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이게 전부예요? 전보다 돈 더 썼는데 양이 좀 적은 거 같아서요.”
“네가 매물을 싹 쓸어 갔는데, 당연히 시세가 오르지. 그거도 싸게 산 거야.”
“매물을 싹 쓸다니요? 그 정도는 아닌데”
“이런 거 대부분은 다 마탑이나 학회에서 고정으로 계약된 경우가 많아. 시중에서 개인한테 판매하는 건 극히 일부인데 네가 다 사 간 거지.”
“아아. 그렇긴 하겠네요. 고생하셨어요.”
“이거 가지고 뭘. 근데, 요즘에는 연금술 쪽은 손 놓았나 봐? 얼굴 보기 힘드네.”
“네. 칼 휘두르는 게 더 재밌네요. 지금은.”
“그래도 가끔은 여기 들리고 그래. 필요할 때만 가끔 찾지 말고.”
“알겠습니다.”
길버트에게 부탁해 레오에게 먹일 영약을 배송받았다.
꽤 큰돈을 썼는데도 양은 내가 이제껏 사용한 것보다 적었다.
길버트가 중간에서 해 먹지는 않았을 테니 영약 값이 오른 듯했다.
나는 품에 영약을 기숙사로 옮긴 후에 레오를 호출했다.
영약을 보는 그의 눈이 반들반들 반짝거렸다.
두 눈에 기대감이 서렸다. 반대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걸 보아하니 무섭기도 한듯했다.
“제가 평생 일해도 과연 이걸 갚을 수 있을까요?”
“그런 걱정이라면 이미 늦었어. 구매하기 전에 충분히 고민했어야지. 이미 사버린 걸 어떡해. 팔아봤자 수수료만 잃을 뿐인데. 명심해. 이거 다 네가 먹어야 해”
레오는 침을 삼키더니 숨을 내쉬었다.
“네. 그렇죠···.”
“단약으로 조제한 것들은 매일 밤낮으로 마나연공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씩 먹어. 그 외에 나머지는 복용 방법이 따로 명시되어 있으니까 확인하고.”
“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란 거 알고 있는데, 혹시나 싶어서 일러두는 거야. 다 네가 먹어야 해. 하나도 남기지 말고. 누구 하나 준다거나 어디 판다거나 하면 안 된다.”
“절대 안 그럽니다. 저도 간절해요.”
“그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레오는 내게 머리를 숙였다.
그 태도가 꼭 상전을 모시는 듯해 불편했다. 이건 그런 게 아닌데. 나는 그의 머리털을 잡아당겨 억지로 머리를 일으켰다.
“착각하지 마. 기회를 준 게 아니라 거래를 한 거니까. 야. 네가 먹는 이거 다 빚이야. 나중에 꼭 갚아야 하는 거라고. 어?”
“네! 2배로 갚겠습니다. 꼭이요!”
“2배면 얼만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야?”
“그러면 50프로만 더 해서···.”
“됐어. 원금이나 까먹지 마.”
레오는 떨리는 손으로 단약 하나를 쥐었다.
“그럼 지금 한 번 먹어볼까요?”
“먹고서 바로 연공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니, 일단 나도 궁금하니까 해보자.”
내 말이 끝나자마자 레오는 단약을 입속으로 넣었다.
그는 단약을 삼키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나도 저게 무슨 느낌인지 알고 있었다. 몸 안에 힘이 꽉 차는 기분.
단약을 먹은 직후에는 뭐라도 할 수 있을 거 같은 전능감이 몸을 감쌌다.
“바로 연공해.”
“예.”
레오는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는 눈을 감더니 곧바로 이마에서 땀을 흘렸다.
단약을 소화하는 게 어려운 듯했다. 왤까?
아마 그가 가진 마나가 적기 때문일 거다. 나와는 경우가 달랐다.
단약을 온전히 흡수하기 위해서는 본래 가지고 있던 마나로 잡아당겨야만 했다.
그 줄다리기가 레오는 까다로울 거다.
