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명색이 황태자가 낀 여행길이었다. 뒤에 달린 시종만 해도 바글바글했으니 여행할 날이 길다고 해도 열악한 야영은 없을 테고, 쾌적할 것이다.
그 덕에 여행을 준비하는 짐가방은 단출했다. 간단하게 짐을 싼 후에는 나비에를 만났다.
“축제가 되기 전에는 돌아올 수 있을 거야. 혼자서도 준비 잘할 수 있지?”
“네. 이왕이면 몇 가지를 더 같이 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요. 문제없어요.”
“응. 믿어.”
나비에는 히죽거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보다는 황태자님께서 왜 굳이 아카데미까지 돌아와 호위를 추가로 대동하려는 걸까요? 안전 때문이라면 기사단에서 인원을 더 차출해도 될 텐데.”
“내가 마음에 안 드나 봐. 그러니까 딱 꼬집어서 뽑아가지.”
“하하, 그럴 리가요.”
“오해가 있는 거 같아서. 이번 기회에 풀려고.”
“잘 됐으면 좋겠네요.”
“나도 내가 잘 됐으면 좋겠어.”
나비에한테 몇 가지를 더 당부하고, 일러주고 주의할 것을 언급한 후에 카르테아에게 향했다.
카르테아는 불편한 인물이었다.
말 한마디로 나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인물.
상황에 따라서는 나를 죽일 가능성도 있으니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긴장되곤 했다. 자연히 몸을 사리고, 조심하게 되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원작에서 그가 라파엘을 적대했던 건, 오로지 비숏으로 인한 문제였다.
지금은 그 연관점을 지웠으니 그가 나를 해칠 가능성은 적었다.
딱 하나, 걸리는 건 나비에로 인한 질투. 그것도 이번 기회에 풀면 되니 마음을 가볍게 먹자.
카르테아는 아카데미에서도 언제나 호화로운 옷을 입었다.
자기가 이곳에서 제일 높은 놈이라는 걸 자랑하듯 이것저것을 추가로 걸치곤 했는데, 오늘은 예외였다.
이미 이 많은 무리가 우르르 몰려가는 이상 눈에 띌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겉모습은 맞추는 것인지 호위들과 비슷한 복장이었다.
그럼에도 햇빛을 받아 금발이 번쩍번쩍하니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바로 그에게 찾아가 인사했다.
“아직 챙길 게 몇 가지 더 있으니 잠시 기다리게. 그동안 수다라도 떨지. 어떤가?”
“저야 황태자님과 담소를 나눌 수 있으니 좋습니다.”
“그래··· 자네는 학기가 끝나고 뭘 하고 지냈나?”
“가문에서의 일을 처리하고, 아카데미에서 사귄 학우들을 만나곤 했습니다.”
“학우라니?”
“황태자님께서도 아실 아가레스 대공과 현재 마탑주를 맡은 이안 등이 있습니다. 그들을 만나러 여러 곳으로 이동했죠.”
“흠, 그런가.”
카르테아는 턱을 쓰다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짐을 싣고 있는 시종들에게 눈길을 한 번 주더니 말했다.
“그 외에는? 다른 학우를 만나지는 않았나?”
카르테아의 어조에는 은근히 원하는 바가 숨어 있었다. 이쯤 되면 모를 수가 없다. 조만간 모든 걸 말할 테니 솔직하게 고해도 될 듯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나비에를 만났습니다.”
“왜?”
“제가 도와준 일이 있어 그 보답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과를 조금 받았죠. 그게 전부였습니다.”
“도와주다니? 뭘 말인가? 그때 펜싱에 일을 말하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따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뭔가?”
아직 모든 걸 고백하기에는 시기가 일렀다. 잠시간 머리를 구한 후에 대답했다.
“교과 과목에 학문과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그렇군.”
그때 시종으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다가왔다.
그는 준비가 끝났다고 보고했고, 카르테아는 가만히 턱만 까딱거렸다. 그걸 시작으로 주변에 흩어져 있던 기사들이 다시금 모였다.
기사들은 기동을 위해 갑옷을 벗었는데, 딱 한 명 헐렁한 옷가지 밑에 갑옷을 더한 이가 내게 다가왔다.
“황실 기사단에 부단장, 질리엇이라 합니다. 황태자님의 부탁으로 호위에 합류했다고 들었습니다. 귀중한 일에 함께해주신 점 감사합니다. 하지만 직접 힘을 쓰실 일은 없을 겁니다. 호위로는 기사단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질리엇은 서른 후반 혹은 마흔 초반 정도로 보이는 기사였다. 아마 실제로 이보다는 열 살은 더 많을 것이다.
그는 내게 나서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충고했는데, 나로서는 반가웠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칼을 써야 할이 생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어찌 보면 그의 말투가 공격적이긴 했지만, 그냥 사람의 천성이 그런 것일 뿐 내게 적의가 있는 건 아닌 듯했다.
꽉 다문 입과는 별개로 눈은 서글서글 웃고 있었다.
그래, 보통 기사들이 보기엔 나는 천재였다. 그냥 천재가 아니라, 자타공인 천재인 검성, 카타리나가 키워낸 천재였으니 재능 확실한 유망주 느낌이겠지.
카타리나가 내가 익스퍼트에 올랐다고 광고한 후에 허리춤에 칼 찬 사람들로부터 이유 모를 호의가 느껴지고는 했다. 이 기사 아저씨도 그랬다.
