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중간고사는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갔다.
그간 책이라고는 손에 쥔 적 없는 탓에 제대로 망쳤다. 아카데미 전체에서 직전 학기 대비 성적이 떨어진 학생을 순위 매긴다면 내가 맨 앞이지 않을까?
나비에의 경우 전 과목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받았으니 내 성적이야 알 바가 아니었다.
그렇게 중간고사를 치렀고, 큼지막한 사건을 목전에 앞두었다.
벼르고 별렀던 꽃 축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적지 않은 금액의 돈과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남주의 명단에서 카르테아를 치워버리기 위해서였다.
내일 있을 이벤트만 잘 처리한다면 그를 이름을 지워버릴 수 있었다.
“내일 있을 일을 생각하니 벌써 두근두근하네요.”
“나도. 실패할 리 없다는 거. 성공이 보장돼 있다는 거를 알면서도 조마조마해.”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성공할 거예요. 잘 될 거예요.”
“그… 이미 충분히 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동선을 점검해볼까?”
“네. 알았어요.”
나비에는 씩 웃더니 아카데미 지도를 펼쳤다. 그러더니 눈을 감은 채로 펜을 쓱쓱 움직여 동선을 따라 그렸다. 그러더니 눈을 뜨고는 콕콕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기서 릴리아가 꽃을 뿌리고… 꽃길을 밟으면서 분수대 쪽으로 이동하고….”
나비에의 긴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해볼 필요 없겠네.”
“몇 번이고 확인하고 확인했으니까요. 그런데 끝까지 말씀하지 않으실 생각인가요?”
“뭘?”
“왜 이렇게까지 절 도와주시는지요. 제가 황태자님과 잘 된다고 해도 얻는 게 없잖아요. 심지어 그때는 친분도 없을 때였는데.”
“꼭 지금 알아야겠어?”
불편한 소재였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나비에를 도와주는가?
내가 빙의하기 이전, 라파엘이 했던 짓을 토로하면 나비에를 납득시킬 수 있었다.
과거 라파엘이 했던 짓을 내가 한 것처럼 말하면 됐다.
과거의 일에 앙심을 품은 비숏이 카르테아와 이어지고 날 처벌해달라 부탁하면 난 죽은 목숨이라 설명하면 이해할 것이다.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친구잖아요. 이 정도는 알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이제 그 정도는 되잖아요.”
그래. 이게 문제였다.
라파엘이 비숏에게 부린 패악질을 뒤집어쓴다면 경멸받지 않을까? 그게 무서웠다.
나비에의 말대로 우리는 친구였다. 그러나 나비에는 그 일을 알고도 끝까지 나와 친구를 해줄까?
나라면 아닐 거 같은데.
“나중에. 나중에 말해줄게.”
이거로 만족했다는 듯 나비에는 웃었다.
“알았어요. 그만 보채고, 그때까지 기다릴게요.”
* * *
카르테아에게 있어 배우자란 황후에 오를 여자를 뜻했다.
제국의 시민들에게 모범을 보이며 안주인으로서 품격을 지킬 수 있는 인물. 황가에 도움까지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가문을 따져 점수를 채점하고, 장단점을 따지는 것으로 꽉꽉 차 그의 감정이 끼어들기에는 자리가 부족했다.
카르테아는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한 번도 어느 여인이 눈에 찬 적이 없었으니 불만이 없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황태자로서 마땅히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는 두 번째 이유였다.
그가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여인이 그의 배우자로 선정될 예정이었다.
나비에가 눈에 들어온 건 그러던 중이었다.
처음 만난 건 무도회에서였다. 뭘 하는 애일까?
왜 이런 자리에서까지 책을 들고 있는 걸까? 그런 호기심뿐이었다.
이성으로써의 호감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나비에가 궁금했으나 내심 그녀도 남들과 같을 거라 간주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걸 원하니까. 황태자란 배경에 절절맬 거라 예상했다.
그게 아니었다. 대화할 때마다 신선했다. 같이 있을 때면 경험해본 적 없는 일을 경험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오늘 나비에와 약속이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축제가 열린 까닭이었다. 축제가 열린 시기가 기이하다 싶으면서도 중요한 사항은 아니니 개의치 않기로 하였다.
