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오늘은 어때요?”
“눈 화장이 너무 과한 거 같은데. 그거··· 그 붓으로 칠하는 거.”
“새도우요?”
“그래. 그거. 그거는 빼자.”
“저도 거울을 보고 힘이 많이 들어갔나 싶었는데, 딱 하루를 위한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음··· 그래, 그쪽으로는 네가 더 잘 알겠지. 맡길게.”
“아뇨 한 번 브러시를 바꿔볼 테니까, 그때 다시 점검하죠. 지금은 분위기만 잡고, 당일에는 전문가분한테 맡길 테니까….”
나와 나비에는 축제 때를 준비했다. 아직 기한이 2달 가까이 남았지만, 대비는 빠를수록 좋았다. 꽃 축제 때 나비에가 카르테아에게 특별한 꽃을 선물한 후에 고백하라 눈치 줘 고백을 받아내는 계획이었다. 그날을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
우선 당일의 사건을 터트려줄 꽃부터였다. 나비에가 선물할 꽃은 칼시아라는 품종이었는데, 재배 방법은 간단했으나 그 아름다움 때문에 희귀성을 유지하기 위해 종자를 황가에서 독점했다.
시중에 풀린 꽃은 번식이 불가하게 개량된 종이었다.
오직 예쁘다는 이유로 엄격하게 관리할 만큼 칼시아는 보기 좋았다. 스프레이를 사용하지 않아도 일조량에 따라 꽃잎의 색이 다양하게 변했는데, 그 변화가 강렬하면서도 꽃의 깃털처럼 하늘하늘한 잎과 어울려 조화로웠다. 수많은 꽃잎이 암술과 수술을 감싼 형태였는데. 술에 가까운 잎일수록 붉은색을 술에서 먼 잎일수록 푸른색을 띄었다.
우리는 칼시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황태자님의 모친, 그러니까 승하하신 황후께서는 병마에 시달릴 때 이 꽃을 보며 힘을 얻으셨다고 해.”
카르테아가 제 어미와 있었던 기억은 괴로운 것뿐이었다.
출산 후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진 황후는 병중에서 하루하루를 앓아가며 고통에 신음했다. 카르테아가 본 황후의 모습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자거나 고통에 신음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황후는 종종 이 칼시아를 보며 웃었다. 창가에 둔 칼시아가 볕을 쬐며 꽃잎의 색을 바꾸어가는 모습을 보며 즐겼다. 그런 연유로 카르테아 또한 칼시아를 좋아했다. 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칼시아의 아름다움에도 무심했으나 제 어미가 웃었다. 그걸로도 족했다.
카르테아에게 칼시아는 남들에게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남았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응?”
“신기하다는 말이에요. 직접 말했잖아요. 황태자님께서 아무한테도 말 안 한 이야기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아신 걸까요? 가만 보면 참 신기해요. 이런 걸 어떻게 그렇게 쏙쏙 아신대?”
“있어. 그런 게.”
나는 준비해온 칼시아 묶음을 내밀었다. 선물이니만큼 그 포장이 중요했다. 하나는 대중적으로 쓰이는 크래프트지를 이용한 꽃다발이었고, 다른 하나는 좀 더 고급스러운 느낌의 비단과 마를 이용한 꽃다발이었다.
“보편적인 감성으로 생각해보면 크래프트지 보다는 비단이 맞는 거 같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비에는 각각의 꽃다발의 포장을 한 번씩 매만지더니 손뼉을 쳤다.
“음. 그보다는 차라리 꽃병에 넣어 선물하는 게 어떨까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비에가 추가 설명했다.
“꽃을 예쁘게 보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닌 거 같아서요. 황태자님의 기억 속에 향수를 끄집어내야 하니까, 차라리 황태자님께 익숙한 모습으로 선물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나비에한테 엄지를 들어 올렸다.
