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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62화 (62/125)

제62화

카타리나의 훈련에서 대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커졌다. 전에는 서로 칼을 충돌시키며 겨루거나 내가 검초를 선보이면 카타리나가 교정하는 식이었는데, 그게 바뀌었다. 이제는 만나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이 더 크기도 했다.

카타리나도 그걸 느꼈는지 말했다.

“넌 지금 우리가 떠드는 게 얼마나 쓸모 있을 거 같냐?”

“음···. 꽤 많이요. 실제로 도움되는 거 같아요.”

“아니, 그거 착각이야. 지금 네 수준에서는 별로 의미 없을 거다. 왜냐면 이거 비슷한 놈이랑 싸워서 이기는 거잖아.”

“비슷한 놈이랑 싸워서 이기면 좋죠.”

“그게 아니야. 너처럼 한참 성장기일 때는 그 시간에 더 성장해서 비슷했던 놈을 약한 놈으로 만드는 쪽이 빨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나중에 도움되겠네요. 성장기가 끝났을 때.”

“이건 그때 시작해도 되는데···. 아니, 쓸데없는 말을 했네. 그냥 이해가 안 가서 말이야. 네가 왜 익스퍼트에 못 오르는지.”

“카타리나 님은 어떻게 벽을 깼습니까?”

카타리나는 사방으로 퍼진 단발머리에 손을 넣어 긁적거리더니 말했다.

“이거 말하면 다 재수 없다고 하던데, 자랑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는 거니까 그냥 알아들어. 나는 그런 거 없었어. 그냥 하다 보니까 되던데? 익스퍼트에 오를 때가 됐다 싶을 때쯤엔 그냥 익스퍼트에 올랐지. 내가 익스퍼트에 오를 땐 지금의 너보다 약했어. 마법을 빼고 말해도.”

“으음···. 무슨 조건이 있나 봅니다.”

“맥을 넓힐 마나와 마력, 그리고 검술에 깨달음 정도라 생각했는데, 내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나 봐.”

내가 머리를 감싸 안고 끙끙거리고 있으니 카티라나가 검지로 내 이마를 톡 때렸다.

“그렇게 앓지 마. 넌 지금도 빠르니까, 그냥 그대로 유지하기만 해. 열심히 하면 곧 벽을 깰 거야.”

“네, 알겠습니다.”

카타리나의 조언을 따르는 척 대답했다. 대답을 듣는 카타리나도 말하는 나도 이게 거짓임을 알고 있다. 벽에 막혀 있는 상태에서 조급하게 굴지 않는 건 누구에게도 불가했다. 검술에 절절하지 않은 나마저도 그랬다.

그러나 그러려고 노력은 했을 것이다.

이런 일만 없었다면 마음을 비우려 시도는 했을 거다.

* * *

금일 저녁. 수업이 모두 끝나고 해가 져가며 주변이 빨개지는 시각, 제프린이 나를 찾아왔다.

애는 언제나 비장했다. 밥 먹을 때도 음식과 원수진 듯한 눈을 하고 식사하고, 웃을 때도 3초 이상 깔깔거리면 폭탄이 터지는 듯 폐를 조절했다.

평소에도 그런 놈이 한 층 더 눈에 힘을 주고 다가오니 나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내가 뭐 잘못했던 게 있었던가 역순으로 기억을 더듬는 중, 제프린이 말했다.

“반갑습니다. 오늘은 선전포고를 하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저 혼자 준비하고 있는 건 아무래도 비겁한 거 같아서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당신과 싸워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전과는 다릅니다. 이전까지의 당신은 제 또래 검사 중 유일한 경쟁자일 뿐이었습니다. 어린애들이 좋아하는 말로는 라이벌 같은 느낌이었죠. 그런데 어쩌면 당신을 쓰러트리기 위해서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러는 건데? 비숏 때문이야?”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눈을 깜빡였다.

