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행길에 습격 같은 건 없었다.
황태자의 이번 여행을 아는 이 자체가 소수일뿐더러 설령 안다고 해도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그의 주변을 지키는 10명의 소드 익스퍼트 급 기사들을 제외해도 카르테아는 강했다.
홀로 10명의 기사들을 상대할 수도 있을 정도.
그러니 소드마스터라도 데리고 오는 게 아니라면 카르테아의 길을 막는 건 불가했다.
그리고 이건 우리도 잘 알았는데, 그 덕분인지 분위기는 가벼웠다.
“호오··· 북부에 가 아가레스 공작과 함께 마물을 잡아? 그럼 그의 실력을 견식했다는 거 아닌가? 소문대로 그리 용맹한가? 나와 그가 싸우면 누가 이길 거 같나?”
일단 설정상으로는 아가레스였다. 아가레스는 죽지 않으니 상대가 누구라도 승리할 수밖에.
“아무래도 황태자님 아니겠습니까? 아가레스 대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황태자님께 비할 바는 아닐 겁니다.”
“하하. 자네와 아가레스 공작은 제법 친한 듯한데, 내가 이를 그에게 말해도 괜찮나?”
“죄송합니다···. 한 번만 봐주시죠.”
“왜? 사실인데 곤란할 게 어디 있다고?”
카르테아의 나를 향한 이유 모를 적의는 옅어졌다.
아마 며칠 전에 나눈 그 대화 때문인 듯했다. 이제 내 위치가 경쟁자에서 시어머니 비슷한 무언가로 옮겨갔다. 카르테아는 농을 곁들이며 나와 대화했다.
“그 마법사와는 공연을 봤다고? 어디서? 아… 그 극단이라면 나도 이름을 들어본 적 있네.”
“예···.”
우리는 이동에 이동을 더했다.
카르테아는 뭐가 급한 건지 쉴 새 없이 말을 몰았다. 나나 다른 기사들은 몰라도 따라가는 시종들 처지에서는 죽을 맛이었었는데, 둥지에 가까워질수록 그랬다.
드래곤의 둥지는 드래곤의 보금자리였다. 주로 취침 장소로 쓰이는 까닭에 그 크기부터가 방대했다. 누구나 잠을 자면서 조금씩은 뒤척이는 법인데, 드래곤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었다. 몸을 옆으로 굴리기도 하고, 기지개를 피듯 꼬리를 휘두르기도 하니 그 둥지의 크기도 따라 커졌다.
거기다 수면 중에 잡음이라도 들리면 신경에 거슬려서 깊게 잠들 수가 없으니 조용한 장소를 찾아 외진 곳에 자리했다.
둥지에 가까울수록 편의 시설 따위가 드물어지니 천막을 치고 노숙을 하는 빈도가 늘었다.
그래도 무리한 일정을 소화한 덕에 둥지 인근까지의 도착은 예상보다 빨랐다는 점에 만족했다. 일주일 만에 둥지까지 왔으니 얼마나 빨랐나 감이 왔다,
“여기서부터는 황태자님 혼자서 가셔야 합니다.”
“알고 있네. 그럼 갔다 오지.”
질리엇의 말에 카르테아는 말에서 내려 술을 챙기고는 산을 올랐다.
저 산꼭대기에 루인제국에 초대 황제이자 드래곤의 둥지가 있었다. 거기서 카르테아가 술을 뿌리고, 기도를 마친다면 일정은 끝이었다.
카르테아는 한 걸음씩 움직이며 산을 올랐다. 이를 본 질리엇이 말했다.
“황태자님께서 일을 마치시는 데는 족히 반나절은 걸릴 겁니다. 시간이라면 충분한 거 같은데, 한 수 나눠봐도 되겠습니까?”
여행 첫날에 했던 그 이야기인 듯했다. 괜히 칼을 뽑고 땀 흘려가며 힘쓰기는 싫어 솔직하게 말했다.
“여행 중이라 피곤한 탓에···. 죄송합니다.”
“아뇨, 뭐. 이해합니다. 제가 이기적이었네요. 그럼 다음에 다시금 부탁하겠습니다.”
질리엇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 * *
제사를 마치고 복귀하는 길에는 마차를 탔다.
카르테아와 그를 지키는 호위기사들은 황실로 돌아가 보고를 올린다고 했다. 아카데미로 가는 나와는 행선지가 달라 그들과 헤어지기로 하였다. 이번에는 특별히 나선 게 없는 데도 바라는 대로 일이 잘 풀렸다.
“아카데미에는 언제쯤 돌아오실 생각입니까?”
“황실에서에 일을 감안하면 2주 정도가 지나서겠군. 그때 식사 자리라도 한 번 같이 하는 게 어떤가? 이번 제사 길을 함께해서 즐거웠네. 고마워.”
“아닙니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그럼 그때 보지.”
“예.”
나는 카르테아에게 인사를 올린 후에 마차를 찾아 몸을 실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얻은 건 총 3가지였다.
우선은 소드 익스퍼트에 올랐다는 변명거리.
여행을 떠나고 복귀하는 동안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지금까지에 내 성장을 감안하면 무언가 깨달음 하나를 얻어도 이상하지 않을 기간이었다.
카타리나한테 잘 둘러댄다면, 그녀도 미심쩍다고 의심은 해도 깊게 추궁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카르테아와의 내 관계였다.
조만간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의 자리에 오를 권력자이자 혼자서 기사단 하나를 상대할 수 있는 괴물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사실과 전혀 다른데도 나를 경쟁자라 치부하며 눈총을 쏘았는데, 그게 다소 풀렸다.