“좋아. 꽃다발은 그렇게 하는 거로 결정하고 추가로 더 신경 써야 할 거는 뭐가 없을까? 지난번 축제 때는 어땠어? 뭔가 이런 게 있었다면 좋을 텐데 싶은 그런 거.”
“음···. 저도 황태자님도 대화 소재랄 게 너무 작위적인 느낌인 게 조금 걸렸어요. 신변잡기를 한참 하니까 귀족 대 귀족의 만남이라는 인상이 강해서 부담스러웠죠. 볼거리가 좀 더 있었으면 그거로 떠들었을 텐데.”
“그래? 그러면 이번에는 공연단이라도 초대해볼까?”
“어떻게요?”
“돈 써서.”
그렇게 축제를 준비해갔다.
* * *
아카데미의 새로운 학기가 열린 후, 레오는 매일같이 대련했다.
자기 자신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가능성을 채점하고, 자신을 학대하기 위해 이기지 못할 상대에게 도전했다. 그 상대는 대게 나였고, 종종 제프린이었다. 레오는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모조리 패배했다.
패배는 처참했다.
레오는 서로의 검술을 겨룬다기보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처럼 달려들었다. 그는 이기기 위해 별수를 다 썼다. 내게는 말을 하다가 느닷없이 목검을 찔러왔고, 제프린에게는 연습용 대련에서 땅을 차 흙을 뿌리기도 했다. 어떻게든 변수를 만들기 위해 흔히 추잡하다고 부를 짓까지도 저질렀다.
레오는 그러고도 번번이 졌다.
상대와의 실력 차이는 절대적이었고, 한 번의 승리도 허락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가 폭발한 건 나도 제프린도 아닌 어느 상급생에게 진 순간이었다.
제프린에게 일격을 맞고 나가떨어진 레오에게 어느 상급생이 도전했고, 레오는 받아들였다. 상급생은 아버지가 유명 기사단 출신이라고 했던가? 어려서부터 꾸준히 실력을 쌓아온 듯했다. 그는 접전 끝에 레오를 상대로 승리했다.
레오는 또다시 패배했다.
그는 바닥에 머리를 쾅쾅 박으며 절규했다. 흙바닥에 묻었던 얼굴을 다시 들자 흙무더기가 투두둑 떨어졌다. 두 눈에서는 빛을 뿜었다.
광포화였다.
광포화 상태에 레오의 수준이 어떨까 궁금했다, 레오에게 다가가 제프린과 다시금 겨뤄보라 부추겼다. 그러자 놀라운 결과가 발생했다.
꽈앙!
레오가 발을 굴리며 땅을 박차고 제프린에게 돌진했다.
그 속도에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광폭화가 이루어진 상태라고 해도 레오의 몸과 마나로는 낼 수 없는 힘이었다. 레오는 온 힘을 다해 칼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제프린은 황급하게 몸을 뒤로 굽히며 자신과 레오 사이에 칼을 끼워 넣었다.
아슬아슬한 반응이었는데, 제프린은 그 일격에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뭐야?
이대로 레오가 제프린을 상대로 이겨내나 하는 순간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제프린이 봐줬기 때문이었다. 제프린이 검기를 쓰지 않았기에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그럼에도 레오가 제프린을 이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요행도 거기까지였다.
레오는 그대로 제프린에게 득달같이 뛰어들었는데, 제힘을 가누지 못한 채 제프린의 칼등에 몸통을 가져다 박고는 그 충격에 쓰러져 신음했다.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졌지만, 나름대로 의의가 있었다. 광폭화는 본래에 있는 힘을 강화하는 것이지 없던 힘을 만들어주는 게 아니었다. 이안의 광폭화가 큰 힘을 냈던 건, 사용자가 이안이기 때문이라 간주했다.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광폭화는 레오의 손에서도 제 위력을 발휘했다. 이건 써먹을 수 있을 듯했다.
* * *
“야. 너 돈 좀 있냐?”
“음···. 다음 학기 아카데미 등록금까지는 거뜬하죠. 없지는 않은데요?”
