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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65화 (65/125)

제65화

해가 큼지막하게 뜨고 바람이 솔솔 불었다. 날이 좋았다. 정원에 앉아 나비에와 카를렌의 과자를 나눠 먹었다.

그녀는 내가 과자 하나를 집을 때마다 그 과자에 엮인 역사와 다른 상품들과 차별화되는 장점을 설명했다. 그걸 들으며 과자의 달콤함을 느꼈다.

마나를 익힌 덕인지 혓바닥도 튼튼해 암만 과자를 씹어도 어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아주 강철 혓바닥이 따로 없었다.

“카를렌의 제빵사는 봉급을 얼마나 받을까?”

“으음···. 명예야 황실 근무보다 덜하겠지만, 봉급만 따지면 그들보다 많지 않을까요?”

“내가 부르면 올까? 돈을 더 준다고 하면.”

“저도 카를렌을 이용해야 하니 그런 짓은 말아주세요.”

“확실히. 누구 한 명만을 위해 일하기엔 아까운 솜씨야. 이걸 독점하려는 건 악한이겠어.”

“그럼요.”

잡담을 마친 다음 나비에가 내게 보여준 꽃병을 살폈다. 그녀는 일부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꽃병을 챙겨왔다. 유리 세공은 정교하게 잘 됐어도 문양과 무늬가 없어 수수했다. 그쪽이 꽃에 더 시선이 갈 거라 예상한 탓이었다.

우리는 축제의 준비를 하나씩, 하나씩 끝내고 있었다. 나비에는 그날을 위해서 새로운 드레스를 주문했고, 집안에 부탁해 어느 유명한 분장사까지 모셔올 예정이었다.

“이젠 거의 다 했나? 곧 있으면 중간고사인데 그쪽은 어때?”

“무탈해요. 학업이야 방학 때 대부분 공부하고 와서 성적도 괜찮을 듯하고, 축제만 기다리면 되겠네요.”

“음. 아주 좋아.”

그렇게 축배를 드는 와중이었다. 나비에의 동기 하나가 급히 찾아왔다. 키가 크고 목소리가 높았는데, 나비에가 자주 데리고 다니는 친구라 나도 얼굴이 익은 학생이었다.

그녀는 다급한 어조로, 누구보다 먼저 나비에가 정보를 보고 한다는 사실에 흥분하며 말했다.

“그거 들으셨나요? 곧 황태자님께서 아카데미로 돌아오신다고 해요!”

나와 나비에는 화들짝 놀라 서로 눈을 마주쳤다.

이렇게 빨리?

어딘가 이상했다.

카르테아에게 아카데미란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그에게 아카데미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제 또래 사람들과 어울려본다는 것 이상에 의미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아카데미에 돌아오다니 어색했다.

뭔가 목적이 따로 있는 게 분명했다.

“제가 알아볼게요.”

“응. 맡길게. 뭔가 알게 되는 게 생기면 바로 말해줘.”

“네.”

* * *

2학기는 1학기 때에 비해 여유로웠다. 일정이 너그러웠고, 마음에 짐도 버려 홀가분했다. 그런 연유로 안 하던 짓을 하기도 했는데, 이건 나뿐만이 아니라 이안도 매한가지였다. 2학기에 들어서며 변했다.

얼마 전에 떡볶이를 먹은 일도 그렇고, 이안은 종종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찾아오고는 했다. 주로 할 일이 없을 때 시간을 보내기 위함인 듯했는데, 이것저것을 함께했다. 오늘은 그가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뭔가 하고 보니 아카데미에 뮤지컬 동아리 공연의 표였다.

“이걸 왜?”

“같이 보러 가자.”

“의외네. 이런 거 좋아해?”

“그냥. 가깝고, 시간이 남고, 그냥.”

사람과 대화할 때 이안은 상대의 표정을 빤히 보는 구석이 있었다. 그게 꼭 관찰당하는 거 같아 처음에는 불쾌했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보통에 사람들은 힐끗 보기만 해도 여러 가지를 눈치챌 수 있다. 상대방의 기분이 좋은지 혹은 나쁜지. 반응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그런 것들을 간단히 알아차리고는 했는데, 이안은 그걸 어려워했다.

어린 시절, 카테인으로부터 표정 변화를 주입식 암기로 배워 그걸 실천하며 살아왔다. 애가 이러는 거도 다 그 탓.