기억을 곱씹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뭘 실수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그렇게 노력했는데, 왜?

“저녁 먹었어?”

“생각 없습니다.”

“비숏이랑 연관이 있는 이야긴데.”

제프린은 이를 악물더니 나를 노려봤다.

입을 조심하라는 거 같은데,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이렇게 예민할까. 좀 캐봐야겠다 싶어 그를 카페 쪽으로 끌고 갔다.

음식을 앞에 두고 떠들면 아무리 과열된 분위기도 풀리기 마련이었다. 우리는 서로 손에 음료 한 잔씩 들고는 말했다.

“너 성급하게 그러면 안 돼.”

“그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 네가 하는 게 진짜 비숏을 위하는 길일까? 아니 생각해봐. 머리가 있잖아.”

손을 들어 제프린의 머리를 가리켰다.

제프린은 턱을 갸웃거리더니 내 손끝을 따라 제 머리통을 만지더니 당황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저한테 머리가 있는 게 무슨 상관입니까?”

“생각할 수 있는데도 생각하지 않는 건 미덕이 아니야. 비숏이 너보고 나랑 싸워 달래?”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말은 했지? 이거 무슨 오해가 생긴 거 같은데, 오해가 생겼으면 풀어야지. 너도 꽤 오래 봐왔잖아. 나 잘 지내는 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알아야지.”

제프린의 저작근이 툭 튀어나왔다. 무언가 꺼낼 단어를 고르는 듯했다.

그에게 말할 내용이 없거나, 말하기 곤란했다면 전처럼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할 텐데, 머리를 굴리는 꼴을 보아하니 반쯤 입이 열린 셈이었다.

이를 충동질하고자 말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방학을 맞고, 다시 개학하고··· 긴 시간이었잖아. 그동안 내가 한 거라고는 수련뿐이었어. 네가 말했지? 선전포고라고. 그러면 적어도 내가 그 이유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뭔데 그러는 거야?”

“최근에 일은 아니었습니다.”

원자에 라파엘은 악당이었다. 글을 전개 시키는 메인 빌런이었다. 힘이 센 악당은 아니지만, 자주 출몰하며 온갖 패악질을 부리는 놈이었다. 그래서 빙의한 타이밍을 보고는 나름대로 안심했다. 이후에 라파엘이 할 짓에 비하면 아직은 만회할 수도 있다고 계산했다.

그게 아니었나.

“너는 비숏이 죽으라고 하면 죽을 거냐?”

초등학생 때 이런 거 많이 말했던 거 같은데.

선생님이 떠드는 애들 이름 적으라고 시키고 그럴 때. 그때는 이거만 말하면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던 거 같은데 제프린은 초등학생이 아닌 탓인지 잘도 말했다.

“예.”

“그러면 비숏이 죽이라 하면 죽일 거고?”

다행히 이번에는 제프린이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도 즉답한다면 어떡할까 무서웠는데 그나마 희소식이었다.

“네가 보기에도 이상하기는 하지? 나도 너랑 경쟁하는 게 막 싫지는 않아. 솔직히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그런데 목숨 걸고 싸우는 건 좀 아닌 거 같지 않냐? 무리한 부탁은 안 할게. 나중에 비숏이 나 죽이라고 하면 잠시만 말려줘 봐.”

“당신을 죽이라고는 안 했습니다!”

제프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러면 뭐라고 했는데?”

“문제 상황이 생기면 자신을 당신으로부터 지켜달라고 했습니다.”

뭐야?

별거 아니었잖아!

나도 어이가 없어서 제프린에게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키웠다.

“야! 이 멍청아! 텅텅아! 고작 그런 거로 뭐 그렇게 분위기를 잡는 거야?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멍청이라니, 아니 텅텅이는 뭡니까?”

“네 머리가 텅텅 비었잖아! 멍청아!”

“그런 거 아닙니다. 말하는 투가 꼭 문제가 생길 것처럼 말해서···.”