“그거밖에 없어? 그거로는 부족한데.”
“무슨 일 있습니까?”
라파엘의 몸에 빙의하고, 아카데미에 와서 한동안 해왔던 작업이 있었다.
바로 돈으로 마나를 사는 것.
마나를 늘릴 수 있는 영약 따위를 돈을 주고 구매해 복용했다.
영약은 대게 고농도의 마나 에너지를 품고 있어 여러 가지에 쓰였다. 주로 아티팩트를 만들거나 마도구의 재료로 쓰였는데, 때로는 사람이 복용해 본인의 마나를 늘리기도 했다.
문제는 복용했을 때 늘어나는 마나가 섭취한 양에 비해 한없이 작다는 점이었다. 효율이 떨어져 어지간히 돈이 많거나 마나가 간절한 이가 아니라면 하지 않는 짓이었다.
레오가 광폭화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건, 그가 가진 마나가 빈약해 흐름을 나눌 수가 없어서였다. 마나 부족만 해결한다면 그도 이안처럼 자유자재로 광폭화를 쓰는 게 가능했다.
이를 설명하니 레오는 활짝 웃었다.
“아, 제가 그 힘을 다루지 못하는 게 다 마나가 부족해서 그런 거였습니까? 그런 거라면 괜찮습니다. 시간이 해결해줄 테니까요.”
레오는 제가 앓고 있는 문제의 해결 방법을 안 것만으로도 만족한 듯했다. 그래선 안 됐다.
“그게 얼마나 걸릴 줄 알고 웃는 거야?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는데. 너는 그 시간을 앞당기고 싶지 않아?”
“할 수 있다면야 그러고는 싶죠.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돈 좀 빌려줄까?”
“예?”
레오를 꽤 괜찮은 놈이라 생각한다. 꽤 성실하고 착실하다. 붙임성도 있고, 인성이 바르다.
하지만 막대한 돈을 투자하는 일이니 친분과는 별개였다. 이건 한두 푼 들어가는 일이 아니었다. 암만 내가 돈이 많다고 해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결정을 내린 건, 레오가 광폭화를 익혔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의 파워업 이벤트로 이안을 작중 후반부까지 강자의 라인에 고정한 힘. 그 잠재력만 따진다면 지금 좀 약하다는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돈을 빌려서 제가 영약을 먹는다고 치면··· 그 빚은 어떻게 갚아야 합니까?”
“일해서 갚게?”
영약의 구매에는 막대한 돈이 들었다. 보통의 노동으로 사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고, 이대로 레오가 잘 성장해 명문 기사단에 들어가 봉급을 받더라도 무리였다. 그가 규모 있는 영지의 주인이 돼 세금이라도 수년간 거칠게 뜯어야 할 금액이 필요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앞으로 네 힘이 필요한 일이 있을 거야. 그때마다 내 부탁을 들어주면 일정 금액씩 변제해줄게. 어때?”
“으음···. 좋습니다!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시민권 소유자를 노예로 삼는 건 불법이었으나, 이쯤 되면 노예로 들인 게 아닌가 싶었다. 아마 수십 년은 레오가 내게 진 빚을 갚긴 힘들 듯했다.
레오는 평민에다가 검술을 제외한 분야에서는 아둔한 구석이 있어 영약의 종류와 금액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내가 구매할 영약의 값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새파래져서는 머리만 끄덕였다.
“그럼 잘 부탁하겠습니다.”
“어. 몸 간수 잘하고 기다려.”
레오와 헤어진 후에 곧바로 구매할 영약을 정리했다. 이거를 먹고 레오가 어디까지 성장할까? 알 수 없다. 설령 광폭화를 자유자재로 다룬다고 해도 익스퍼트에는 본인의 힘으로 올라야 했다. 검기를 쓰지 못하면 결코 검기 사용자를 상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광폭화는 그런 리스크를 지고 갈 만큼 매력적인 힘이었다. 미리 내 편으로 만들어두는 쪽이 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