 즐거움만을 찾아 건반을 눌렀다.
“재밌네.”
악보를 쉽게 외우고, 손이 크며, 손끝이 정확했다.
즐기는 수준에 머무르기에는 최고의 소질이었다. 쉽디쉽게 진도를 나갔고, 여러 곡을 연주해가면서, 시도할 수 있는 곡의 스펙트럼이 넓혔고, 레퍼토리를 쌓기도 좋았다. 어디 가서 자랑질 하기에 알맞았다.
칼질하려 쌓은 체력은 여기에도 도움이 돼서 하루에도 대여섯 시간씩 건반을 두들기니 신기할 만큼 빠르게 실력이 쌓였다.
아카데미의 개학이 코앞으로 올 때까지도 여기에 몰두했다. 그러다 어느 악보를 구하려 시도했다.
라흐마니노프. 아가레스가 좋아했던 것. 당장에 내게는 난도가 있었지만, 조금씩 외워갔다.
* * *
그렇게 아카데미의 2학기를 맞이했다. 나비에한테는 견과류가 붙은 젤리가 취향이었다고 편지했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을게요. 이제는 믿으니까요. 뭘 하시더라도 잘하실 거로 생각해요. 그렇지만, 만약에 힘든 일이 생기면 절 의지해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야 항상 코로망을 의지하고 있지. 여기 있어 줘서 고마워.”
코로망은 미간 사이를 찌푸리며 코를 들이켰다.
“제가 더 고마워요.”
“아카데미에 도착하면 편지할게.”
“네. 그러면 다음번 방학 때 봐요.”
이번 방학을 계기로 가문에서의 내 입지가 새롭게 변했다. 일단은 엄했던 코로망부터가 나를 조건 없이 믿어줬다. 이 믿음이 얼마나 단단했으면 하루에 14시간을 잠자는데도 무슨 심산이 있어서 그러겠지, 하고 넘어갈 정도였다.
처음 아카데미를 떠날 때라면 상상도 못 할 일에 괜히 어깨가 으쓱거렸다.
나는 아카데미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저택의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 * *
아카데미의 2학기에는 떠났던 얼굴들이 다시금 돌아왔다. 제프린과 이안이 그러했다.
각각 검술학부와 마법학부의 수업을 들었다. 제프린은 그대로 학부 생활을 했는데, 이안은 달랐다.
그간 숨겨왔던, 자신이 마탑주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 탓에 마법학부의 교수들은 바짝 긴장했다.
소문에 따르면 조용히 수업을 듣기만 했던 이안이 질문하길 시작했단다.
내가 마법학부의 교수라도 등골이 오싹할 듯했다. 무엇 하나 실수하기라도 하면 그대로 망신살이 뻗치는 거 아닌가?
“오늘도 불참이네요.”
“그러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내 옆에 앉은 레오가 강의실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아가레스의 이야기였다. 아가레스는 영지에서 일을 처리한답시고 결석 중이었다. 아예 휴학을 한 건 아니니 때가 되면 돌아올 듯했다.
나와 레오는 적당히 괴수 사냥에 관한 수업을 흘려듣고는 다음 강의실로 이동했다.
검술 학부의 수업. 학부생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거기에는 제프린도 포함이었다. 레오는 제프린에게 걸어가더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프린이 머리를 틀고 턱을 까딱이자 레오가 말했다.
“끝나고 시간 괜찮아? 괜찮으면 나랑 한 번 붙어보자.”
대련 이야기였다. 제프린은 피식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