“그게 무슨 뜻인데? 그냥 걔가 뭐라고 했는지 그대로만 말해봐.”

“제가 할 거 같습니까? 아마··· 아무래도 직접 문제를 만들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아! 그렇구나! 고마워!”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프린이 말하는 걸 보아하니 어떻게 된 상황인지 얼추 그려졌다. 비숏이 뭘 하려고 하는데, 아마도 그게 내가 싫어할 만한 일인 듯했다. 내가 자신에게 복수하고자 할까 염려해 보험을 심어둔 듯했다.

그런 거구나!

나는 연무장으로 걸어가며 다짐했다. 비숏이 무슨 사건을 터트리더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말자. 아무것도 아닌 일인 듯 넘어가며 감정이 상해도 티 내지 말자. 그러면 괜찮은 걸 거다.

제프린과 헤어진 후에 훈련장으로 직행했다. 늦은 시간까지 칼을 잡고 휘둘렀다. 하루라도 빨리 익스퍼트에 올라야 할 이유가 생겼다. 제프린이랑 목숨 걸고 싸워야 할 일이 없겠지만, 있을 수도 있으니까.

* * *

아무도 볼 수 없게 기숙사로 돌아와 방문을 꼭꼭 닫았다. 기숙사를 혼자 썼지만, 오늘은 만전을 기해야 했다.

카타리나는 절대로 하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익스퍼트에 오를 텐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며 나를 설득했다. 나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내 꿈이 소드마스터인 것도 아니고, 무예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강해지지 않는다고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다. 여유로웠다.

“진짜 하나도 안 위험할 거 같은데.”

마력초를 씹었다. 장갑에 시동을 걸었다. 마나가 증가하고 마력을 강화했다.

내 몸에 마나를 통찰했다. 고작해야 익스퍼트에 빨리 오르겠다고 위험한 바보짓을 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볼 때 이건 눈곱만큼의 위험도 보이지 않았다. 안전한 지름길이었다.

오히려 망설이는 게 멍청할 정도.

몸의 중심에 있는 홀에 집중한다. 마나홀. 심장처럼 작동하며 전신에 있는 맥에 마나를 흐르는 기관.

웅장했다.

마나홀의 중심에 마나를 뭉친다. 넓게 퍼진 마나를 하나의 점에 모은다. 압축과는 달랐다. 포크로 스파게티를 돌돌 말 듯 마나를 뭉쳤다.

이렇게 만들어낸 마나의 뭉치는 보통의 마나 덩어리보다 더 단단했다.

나는 마나 뭉치를 맥을 타고 굴렸다. 두꺼운 뭉치가 얇은 맥을 강제로 넓히며 전진하더니 잔잔한 세맥에 충돌했다.

아으!

예상했지만 강렬한 통증에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참았다. 세맥 앞에서 마나 뭉치를 풀었다.

뭉치는 3갈래로 나뉘어 각각 세맥에 침입했다. 그 후 다시금 풀어낸 마나 뭉치를 덩어리로 말고자 시도했다. 전보다 작지만, 3개의 마나 뭉치가 생겨났다. 이것들을 다시금 굴려 세맥을 넓혔다.

험난한 작업에 이마에서 비지땀이 뚝뚝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긴 인고의 시간 끝에 마나홀을 중심으로 근처의 멕과 세맥을 넓혔다. 하복부에서 흉통까지의 맥은 얼추 작업을 끝낸 후에 몸을 일으켰다.

몸에 에너지를 다 쓴 듯 지쳐서 발걸음을 옮기기도 어려웠는데, 이전보다 몸이 가벼웠다. 시험 삼아 발경을 사용해 걸었다. 쿠웅! 마나를 사용한다는 발상과 동시에 마나홀이 응답하며 몸을 이끌었다.

기대보다 강한 출력에 벽에 머리를 박고 생각했다.

이거구나.

익스퍼트에 오를 열쇠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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