“황태자님을 호위하는 기사단으로써 맡은 역할에 다하겠으나 나중에 혹여나 시간이 되면 검술을 겨뤄봅시다.”
“예, 시간이 나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는 언제라도 좋습니다.”
“예···.”
* * *
여행길은 단출했다. 제국 주변을 둘러본다는 명목과는 다르게 둥지를 향해서 말을 몰며 일직선으로 달려 나갔다. 어쩌면 예상했던 것보다도 빠르게 제사를 마칠 수도 있다는 감상이 들었다. 이럴 거면 말을 타고 갈 게 아니라 열차 따위를 타고 가도 될 게 아닌가 싶을 수준.
“자네는 아카데미에서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듯해 내 궁금한 게 생겨 몇 가지를 알아봤네.”
“아··· 그러십니까?”
“그래, 그러니 흥미로운 게 많더군. 재산이 근래에 들어 크게 불었어.”
“세금은 꼬박 내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아니야. 음··· 자네도 나이가 찼으니 고민해봤을 문제인데 혼인은 언제쯤 할 건가?”
“아직은 생각 없습니다.”
“왜? 어울리는 짝을 못 찾았나?”
“제게는 너무 먼일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가···.”
여행 중에 카르테아는 이따금 내게 말을 걸었다.
사실 연배가 맞고, 조금이라도 공통점이 있는 건 우리 둘 뿐이기도 했다. 호위로 따라온 기사들은 나이가 많기도 했고, 나 이상으로 카르테아를 어려워했다.
카르테아도 그를 느꼈는지 나를 말동무 삼아 옆에 거느렸다.
“자네도 그렇지만 내 혼사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살면서 여러 가지 목표를 설정해왔네.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고, 또 실패하기를 반복했지. 그러면서 깨달았네. 목표를 지나치게 높게 잡아버리면 나 혼자만 깨지는 법이었어.”
“예.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합니다.”
“이 깨달음은 내 결혼 문제에도 녹아들어 목표를 잡게 했네. 그래서 제국에, 황가에 이득이 될 상대와 결혼하기로 했지.”
잠자코 카르테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럴 게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 아닌가? 적어도 내게는 그랬어. 우리 뒤를 지키는 기사들에 비하면 어리다 해도 한참 사랑 타령할 나이인데, 누구에게도 끌린 적이 없었거든.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건 내게 너무 높은 목표였던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높이 있던 목표가 내 손에 떨어지더군. 난 가만히 있었는데,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지.”
“잘됐네요. 축하합니다.”
“그래··· 그런데, 인제 보아하니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하나 있더군. 내가 좋아하는 대상이 나를 받아들인다는 보장이 없지 않나?”
“에이···.”
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카르테아가 머리통을 갸우뚱거렸다.
“신분이 황태자에다 외모도 출중하시고, 뭐 이거저거 더 하면 더할 나위가 없는 배우자신데, 누가 거부하겠습니까?”
“자네도 알 텐데.”
“아닙니다. 나비에 말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입을 열자 역으로 카르테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좌우에 눈썹을 한 번씩 까닥거리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유를 하나하나 들자니 너무 많은데, 다 말하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좀 줄여서?”
“줄여서.”
“그야 황태자시고, 외모도 출중하시고, 뭐··· 누구나 원할 배우자니까요?”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번 기회에 괜한 오해를 풀고자 했다.
“그, 왜 저한테 이런 이야기 하시는지 알 거 같기는 합니다. 저랑 나비에랑 친하니까 뭐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하신 거 아닙니까?”
카르테아는 여전히 입을 닫고 있었다.
여기서 맞다 혹은 아니다를 확실하게 말해줘야 내가 말을 더할 텐데 답답하게 구니 잠시 망설여졌다.
“으음···. 황태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염려하실 그런 상황은 없을 거란 거만 미리 말씀드립니다.”
“믿겠네.”
* * *
카르테아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다른 기사들과 대화했다. 그들에게 익스퍼트에 올랐을 때에 경험담을 물었다.
“이미 익스퍼트에 오르셨으니 아실 테지만, 이게 어느 하나만 잘한다고 오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의 경우에는 검술이었죠. 집안에 마나 연공법이 꽤 쓸만한 편이라서 마나는 빠르게 모았는데, 검술이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아아. 보통 그런가요?”
“아뇨. 제가 특이한 경우였고, 보통은 검술은 경지에 오르지만 마나 연공이 부족해 익스퍼트에 오르지 못하는 게 많죠.”
“검술이나 마나가 충분한데도 오르지 못하는 경우는요?”
질리엇의 검술은 카타리나와 비교하면 한참 부족했다.
주어진 재능이 달랐으니 오를 수 있는 산이 달랐고, 그게 둘의 수준 차이로 나타났다. 그러나 질리엇이 경험 하나만큼은 카타리나라보다 다양했다.
우선은 나이부터가 많았고, 백사자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근무하며 여러 기사들을 만난 까닭이었다.
“으음···. 저는 본 적이 없지만, 이론상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나라는 게 몸에 쌓이자마자 전신에 퍼지는 게 아니니까요. 모아놓은 마나가 시간이 지나며 혈액처럼 흐르고 맥을 넓히는 탓에 급격하게 마나를 쌓았다면 익스퍼트에 오르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죠.”
“아아.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제가 그 경우였나 봅니다. 분명 익스퍼트에 오를 실력인데, 머뭇거리자 스승님이 걱정하셨었습니다.”
“스승님이라면 카타리나님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그분이야 워낙 젊은 나이에 경지에 올랐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