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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61화 (61/125)

제61화

“방학 기간 때 연구한 게 진전이 좀 있었습니다. 작용 기전을 바꾸려 시도했는데, 이를 위해서···. 기존에 약은 마나 생성에 장애를 만들어···. 신약의 경우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숏은 방학 동안 연구한 연금술과 엘제닉 병 치료제를 이야기했다.

라파엘은 문외한인 분야라 알아들은 척 눈만 마주치고, 으음 신음하며 머리만 아래위로 진동했다. 비숏의 입에서 끝맺음이 나오길 대기했다.

“그리하여··· 조만간 성과가 있을 듯합니다.”

“대단해! 놀라워!”

비숏은 라파엘에게 확인해보라는 양 서류뭉치를 내밀었는데, 무게가 상당했다. 라파엘이 바로 서류를 훑는 대신에 책상 위에 얹어두자 비숏이 말했다.

“제프린에게 들었습니다. 무예에 많은 발전을 이루셨다지요. 축하합니다. 필시 많은 노력을 쏟아부으셨기에 얻은 성과겠지요. 예··· 이제는 관심 분야가 바뀌신 듯합니다.”

어딘가 탓하는 어조에 라파엘이 반문했다.

“무슨 소리야?”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짧은 기한 동안 많은 것들을 발표하셨죠. 하나하나가 놀라울 따름이었는데, 어느 순간 칼로 자른 듯 끊겼습니다. 대신에 다른 쪽에서 또 명성을 날리시니 자연히 그리 생각할 수밖에요.”

라파엘은 잠시간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는 해. 예전처럼 흥미가 생기지 않아. 어쩌면, 아마도 내가 연금술에서 뭘 하는 건 이번 병의 치료제가 마지막일 거야.”

잘 모르는 분야에서 아는 체하며 떠드는 건 역시나 어려운 일이었다. 라파엘은 여기서 끝내겠다고 결정했다.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약을 완성한 후에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비숏은 라파엘의 말뜻을 과하게 해석했다. 라파엘이 엘제닉 병의 치료제를 만들고, 신경 쓰는 것을 귀찮아한다고 여겼는데, 라파엘로서는 꼭 교정해줄 오해는 아니었다. 그녀의 옆에 서면 뭔가를 잘못하지는 않을까 염려돼 심적으로 힘든 구석이 있었다.

“가능하면 일은 혼자 처리하도록 하죠. 다음에 뵙겠습니다.”

비숏은 동아리방에서 몸을 빼며 한숨을 쉬었다.

능청스럽긴.

때린 놈은 두 발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밤새 씨근덕거린다. 괴롭힌 놈은 까맣게 잊어버려도 맞은 놈은 평생을 앓고 간다.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마음고생 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비숏 퓨어문은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라파엘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양 자신을 대했지만,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제 주변에 사람을 심었다.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고, 엿들었다.

우연히 취향이 겹친 척 선물 따위를 내밀었고, 우연을 가장해 마주쳤고, 우연··· 우연··· 우연···.

당시에는 어렸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신기해하며 운명이라고도 생각했다. 멍청한 발상이었다. 그딴 게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때를 떠올리면 창피해 뭐라도 던져 깨부수고, 찢고만 싶었다. 역겨웠다.

아카데미에 입학 후, 라파엘은 변했다. 연기는 아닐 거다. 라파엘은 이렇게 오랫동안이나 연기를 가장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뭔가 신경에 변화라도 있었던 모양이겠지. 그것까지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뿐이었다.

더는 저를 건들지 않으니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 하고 싶었던 분야에 몰두하며 그토록 바란 생활을 누리니 더할 나위가 없을 만큼 행복했다. 이거면 된 게 아닌가 싶었다.

우습게도 라파엘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같이 약을 만들며 제게 해를 가할 방법이 있었을 텐데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 감사하기까지 했다.

자기객관화가 됐던 건 방학 중이었다. 홀로 아카데미에 남아 연구를 계속하는 중에 이게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사람이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괴롭히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어째서 이런 것까지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눈꺼풀이 떨려왔다.

타앙!

비숏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이건 잘못됐다.

추잡한 방식으로 저를 건드렸던 라파엘도, 괴롭힘을 관둬준 것에 고마움을 느낀 자신도 글러 먹었다. 비숏은 아랫입술을 씹었다. 그래, 라파엘이 달라진 건 누구나 인정할 사실이다. 또래 학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뭘 해도 잘 해내고, 인망도 두터웠다.

과거의 행보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모습.

그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에게 했던 짓들이 사라지나? 달라진 라파엘이 저에게 사과 한번 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아니었다.

“이건 잘못된 거야.”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욕구가 들었다. 어렸을 적 개미를 죽이고,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작은 동물을 괴롭히는 이들을 보며 추하다고 여기며 혀를 찼다.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고 싶은 건 추한 욕망이었다.

비숏은 라파엘이 불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작금에 생활이 망가졌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자신의 혐오스러움에 실망했다.

연구는 마친다. 약의 개발을 끝낸다. 그때까지는 라파엘과 협조한다. 마침 라파엘도 지은 죄 때문인지 자신을 불편하게 여기니 그와의 관계를 여기서 끝마칠 수 있을 듯했다.