이안의 눈동자가 내 입가에 콕 박힌 걸 보고는 양쪽 입꼬리를 위로 잡아당겨 웃었다.

“그래. 그러자.”

이안을 따라 공연장으로 이동했다.

“뭐하는 뮤지컬인데?”

“몰라. 대신에 이거.”

이안이 손에 팜플렛을 보여주었다. 뭔지 나도 아는 것이었다. 이런 팜플렛 가끔 본 적이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의 손에 뭔가를 쥐어 주며 떠드는 외부인 혹은 같은 학생들이 있었다. 물론 나는 당한 적 없었다. 그것도 다 사람 봐 가면서 하는 거지. 애는 마탑주씩이나 되는 놈이 이런 걸 당했대.

공연장의 좌석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공연. 기대는 낮았다. 팜플렛을 보아하니 어디서나 유행할 이야기였다. 노예 출신인 주인공에게 출생의 비밀이 있어 알고 보니 천사였는데 왕가의 공주를 보고 사랑에 빠져 구애했다.

진부해.

팜플렛엔 결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조심스레 공주가 자살해서 죽을 거라 예상해본다.

그래도 언제나 유행을 타지 않고 인기 있을 테마였다. 수십 년쯤 지나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각색되고 변형되며 색다른 재미를 주겠지만, 현대에 살던 내가 보기엔 지루한 구석이 있었다.

“하아암···.”

공연 중에 터져 나오는 하품을 입으로 가렸다. 공연은 그저 그랬다. 배우들의 연기도, 노래도. 특히 음향 쪽이 아쉬웠다.

취미로 공연하는 애들.

누구에게나 친숙할 건반은 연주자의 실력이 출중했으나 금관이나 타악기 쪽은 다소 부족했다. 그나마 고개를 끄덕인 건 노래가 나올 때. 주크박스처럼 이곳에 유명한 가곡들을 가져다 쓴 덕에 나도 들어본 곡이 몇 있었다.

내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그럼 이안은 어떨까. 슬쩍 눈을 돌려 이안의 눈치를 살피니 그는 제법 몰입한 듯했다. 눈알이 빠질 것만 같았다.

의외에 반응에 눈을 깜빡였다. 애도 취미가 있기는 하구나 싶어 공연이 끝난 후에 물었다.

“평소에도 공연 같은 거 보러 다녀?”

“가끔. 표정이 알기 쉬워. 즐거울 때는 어떻게 웃는지, 화가 났을 때는 어떻게 찡그리는지 그런 거, 배우들이 짓는 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답이잖아.”

“연극을 보는 게 그거 때문이야? 재미는?”

“재미?”

“어. 재미. 그게 제일 중요한 거잖아. 다들 재밌어서 보는 거니까.”

“그건 잘 모르겠네. 보고 있으면 시간이 빨리 가기는 하는데.”

“그래? 나는 재미 없더라. 지루했어.”

내 말에 이안은 입을 닫았다. 그는 안구를 움직이며 내 얼굴 어디에 주름이 생기지는 않는지 확인했다.

“다들 취미로 해서 그런 건지 연기가 별로더라고. 이야기도 그렇고. 그래서. 아쉽더라.”

“미안. 내가 시간을 뺏었네.”

“어. 그러니까 다음에는 재밌는 거로 보러 가자. 표 비싼 데로. 극장 큰 데로.”

이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현대에 살 때 몇 번인가 뮤지컬을 본 적이 있었다. 누나가 좋아하는 어느 배우가 출현한 탓이었다. 푯값은 비쌌다. 연말이기도 했고, 제작비 비싼 라이센스 뮤지컬이기도 했다. 그걸 본 내 감상은? 글쎄. 잠을 자지는 않았던 듯했다.

음악은 그럴듯했는데, 배우에 연기가 별로였다. 한 배우가 주에 모든 공연을 소화하는 건 부담스럽고, 공연당으로 스타 배우에게 줄 출연료를 주는 제작자로서도 여러 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아마 나와 누나가 본 뮤지컬은 우연히도 남녀 배우가 처음 합을 맞춰보게 된 듯했다. 뭐, 자기들끼리 문제가 있었겠지.

누나는 정식 무대 개막 후 일주일은 리허설이라며 다시금 나를 부추기는 통에 다시금 봤을 때도 별 감흥은 없었다.

이번에는 다를까?

다음에 같이 밥 한번 먹자는 말에 그 주의 주말에 약속을 잡는 사람은 없는 법인데, 이안은 어딘가 달랐다.

