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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60화 (60/125)

제60화

혼자 연습하다가 눈이 빨개지는 걸 보아하니 보통 화가 많은 게 아니었다.

가히 세상에 대한 분노가 몸 안에 꽉꽉 찬 수준이었는데, 레오는 어리둥절하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그래서, 왜 그러시는 거예요?”

“화를 내야 해. 그래야 힘을 낼 수 있다니까?”

“제가 기계도 아니고, 감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아, 뭐. 화를 내는 게 아니라 화난 척을 하는 거라면 할 수 있죠. 고함이라도 지를까요?”

“아니야…. 미안. 지금으로는 무리일 거 같네.”

탁탁.

레오는 연습용 칼로 연무장의 바닥을 때렸다. 그는 발끝으로 연무장의 바닥을 비볐다.

“사실 뭘 말씀하는 건지는 알 거 같기는 해요. 가끔 뭔가 느껴지기는 하거든요. 이걸 말하는 걸 알겠는데, 이게 진짜 막 화가 난다 싶을 때는 아니었어요.”

“무슨 소리야 그게.”

“기숙사에서 방 같이 쓰는 애랑 마찰이 있는데, 정말 짜증이 난다 싶기는 해도 그 광화?”

“광폭화.”

“아, 네. 그거. 그런 힘은 느껴지지 않아서요. 근데 이름 참 멋있네요. 듣기만 해도 무지 세질 거 같은 느낌? 직접 지으신 거죠?””

“그런 거 아니야.”

“작명하신 분이 따로 있는 건가요? 누군지 물어봐도 돼요?”

“아니, 미안하다.”

“예? 왜 사과하시는 겁니까?”

“미안하니까 오늘은 그만하자.”

광폭화를 대체할 단어를 준비해 와야겠다.

* * *

방학 때도 짬짬이 혼자 칼을 잡았다. 이왕 시작한 거 벽에 막힌 상태로 머무르고 있는 게 불편했고, 조금만 더 하면 벽을 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게 나뿐만은 아닐 거다.

제국에는 수많은 기사단이 있고, 그보다 수십 배는 많은 기사가 있었다.

나와 비슷한 수준에 칼잡이는 제법 많았고, 그들 중 대부분이 익스퍼트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만큼이나 벽은 두꺼웠다. 하지만 막연하게 나는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칼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그런 생각은 더 견고해졌다.

내 칼을 덮은 검기.

이건 익스퍼트의 증거라 할 수 있었다. 검사가 일정 수준에 올라 깨달음을 얻고, 마나를 이해하면 육체가 각성하고, 검기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런 과정을 건너뛴 채 검기를 사용했다. 오로지 마나에 대한 이해력 덕이었다.

검술에 깨달음과 육체는 부족했어도 마나의 사용이 그를 만회했다.

그러면 다른 방식으로 익스퍼트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육체의 각성은 세맥을 타고 흐르는 마나의 확장에서부터였다. 그러면 깨달음을 얻기 전에 직접 마나를 움직여 세맥을 열어버리면 될 게 아닌가? 익스퍼트 전이라면 할 수 없을 세밀한 마나 조정도 나라면 가능했다.

이 방법을 카타리나에게 설명하니 그녀가 답변했다.

“관둬.”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 재능이면 길어도 2년이야. 굳이 남들 안 가본 위험한 길을 갈 필요가 없어. 멍청한 짓 하지 마.”

“2년 앞당기는 거면 충분히….”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예, 알겠습니다.”

“그거보다 얼마나 늘었나 그거나 확인해보자.”

방학 기간에는 검술보다는 마법에 힘을 주었다.

그 탓에 눈에 띄는 성장은 없었는데, 카타리나와 칼을 겨룰 때 선택지는 전보다 많이 늘어났다.

마법을 쓰지 않음에도 그러했다. 마법을 익히며 마나를 다루었다.

몸 안에 마나를 유동시키는 게 몰라보게 능숙해졌다. 칼질할 때엔 호흡을 통제하고, 마나를 통제한다. 더 큰 힘과 더 신속한 동작을 위해서 몸과 호흡, 마나를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만 했다.

칼을 내찌를 때엔, 찌르기 전부터 모든 상황을 그려야 했다.

칼을 당기며 산소를 들이쉬고, 호흡을 참은 채 마나를 발경함과 함께 팔을 뻗는 식이었다.

그러나 남과 겨루는 특성상 언제나 제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찌르기를 하려다가도 상대의 동작에 베기로 바꾸거나 때때로는 바닥을 굴러야 하기도 했다.