그는 한참을 끙끙 앓며 신음했다. 이걸 구경하고 있기는 뭐해 나도 따라 연공에 들어갔다.
마나로 몸을 한 바퀴 훑었다. 열린 맥에 상태를 보아하니 곧 있으면 익스퍼트에 오를 듯했다.
전신에 맥을 한 번씩 톡톡 건드려준 후에 눈을 뜨니 레오가 땀 범벅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도 처음에는 영약을 소화하는 게 녹록지 않았다.
그래도 큰 고난 없이 넘어갔던 걸 보면 내가 몇 발자국은 앞선 곳에서 출발하긴 했다.
레오는 늦었다.
여러모로 뒤처진 출발선에서 한참 늦게 시작했다. 그러니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겠지.
그럼 레오가 불쌍한가? 그건 아니라고 본다. 그래도 팔다리 온전하게 달려 있고, 나 같은 행운을 만났지 않는가? 그거면 된 거지.
잠시간 레오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그가 눈을 떴다. 그는 힘든 시간을 보냈을 텐데도 힘껏 웃었다.
“마나가 늘었습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마나가 늘었습니다! 제가 2달은 해야 할 양을 한 번에!”
“잘됐네.”
“감사합니다. 정말···.”
“그만해. 아까도 했잖아.”
“네···.”
“효과는 봤으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 늦었네.”
“네. 내일 뵙겠습니다.”
* * *
가부좌를 틀고 바닥에 앉았다. 요 며칠간 빠르게 맥을 넓혀왔다.
이제 남은 건 몸에 말단인 손과 발뿐이었다. 손은 몸 전체에서도 가장 마나에 예민한 부분이었고, 발 또한 기동력을 관장하니 몹시도 중요한 기관이었다. 이 둘까지만 끝내면 이제 익스퍼트에 오른다.
이번 일을 끝내면 익스퍼트였다.
기분은 아리송했다. 그냥 그렇구나. 제프린에게 선전포고를 받고는 언젠가 있을 싸움에 대비해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꼭 싸울 마음은 없었다. 남이랑 다투는 게 뭐가 좋다고.
말로 풀 수 있으면 풀어야지.
그래도 그간 해온 게 아까웠다. 고지가 코앞에 보이는데, 괜히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만 하며 뭉그적거리는 건 아둔한 짓이었다. 오늘 오랫동안 오른 산의 정상에 깃발을 꽂는다.
손발까지 마나 덩어리를 굴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강한 마나가 필요했다.
나는 약초를 하나 씹었고, 장갑에 시동을 걸었다. 그 후 눈을 감으며 집중했다. 마나 덩어리를 만든다. 이를 굴리며 민다. 맥을 넓힌다.
한 번 넓어진 맥은 더 수월하게 마나를 받아들였다. 차근차근 벽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벽은 찢어지듯 벌어졌다.
밤이 새고 날이 밝도록 이에 열중했고, 꽤 긴 시간 달려왔던 길의 끄트머리에 도착했다. 그 순간 나는 마나홀의 중심과 손발의 끝이 이어졌음을 깨달았다. 마나를 흘리고자 생각하는 즉시 전신으로 이동했다.
고대했던대로 소드 익스퍼트에 올랐다.
작업을 끝내고 손등으로 이마에 땀을 닦았다.
그래, 여기까지는 좋았다. 원하던 대로 익스퍼트에 올랐으니 만족할 법했다.
다만, 이걸 카타리나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 왔다. 익스퍼트에 올랐다는 걸 분명히 눈치챌 텐데.
뭔가 수를 하나 구해야 했다.
물론 내가 익스퍼트에 올랐다고 하면 카타리나도 기뻐하며 축하해줄 것이다.
어쩌면 카타리나는 내가 바랐던 것 이상으로 내가 익스퍼트에 오르길 기대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게 서로 목소리 높여가며 다퉜던 게 얼마 전에 일이었다. 카타리나가 보기에 무리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게 그때인데 벌써 익스퍼트에 올랐으니 분노가 따르는 건 당연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익스퍼트에 올랐음을 숨겨야 하는데,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그녀를 피해 다니기 어려웠고, 혹 마주치기라도 했다간 바로 발각당할 당할 것이다.