라파엘과 마주칠 일 없이 멀어지면 남의 불행을 기원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비숏은 책을 정리하며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제프린을 마주친 건 그런 와중이었다. 멀리서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 미소 짓는 얼굴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적어도 자신은 라파엘보다 나은 인간이라 간주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급을 나누는 건 못난 짓이란 걸 자각하면서도 그래도 저놈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다.

아니, 라파엘보다 못난 놈이 얼마나 되겠는가? 라파엘은 그런 놈이었다.

그놈도 아카데미에 와서 친구를 여럿 사귀었다.

그런데 자신은 뭐란 말인가? 여기서도 친구 혹은 지인이라 할 사람은 제프린뿐이었다.

1학기에 갑작스레 제프린이 휴학하니 제대로 말 붙일 동급생 하나 없는 게 제 처지였다. 그렇게 1학기를 보내고, 아카데미에서 그를 보니 반가웠고, 그런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그를 만나 간단히 인사한 후에 질문했다.

“제프린은 누군가가 불행하기를 원한 적 있습니까?”

난데없는 물음에 제프린은 검지로 이마를 긁적이더니 잠시간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예.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이들은 불행하길 원합니다. 그들이 벌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게 평범한 걸까요?”

“예. 모두가 그럴 겁니다.”

의미 없는 잡담이었다. 비숏은 그저 상대가 자신에게 동조해주기를 기대했다. 제프리의 대답이 자신을 합리화해주는 것도 아님을 알았다. 그럼에도 마음 한 편이 가벼워졌다.

“고마워요. 도움이 됐습니다.”

비숏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했다.

‘이건 잘못된 게 아니라, 평범한 걸지도 모르겠어.’

비숏은 제 기숙사로 돌아가서는 책상 앞에 앉았다. 그녀는 노트를 펼치고, 필기구를 손에 들었다. 학습, 연구 환경과 제 침실을 깨끗이 분리해왔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그녀는 노트에 글을 써가며 제 감정과 원하는 바를 정리했다.

라파엘이 불행했으면 좋겠다. 자신이 그를 싫어하고, 혐오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간 지은 죄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비숏은 그의 잘못을 폭로할까 갈등했다. 그의 죗값을 물리기에 적합한, 좋은 수였다.

꺼려지는 건 그에 따를 추문 탓이었다. 자신은 온전히 피해자일 뿐이었다. 당하기만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실만으로도 사교계에서 자기 이야기가 떠돌 것이고, 수많은 입에서 오르내리는 건 덤이었다. 가족들의 눈총도 따가울 것이다. 그걸 버틸 수 있을까? 이걸 감수할 가치 있는 일인가?

비숏은 라파엘이 죗값을 물었으면 좋겠다는 욕구와 제가 감당해야 할 고통을 저울에 올렸다. 저울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평형을 유지했다.

아직은.

비숏은 다음날 제프린을 찾아갔다. 그가 자신에게 지켜주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어릴 적 해준 약속에 불과했으나 제프린은 아직도 그때의 일을 유념한 듯했다. 그라면 제 요구를 들어줄 듯했다.

비숏은 라파엘의 보복이 두려웠다. 어느 순간 느닷없이 사람이 변했으니 언제 다시 돌아올지는 미지수였다. 자신이 당했던 일을 폭로한다면 라파엘이 어떻게 나올까? 적어도 순순히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자신을 지킬 수단이 필요했다.

* * *

동아리방에서 비숏과 헤어진 후, 어딘가 싸하다는 걸 감지했다. 나름 숨긴답시고 숨긴 듯했는데,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내가 지은 죄는 아니더라도 죄인이 된 처지였다. 눈치를 살피는 건 필수. 왜 뭐가 불만일까 곰곰이 고민해봤으나 도저히 알 방법이 없다시피 했다.

그렇다고 비숏에게 찾아가 뭐가 불만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몇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는데, 우선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비숏의 심기를 건드린 건 오히려,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그걸 하지 않아서라 보는 쪽이 옳았다. 그럴 게 방학 중, 그리고 개학 직후인 지금까지 비숏과의 접점은 아무것도 없다시피 했다.

“아아!”

깨우쳤다. 깨달았다. 부지런하게 뇌를 굴린 덕분에 해답을 찾았다. 비숏에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연금술 때문일 것이다.

아카데미에 막 입학했을 때에 난, 연금술에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돈을 벌기 위해서, 비숏의 연구 아이디어를 훔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들었고, 봤던 정보를 몽땅 풀어내며 활동했다.

아마, 내가 다시 연금술에서 획기적인 무언가를 발견 혹은 발명하길 바라는 듯했다.

“이젠 소재가 다 떨어졌는데 어떻게 한다···.”

난 내 기억력을 불신했다. 따라서 비교적 기억이 최신일 때 모든 정보를 작성했고, 쓸 수 있는 거라면 쓰고 봤다. 이제 내게 남은 패 중 연금술은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한다.”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일단은 넘기자.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지금은 익스퍼트의 벽을 깨는 데에 집중한다.

카타리나와 나눴던 토론을 복기했다. 분해했던 검초를 머릿속에서 조합하며 역순으로 식을 정립해놨다. 상황에 따른 호흡과 마나의 흐름은 정해져 있으니 왜 그게 나왔을까 고민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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