이럴 때면 호흡과 마나의 흐름이 망가졌다.

마나의 이해도가 상승하며 여기서 이점을 챙겼다.

“많이 나아졌네!”

칼을 겨룬 후에 카타리나는 그렇게 평했다.

“그래서 더 이상해…. 너 왜 익스퍼트가 아닌 거야?”

“예?”

“마력, 마나의 양, 기술 하나하나 따져봐도 익스퍼트 급이란 말이야. 왜 아직도 거기인 건데? 전에 내가 말했지? 늦으면 2년이라고. 오늘 다시 보니까 지금 당장 익스퍼트에 올라도 이상할 게 없어.”

카타리나는 머리털을 긁적이더니 말을 이었다.

“막말로 내가 익스퍼트에 올랐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네가 더 나은 부분도 많아.”

“음…. 뭘까요?”

익스퍼트에 오르면 맥이 열린다. 맥이 열리며 마나의 유동이 가속한다. 그러나 난 맥이 닫힌 채로도 그들과 비슷한 움직임을 해냈다.

나와 카타리나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하기도 했다. 뭘 더해야 익스퍼트에 오를 수 있는 걸까? 우리 둘 다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고, 머리를 잘 쓰는 편도 아니어서 되는 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참을 떠들었다.

말이란 게 일단 내뱉고 보면 그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직감할 수 있었고, 멍청한 놈 둘이서 똘똘한 놈 하나 보다 괜찮은 발상을 하는 경우도 많아 우리는 얼추 해답을 대놓았다.

“다 해봐. 할 수 있는 거 전부.”

나는 카타리나로부터 배운 모든 검술을 선보였다. 카타리나는 검술만큼은 정답지였다. 그녀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 종교적인 느낌도 있었다. 나는 그녀를 맹신했고, 전부를 훔치려 했다.

“이게 문제였어.”

훈련. 수련. 단련.

비슷한 의미의 단어였다. 이를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외국어인 영어로 치환하면 조금은 다른 단어가 나오기도 했다. 드릴, 주로 스포츠에서 반복적인 동작을 수행하며 훈련할 때 쓰는 단어였는데, 내가 하는 훈련 대부분이 이 드릴에 해당했다.

검술의 동작을 몸에 익히고, 상황에 맞는 동작이 반사적으로 나갈 수 있게 연습했다.

카타리나의 검술은 그렇게 내 몸에 녹아들었다. 구태여 뇌를 거치지 않아도 바로 최적의 검초가 튀어나갔다.

“좋은 거 아닙니까?”

일순간의 판단이 승패를 가른다. 나는 고민조차 없이 정답을 고르도록 노력해왔는데, 이제와서 이게 문제라니 아이러니한 노릇이었다.

“좋냐, 나쁘냐로 구분하면 좋은 게 맞아. 네가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검술이 행해지니까. 실전에서는 많이 도움 되겠지. 그런데, 너랑 내가 하는 게 실전이 아니잖아.”

“아아….”

나는 카타리나와 검술을 다시금 공부했다. 전에 배울 때는 결론과 답지만을 외웠다. 주입식 공부가 취향이라, 시키면 시키는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 덕에 지금까지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익스퍼트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게 이거 때문이라니 한동안은 내려놓아야 했다.

“산소를 마시는 건 중심을 잡은 다음…. 그 후 마나를 끌어모으고…. 발경을 할 때엔 낮은 곳에서 위로, 축에서 가까운 곳에서부터….”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겁니까? 그러면 검초의 속도가 느려지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아, 그거는 말이야….”

카타리나와 언쟁해가며 검초를 분해했고, 조립했다. 이걸 한답시고, 내 검술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지금도 정답을 택하고 있었다. 작금에서야 그게 왜 정답이었는지를 해석하는 건 시간 낭비 같기도 했지만, 잠자코 카타리나를 따랐다.

검술에서만큼은 카타리나를 따를 자가 없었다.

* * *

하나가 남았다. 나비에와 카르테아 사이는 꽤 그럴듯해서 거의 다 잡은 듯했는데, 이 상태로 몇 달이 흘렀다. 다 잡은 고기라 여겼는데, 나비에의 말대로 이대로 흐지부지 흘러갈 공산도 0은 아닌 듯했다.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움직여야 했다.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사건을 만든다. 그렇게 정하고 방법을 모색하는데 이쯤 되니 수단이 떨어져 마땅히 무난하다 싶은 방법은 전무했다.

제일 흔한 방법으로는 놀랍게도 독살 시도 혹은 독살 연기였는데, 아무래도 일이 과하게 커지는 면이 있고, 나도 꺼려져 이것만큼은 배제하기로 정했다.