뭔가 방법을 구해야만 했다.
* * *
루인 제국의 황제 자리는 다소 옛 중국 같은 면이 있었다.
중국이 하늘의 뜻을 받아 천자가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과 비슷한 선민사상. 황가에는 용의 피가 흘렀다.
중국과 다른 건, 이건 황족을 추앙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화가 아니라 진실이었다. 초대 황제는 무려 인간으로 변신한 드래곤이었다고 한다.
초대 황제의 피를 이은 카르테아의 몸에도 용의 피가 흘렀다.
그가 마나를 쓰지 않고도 어마어마한 괴력을 발휘하는 게 이 덕이었다. 그의 몸에 흐르는 용혈은 나라에 근본과도 같은 성스러운 피였다.
이러한 국가적 특징 때문에 루인 제국에서 황제로 등극하기 위해서는 치러야 할 의식 같은 게 있었다. 초대 황제가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둥지에 방문해 제사를 지내는 일이었다. 이를 황제의 길이라 불렀다.
과거에는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질 때까지 둥지에서 머무르고는 했다는데, 그런 종교적인 관행은 사라져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동부까지 여행하며 사회를 둘러본다는 느낌이 강했다.
황태자는 제 호위들만을 대동한 채 둥지를 방문해야만 했다.
“황제의 길에 황실 기사단의 일부를 대동하는 게 관행이나 이에 이목이 지나치게 쏠린다 하여 호위에 질을 높이는 대신 숫자를 줄이려 한다. 자네의 경우, 소드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이니 이에 적격이야. 자네에게 부탁하지. 나를 도와주겠나?”
“제가 말입니까?”
“그래, 거부할 텐가?”
“아닙니다. 제가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예. 따라가겠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카르테아가 내게 둥지까지 동행하기를 요구했다.
표면상의 이유로는 실력 있는 놈이 필요하다는 거겠지만, 황실 기사단쯤 되면 나와 비슷한 수준의 기사라면 수두룩할 것이다.
구태여 평소 서먹하던 나보다는 자신을 상전 모시듯 받드는 데 익숙한 기사단에서 인원을 차출하는 게 편할 텐데 왜 나한테?
카르테아가 용의 둥지를 찾아가는 시점이 원작보다 반년은 앞당겨졌다.
원작에서는 비숏을 놓고 아가레스와 이안을 상대로 경쟁력을 더 높이기 위해 황제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을 익히고, 얻고자 다짐한 후에 둥지를 방문하고자 했다.
그 시기가 당겨졌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비숏이 아닌 나비에 때문이겠지. 그런데 경쟁자라고 할 인물도 없는데 구태여 이렇게 서두르는 건 어색한 감이 있었다.
혹시 이거 내 탓인가?
카르테아는 이미 호위를 충분히 데리고 있음에도 추가로 나를 지목했다.
내가 익스퍼트에 올랐다고 알려졌고, 호위 무리에 끼기에 충분한 실력이기는 했어도 왜 하필 나였을까?
황족과 인연을 만들어두는 일이었고, 엄격하게 따지면 카르테아에게 빚을 지우는 일이었다.
카르테아도 이를 인지했을 텐데, 내게 부탁했다. 기이했다. 아무래도 카르테아는 본인이 없는 사이에 내가 나비에와 긴밀한 사이가 될지 걱정한 듯했다.
이번 여행길에 오해를 확실히 풀어둬야겠네.
둥지까지의 거리는 제법 되었다. 빠르게 간다고 해도 2주는 족히 걸렸다. 거기서 제사를 지낸답시고 시간을 또 쓸 테니 1달은 소모할 것이다.
“으음···.”
축제 준비가 다 끝난 시점에서 없던 일로 무르자니 아쉬웠다. 축제 전에 돌아올 수 있도록 애를 써야겠다.
“곧바로 떠날 준비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