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마나홀에서 가까운 몸통은 빠르게 맥과 새맥을 확장했으나 말단 부위로 갈수록 험난했다.
마나홀에서 만들어낸 마나의 덩어리를 손발의 끝까지 보내야 했는데, 할 때마다 점점 진전은 생겼지만, 확 치고 나가지는 못했다.
맥을 넓히는 작업을 시작하고 며칠이 지나서 카타리나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야. 너, 하고 있구나?”
“하하···. 그게 말입니다.”
“조용히 해. 뒤지기 싫으면. 야. 넌 내 말을 귓등으로 듣냐? 내가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게 말입니다. 카타리나 님께서 걱정하시는 건 이해합니다. 그런데···.”
“닥쳐.”
익스퍼트에 오른 다음에 고백하면 봐줄 거라 기대하고 시작한 작업이었는데, 카타리나의 눈치가 날카로웠다.
“일단은 제 말부터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왜 위험하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압니다. 억지로 마나를 움직여 맥을 넓히는 것은 마나의 순환을 인위적으로 움직이는 것인데··· 여기서 실수로 마나를 역행하게 되면 마나홀에 타격을 가하고··· 마나홀이 깨지게 되면···.”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가진 위험성을 하나씩 토해냈다.
말이 끝날 때마다 카타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부라렸다.
“야. 그걸 다 알면서도 했다는 거야? 미쳤냐?”
“아닙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모든 문제는 마나의 흐름을 역행하는 데서 발생합니다. 그러니까 순행에 맡기면···.”
콰앙!
카타리나가 발을 굴렀다.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까딱 잘못하다가는 몇 년은 다시 마나를 쌓는 데 시간을 허비해야 해. 내가 너한테 쓴 시간이 얼마인데, 그딴 꼴을 봐야겠냐? 너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절대 실수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시끄러워. 널 믿은 내가 등신이지. 이제껏 내 말 잘 따랐잖아. 무슨 일인데 그래?”
“별일 없습니다.”
“날 못 믿겠냐?”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사실 전부터 알고 있었어. 너는 다른 기사들이랑 다르다는 거.”
카타리나는 심장이 위치한 왼쪽 흉곽을 툭 치더니 허리춤에 칼을 매만졌다.
단단한 금속이라 거칠게 다뤄도 끽해야 기스가 날 텐데, 칼의 손잡이를 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명예가 뭐라고 생각하냐?”
보통 때라면 여러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이며 그럴듯하게 말을 꾸몄을 것이다. 카타리나는 명예를 중시한다. 그러니 명예가 아주 가치 있는 무언가인 듯 말해야 했다. 하지만 카타리나의 표정을 보아하니 솔직하게 고해야만 할 것 같았다.
“허세요. 남들한테 자기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 실제 자기 자신보다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해주길 바라는 거요.”
“비슷해. 기사들은 그거에 죽어. 남들이 자기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주길 원해서 목숨도 걸고, 누구보다 강해지길 바라지. 다들 죽을 것처럼 칼을 휘두르는 건 그래서야. 근데 넌 아니잖아.”
카타리나는 연무장 바닥에 주저앉더니 바닥을 보는 채로 말했다.
“이젠 말해줘도 되지 않냐? 넌 뭘 위해서 그렇게 강함에 집착하는 거야?”
바닥을 보고 있는 카타리나에게 보이게 몸을 숙였다. 억지로 웃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를 제자로 삼으셨을 때 탐탐 치 않으셨을 텐데 정말 정성을 다해 가르쳐주셔서 또 지금처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님.”
카타리나를 처음으로 스승이라 칭했다.
현대에서는 안 쓰던 단어. 거기에 막 아카데미에 발을 들이밀었을 때는 카타리나를 내가 성장하기 위해 이용한다는 느낌도 있어 입에 담지 않았다.
“스승님도 멋들어진 제자 하나 만들어서 자랑하고 싶으신 거 압니다. 그를 위해서라면 제가 하루빨리 성장해야 하죠. 지금처럼 억지로라도 벽을 부수려 하는 제 태도를 기꺼워하실 텐데 저를 위해 화를 내주신 것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으음···.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은데 뭐 좀 먹으면서 하는 게 어떻습니까?”
카타리나는 엉덩이를 탈탈 털고 일어났다.
* * *
우리는 기숙사 근처의 공원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카타리나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 말하고 나는 기숙사에서 나비에가 줬던 과자를 챙겨 돌아왔다. 과자를 카타리나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아주 맛있어요.”
“그래. 포장을 보니 카를렌의 상품이네.”
“예? 아시는 겁니까?”
“그래. 유명한 가게지. 잘 먹으마.”
내가 말하는 중에 끼어들지 못하게 카타리나의 입에 과자를 물려준 후에 입을 열었다.
“이게 말하자면 긴데, 제 주변에 위험한 게 있었습니다. 가문에서의 위치도 위태했고, 여러모로 강해져야만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강해지지 않으면 살기 힘들어지니까요. 방학 때까지는 그랬습니다.”
아그작아그작.
카타리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입안에 과자를 빠르게 씹어 삼키고 말하려는 태도에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젠 아닙니다. 과거에 있었던 문제들 다 해결해서요. 이젠 천천히 여유를 즐겨도 됐는데···.”
과자를 다 먹은 카타리나가 끼어들었다.
“됐는데, 왜!”
“하하. 말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진짜 바로 할 수 있을 거 같았거든요. 제 눈에는 위험하지 않은 거 같아서요.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카타리나는 공기를 흡입했다. 코와 입으로 산소를 들이켰다.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숨을 들이쉬다가 한꺼번에 내쉬며 숨을 뱉었다.