그렇다면 뭐가 있을까?

선물이었다. 서로 간에 선물을 주고 받는 일은 꼭 한 번은 있는 법. 이와 관련해 나비에한테 이야기하니 여유롭다는 양 웃었다.

“그런 거라면 제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죠. 선물 고르기라면 제 특기에요.”

“오오, 뭘 줄 건데?”

“말이죠. 말. 황태자님께서는 사냥을 즐기고, 승마에 능숙하니 이보다 괜찮은 선물 거리가 있을 리 없어요. 지인 중에 오토마의 피를 이은 명마를 수입한 목장이 있거든요. 잘 부탁하면 한 필 정도 얻을 수 있을 듯해요. 이보다 나은 선물은 없을걸요?”

“아아. 그거 받으면 좋아하시겠네.”

“네, 물론이죠. 공식 선상에서야 황가에 말을 타겠지만, 말을 바꿔 타보고 싶은 건 누구나 한 번쯤….”

반쯤 답을 정하고 온 자리였지만, 나비에의 말을 들어보니 귀가 솔깃한 게 그녀의 말이 퍽 들어맞는 듯했다.

내가 황태자라고 해도 직접 만든 손수건 따위보다는 제대로 된 말 한 필이 기쁠 듯했다.

“그런데 말이야, 황태자님은 이미 말을 여러 필 선물 받지 않았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가 구할 말은 달라요. 다른 사람들이 진상한 말도 물론 명마였겠지만, 오토마에 피를 이었다니까요?”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네! 오토마가 어떤 말인데요. 과거 북부의 야생마 중에서도 가장 덩치 크고 사나운 말을 야만인 수십이 죽어가며 길들이고자 시도했는데도….”

그녀의 설명을 들어보니 이게 맞는 듯했다.

사람은 사소한 선물로도 감동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사소하지 않은 선물로도 충분히 감동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어딘가 아닌 듯하면서도 나비에의 의견을 따를까 싶었다.

“잠깐만…. 그게 있잖아, 말도 정말 좋은 거 같기는 한데, 뭔가 더 마음을 담은 느낌이 나는 그런 것도 좋지 않을까?”

“비싼 선물에도 충분히 마음을 담을 수 있어요. 오히려 비싼 선물인 만큼 더 마음이 담긴 거죠. 선물을 고르는 데 드는 시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말을 고를 때 그만큼 쓸 거고요.”

나비에는 아주 당차게 말하더니 웃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의견을 따랐을 때 한 번도 잘못된 적 없었고, 다 잘되기만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좀 더 고민해보긴 해봐요. 말이 아니라면 뭐가 좋을까요?”

원작에 비숏은 아가레스와 이안에 경우 직접 나서며 적극 에피소드를 만들어나갔지만, 제프린과 카르테아를 상대할 때는 다소 수동적인 면이 있었다.

카르테아로부터 선물을 받은 적은 있어도 준 적은 없다시피 했다.

카르테아가 비숏에게 뭘 줬더라?

그래, 꽃이었다.

“아아!”

여기까지 오고서야 떠올렸다. 카르테아에게 특별한 꽃이 있었다. 이름은 누나가 적당히 지어낸 거라 까먹었지만, 그 꽃의 꽃말은 기억하고 있으니 찾아낼 수 있을 거다.

카르테아의 죽은 친모와 연이 있는 꽃이었다. 원작에서 카르테아는 그 꽃을 비숏에게 선물하며 그 사연을 풀고는 했다.

이거면 되겠다.

“꽃으로 하자.”

“꽃이요?”

내 발상을 술술 풀어보니 나비에는 눈을 반짝였다.

“좋아요. 아주 좋은 거 같아요. 근데, 살짝 어색하지 않을까요? 남성에게 꽃을 선물하는 일은 드문데, 그중에서도 선물로 자주 쓰이지 않는 품종의 꽃을 선물하다니,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흐음…. 그럴 수도 있을 거 같네.”

이러한 이유로 나는 교내 건의함에 봉투 하나를 넣었다.

-따사로운 여름입니다. 태양신의 정기를 받아 뜨거운 볕이 땅바닥을 달구는 계절입니다. 아카데미는 만인에게 열린 교육의 장임과 동시에 사교 활동의 장소로서 기능하며….

이번 중간고사가 끝난 후, 꽃 축제를 열었으면 좋겠다는 건의였다. 축제 비용 중 일부를 지원한다고 했으니 거절하진 않을 것이다. 어차피 열 축제 남의 돈 써가며 하면 좋을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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