어디서 구해온 건지 유명 극단의 표를 내밀었다.

“너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비싼 데야.”

“그래. 그냥 티켓인데 반짝반짝 칠해놓은 거 보니까 그래 보이네.”

표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제국일극단

수도에 있는 가장 인기 있는 극단이었다. 제국일극단은 전용관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탓에 객석과 무대가 가까웠는데, 이안이 가져온 표는 그중에서도 무대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마 무대에 가까울수록 좋은 줄 알았겠지. 다행히 내 목은 튼튼했다.

우리는 표에 명시된 좌석에 앉았다. 나는 뻣뻣하게 머리를 든 후에 말했다.

“자리 좋네.”

“어. 제일 앞에 있는 거. 배우들 표정 잘 보이는 거로 골랐어.”

“너 돈 많아?”

“많아.”

“하기야 그렇겠지.”

오픈런을 한지 수년이 지난 공연. 그 퀄리티는 보장된 바였다. 나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몸에서 힘을 뺐다. 이안한테 어울려준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냥 공연을 즐기고자 했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르며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괜찮았다. 연기도 음악도 출중했다. 그렇게 공연에 몰입하고 있을 때 옆에 시선이 신경 쓰여 슬쩍 눈치를 살폈다.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도 내가 지루했다고 불평할까 걱정하는 듯했다.

애가 뭐 이리 무거워.

마음 편하라고 일부러 공연을 보며 웃었고, 감탄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아카데미에서 본 공연이 지루했던 건 맞지만, 그게 마음에 담아두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내가 무신경했다. 실수였네.

배우들의 연기에 과장되게 몰입하는 척하며 웃고, 찌푸리고, 놀라워했다. 그러고 있으니 이안이 귀에다 대고 말했다.

“연기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너 다 티나.”

“다음에는 더 잘해야겠네.”

애가 남들 표정 관찰한 게 몇 년인데, 내가 어수룩했다.

“연기 같은 거 하지 마. 불편하니까.”

“누구나 조금씩은 하면서 살아. 꼭 상대가 네가 아니라도. 다 그래.”

“내가 불편해서 그래.”

“시도는 해볼게.”

귓속말이라도 이렇게 떠들어대는 게 주변에 거슬릴 게 뻔하니 입을 닫고, 공연에 집중했다. 그냥저냥 볼 만했는데, 눈에 띄는 배우가 있었다. 연기 혹은 가창에 문제가 있는지 엑스트라 역을 맡았는데, 외모가 비범했다. 누나의 전작에서 묘사됐던 인물인 거 같기는 했는데,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그냥 미형 배우를 쓴 게 아닐까?

이걸 이렇게 넘어가도 괜찮나?

누나는 종종 전작에 캐릭터를 출현시키고는 했다. 비중은 적었고, 그 전작을 읽지 않아도 그냥 그런 모양이다 하고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냥, 그렇게 쓱 지나가기만 해도 좋아해 주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세계관이 다 똑같다는 거 아닌가.

공연이 끝나고 팜플렛으로 배우의 이름을 확인했다. 아는 이름이었다. 누나의 첫 작에 등장했던 캐릭터. 밥 먹고 가자는 이안을 닦달해 아카데미로 돌아왔고, 도서관을 뒤졌다. 뭐가 뭔지 알아야 할 거 아닌가. 어느 작품이랑 연결된 거고, 어느 작품이랑은 연결되지 않은 건지 확인해야 했다.

“문제는 없을 거야.”

황태자, 북부대공, 마탑주 같이 희귀 캐릭터가 둘씩이나 있지는 않을 거다. 클리셰적인 캐릭터들은 겹치지 않을 테니 이어진 작품은 적을 거다. 나는 책을 뒤져가며 이곳에 역사 따위를 다시금 읽었다.

다행히 역대 황족이나 명문가, 마탑의 주인 등등의 이름을 살폈을 때 눈에 띄는 건 없다시피 했다. 그렇다면 작품이 이어진 건 하나라고 단정 지어도 되겠지.

공연장에서 본 배우에 이름은 프리실라. 원작에서 패배한 악녀 캐릭터였다. 패배 이후에는 뭐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싶었는데, 그래도 얼굴 덕에 먹고는 사는 듯했다.

“위험 요소는 없는 거 같네.”

이어진 두 짝은 천사가 돼 하늘에서 보고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설정이었다. 아마 만날 일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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