“위험해. 잘못될 가능성이 높은 건 아니야. 그래도 하지 마. 위험해.”
“알겠습니다. 걱정 끼쳐 죄송합니다.”
“그래, 전에 있었던 문제는 진짜 다 해결한 거고?”
“네!”
“그걸 왜 이제 말하는데.”
“그야 카타리나 님은 제 검술 선생이지 않습니까? 검술과 연관이 없는 일, 괜히 귀찮은 일에 연루시키면 싫어하실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됐어. 앞으로 잘하기나 해. 앞으로는 무슨 문제 생기면 바로바로 말해.”
“알겠습니다.”
“이번 일은 봐줄게. 앞으로 다시는 나를 속이려 들지 마.”
“네, 명심하겠습니다.”
* * *
카티리나와 거리가 가까워진 듯했다. 능력 있는 스승, 재능 있는 제자에서 조금은 더 인간다운 관계에 들어섰다. 그녀에게 고마웠고. 감사했다.
카타리나는 재능 있는 제자를 들이고자 시도했다.
걸출한 검사 하나를 배출하고자 하려 했겠지. 그녀가 바랐던 건 그거뿐이었다. 자기의 명성을 또 올려줄 무언가를 키우는 것. 그녀가 내게 주의를 기울일 건 내 검술이었다.
그 외에 나머지는 어찌 되어도 좋을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 더 많은 것을 베풀어주었다.
이제는 그녀를 온전히 신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숙사의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단언컨대 이건 안전했다.
직접 마나를 움직여 맥을 넓히는 게 어려운 건, 익스퍼트에 오르지 못한 마나 운용 때문이었다.
익스퍼트에 오르지 못한 검사치고 마나가 많다고 해도 그 활용이나 기술은 처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그간 마법을 익히며 마나의 이해도를 끌어올렸다.
맥을 넓히다가 실수하다니, 나와는 관계 없는 이야기.
물론, 카타리나의 의견도 타당했다. 구태여 위험을 안고 갈 필요가 없는데 내가 미지의 길을 걸어가니 불안할 만도 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 몸을 관조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넓은 맥과 좁은 맥을 구분했다.
한 번 맥을 넓혀 놓으면 다시 좁아지지 않았다. 해당 맥은 넓어진 상태로 그대로 머물렀다. 마나를 흘려보면 맥의 넓이 차이에 따라 그 반응이 크게 차이 났다. 그간 어떻게 이런 상태로 잘도 마나를 썼구나 싶을 지경. 그 어마어마한 차이에 카타리나의 말을 어기기로 했다.
안 들키면 될 거 아닌가.
카타리나가 이를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알 법했다. 몸통에서의 맥 변화는 마나홀에서 가까워 상대적으로 더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몸의 말단에 가까워질수록 마나홀과의 거리가 멀어져 암만 마나를 예민하게 느끼더라도 감지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카타리나는 마법사가 아닌 검사였다. 몸통에 맥 변화만을 알아차린 것으로도 이미 초인으로서의 경지를 입증했다. 결단코 내가 하려는 걸 알지 못할 것이다.
마나를 움직이며 맥을 넓혔다. 그렇게 하나씩 소드 익스퍼트의 계단을 올랐다. 빛이 보였다. 새로운 경지에 다가섰다.
* * *
이안이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나를 찾아왔다. 방학 때 저택에서 먹을 때는 그렇게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의외였다.
나는 그를 만난 김에 지나가는 투로 직접 마나를 유동해 맥을 넓히는 일을 설명했고, 그의 의견을 구했다.
“네 생각은 어때?”
“간단한 작업이네. 지금까지 왜 시작 안 한 건지 의문이 들 만큼 쉬운 일이야.”
“그지?”
이 세상에서 누가 마나를 제일 잘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이안이었다. 이안은 지금 내 수준이라면, 맥을 넓히는 건 무척 간단하다고 대답했다. 그의 말이 맞을 거다.
“그러면 빨리 먹자. 식으면 맛없어.”
“이건··· 그때보다 더 빨건 가 같은데.”
“맞아. 고춧가루를 좀 더 썼지. 원래 그렇게 먹는 거야. 너도 먹을 만하다고 했잖아.”
“매운 강도를 말한 게 아니라 맛의 이야기였어. 거기다 원래 그렇게 먹는다니? 그건 믿기 힘드네. 고통을 즐기는 자들이 많은가 봐.”
이안에게 보여주듯 떡 하나를 찍어 먹었다. 긴 시간에 걸쳐 조금씩 혀를 매운맛에 적응시켜 이제는 어지간한 양의 고춧가루는 버틸만했다. 나는 떡을 다 삼킨 후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진짜 이거 먹자고 찾아오지는 않았을 텐데.”
아카데미에서 이안은 이전 학기와 비교하면 나름대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놀랍게도 성실하게 수업을 들었고, 도서관 등에서도 얼굴을 비춘다고 했다.
애가 용건 없이 찾아올 놈은 아닌지라 그 연유를 물으니 이안은 포크로 떡을 찍다 말고 날 보더니 눈만 깜빡거렸다.
“미안. 진짜 먹으러 온 거였구나.”
괜히 먹는 거로 좀스럽게 구는 거 같기도 했고, 먹을 거 앞에 두고 사람을 놀리는 거 같아 멋쩍었다.
나와 이안 모두 배가 터지게 떡볶이를 먹은 후에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