마지막으로는 돈 쓰고, 시간 써가면서 계획한 축제가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카르테아를 낚기 위한 축제인데, 그가 자리를 비운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행히 그는 축제에 참석할 것이다.
마차의 좌석에 앉아서는 눈을 감았다. 나는 꿈도 안 꾸고 잘 잤다. 역시 말을 타는 것보다는 마차 쪽이 잘 맞았다.
* * *
아카데미로 돌아와서는 하루를 쉬었다. 거의 쌓이지 않은 몸에 피로를 풀고는 각오를 다졌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카타리나를 찾아갔다.
“다녀왔습니다. 그간 잘 지냈습니까?”
카타리나는 검지로 나를 가리켰다.
“야. 너···!”
카타리나는 나를 보자마자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양손에 주먹을 꽉 쥐고는 내게 걸어왔다. 혹시라도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올까 싶어 다급하게 말했다.
“여행 중에 여러 기사를 만나 실력을 겨뤘습니다. 스승님과만 대련하다가 실력 비슷한 기사들을 만나 겨루니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깨달아? 뭘?”
“스승님, 스승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깨달음이라는 게 말로 술술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팍! 뭔가 꽂히는 게 있었는데, 그걸 파고들다 보니까 눈 떠보니 익스퍼트에 올랐습니다.”
“고작 1달도 안 되는 사이에 깨달음을 얻어?”
“그 깨달음이라는 게 꼭 검술과 연관 있는 것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마나홀에 뭉쳐 소화되지 않은 마나의 일부가 퍼지는 듯했습니다.”
“그게 뭔 소리야?”
“스승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태어날 때부터 마나가 많은 편이기는 했어도 어려서부터 수련을 열심히 한 건 아니었죠. 그래서 나이 먹고 영약도 같이 먹으면서 마나를 모았고요.”
“그러니까 네 말뜻은 직접 마나를 유동시켜서 맥을 넓힌 건 아니란 거지? 확실해?”
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 기사단과 함께하며 각기 기사들이 익스퍼트에 올랐을 때 경험담을 취합했다.
남들보다 빨리 조금은 다른 경로로 익스퍼트에 오른 카타리나가 내 말에 허점을 찾는 건 불가했다.
그녀에게는 내심 미안하기는 했지만, 즉시 벽을 깰 수 있는데 멈칫거리고 있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후우··· 그래. 네가 이걸로 거짓말하지 않을 거로 생각한다. 믿으마. 축하해.”
“감사합니다. 다 스승님이 가르쳐주신 덕분이죠.”
“알아. 내 덕이지. 그러면 다시 한번 겨뤄보자.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확인해야 할 거 아니야.”
“알겠습니다. 준비하죠.”
나와 카타리나는 간단하게 대련했다. 가검도 아닌 목검을 들고서 솜씨를 겨뤘으나 다시금 카타리나의 검술에 벽을 느꼈다.
익스퍼트에 오르며 기감이 밝아지고, 더 짧은 시간에 큰 힘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눈에 들어왔다.
내 검격에 카타리나는 반응했으나 수준을 맞추려 의도적으로 몸을 느리게 움직였다. 공격도 방어도 매한가지였다. 그녀에게 검술을 배우고, 이렇게 겨루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카타리나에게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을 선보였다.
발경과 발경의 틈을 없앴고, 기술과 기술 사이에 시간을 줄였다. 익스퍼트에 오르며 맥을 넓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타리나는 웃더니 일순간 숨을 참았다. 그녀는 내 목검을 꽈앙 때렸다.
나와 카타리나가 들고 있는 목검이 부서지며 대련은 끝이 났다.
“그건 안 가르쳐줬는데, 잘했네.”
“하다 보니까 감이 와서요. 익스퍼트에 오르면서 가장 변한 게 뭔가 생각하니까 이거였네요.”
“잘했어. 근데 칼이 부딪친 후에는….”
* * *
이번 축제는 그간 황태자, 카르테아를 낚기 위해 준비해온 수많은 이벤트 중에서도 종지부를 찍는 역할이었다.
다 잡은 물고기를 채로 건지기만 하면 되는 수준이니 간단하면서도 자칫 잘못하기라도 하면 두고두고 눈물 쏟을 거리였다.
“어때요? 수정해야 할 게 있을까요?”
“완벽해.”
오늘은 축제 날에 리허설로 마지막 점검을 시행했다. 나비에는 구해온 드레스를 입고, 분장사에게 화장을 받은 후에 얼굴을 보였다.
얼굴에 그림을 그리기 전에도 주연다운 외모였는데, 그 위에 수많은 도구로 기술 좋은 화백의 명화가 더해지니 예술에 가까웠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거울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니까요? 실력 좋으신 줄은 알고 있었는데.”
“그래.”
카르테아는 자타 공인 얼빠였다.
원작에서도 비숏에 빠진 이유도 다른 남주들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데. 카르테아는 순전히 비숏의 얼굴 때문이었다.
“황태자님도 넘어갈 수밖에 없을 거야.”
“그 말을 들으니 저도 자신감이 생기네요.”
얼굴에서 눈을 떼고 보아도 그랬다. 옷이나 장신구 따위가 정말 공을 많이 들였다는 티가 났다.
“동선은 어떻게 하는 건지 기억나?”
“네. 정확하게요. 황태자님의 기분이나 만난 시간 따라 경우가 나눴던 거 다 기억해요. 일곱 가지였죠?”
“맞아. 정확해.”
이외에도 멘트 따위를 준비하기도 했다. 전에 먹었던 꼬칫집의 위치를 같은 곳에 잡아 다시금 먹고 싶다고 말하며 서민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식이었다.
“빨리 축제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