약속 장소에서는 나비에가 카르테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날인지라 한껏 힘을 준 모습에 카르테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나비에는 활달한 구석이 있었다.
펜싱 대회에서의 객기도 그렇고, 제게 잘 볼일 마음만 있는 가식적인 영애들과 다르게 털털했다.
“복장에 신경 많이 썼군.”
“네, 특별한 날이니까요. 이런 옷을 입을 일이 잘 없다 보니 좀 어색한데 어떤가요?”
“어울려.”
나비에는 미리 예행해두었던 길로 카르테아를 이끌며 지난번 축제를 답습했다. 주어진 코스를 돌며 생각해둔 말을 내뱉었다, 카르테아의 반응은 좋았다. 나비에는 일이 계획대로 흘러감에 즐거웠다. 둘은 웃었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전에 그랬던 것처럼 꼬치구이를 먹은 후에 꽃길을 걸었다.
짧은 기간 동안 후딱 하고 치울 축제였던 탓에 큼지막한 나무나 가꾸기 까다로운 꽃은 없어도 구색만큼은 맞추었다. 꽃밭은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
“우리 저거 해요.”
나비에는 손끝으로 어느 학생 하나를 가리켰다.
초상화를 그리는 걸 보아하니 그림과 관련된 학부에 학생인 듯했다. 카르테아는 속으로는 화가의 실력이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한참이나 같은 자세를 취한다고 힘들었다며 툴툴거리며 완성된 그림을 받았다.
원래라면 얼굴에 유독 튀는 특징을 잡아 과장되고 우습게 그릴 그림이었으나 둘의 신분 혹은 외모 덕에 미형의 그림이 나왔다.
둘은 실물이 더 낫니 떠들며 웃었다.
모든 건 뜻대로 돌아갔다. 순조로웠다. 그때 나비에는 카르테아를 이끄는 와중에 괴상한 생각이 드는 걸 느꼈다.
‘두려움을 정복하는 자가 세계를 정복한다.’
이게 왜 또 튀어나오는 건지 아리송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값싸게 대량으로 맞춘 꽃은 바람에 휘날리며 꽃잎을 사방에 뿌렸다. 주홍빛 태양이 지며 꽃밭을 물들이니 분위기가 퍽 그럴듯했다.
“선물이에요. 축제 중에 수많은 꽃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어요. 그게 제일 곱더라고요.”
“칼시아가 말인가?”
“아… 그런 이름의 꽃이었나요? 네. 자세히 보니 듣던 것과 비슷하네요.”
“그 많은 꽃 중에서 이게 제일 고왔다고? 이게 눈에 띄어?”
“네. 꽃이 너무 예뻐서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왔어요.”
“그렇단 말이지… 재밌네.”
카르테아는 꽃병에 고이 담긴 칼시아를 내려다보았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추억이 깃든 물건이 하나씩은 있는 법이었다. 카르테아에게는 이 칼시아가 그러했다.
카르테아가 일평생 중 가장 유약했을 때 즐거움이 닮긴 꽃이었다.
노을이 지는 꽃밭에서 칼시아를 지그시 보고 있으니 어딘가 울컥하는 구석이 있었다.
거기에 분위기 탓에 카르테아는 우스운 생각이라 치부하면서도 이 세상에 인연이라는 게 있기는 하구나 싶었다.
칼시아는 아름다운 꽃이다. 한 송이만 있어도 각기 색이 다른 꽃잎의 뭉치를 보고 있으면 절로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지만 꽃 무더기 속에 파묻혀 있다면 그리 눈에 띌 게 없었다. 그럼에도 칼시아를 골랐다고 하니 놀라웠다.
“고맙게 받지….”
꽃을 아련하게 관찰하는 카르테아를 보며 나비에는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 모두 계획대로 흘러왔다. 이날을 얼마나 고대해왔던가. 유아기 시절부터 시작된 부모와 선생의 뾰족한 교육, 숨 막히는 예절과 인간관계를 버텨왔던 건 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그간에 고통을 보상받는 듯했다. 그간의 울분을 곱씹으며 눈앞에 희열을 만끽했다.
‘두려움을 정복하는 자가 세계를 정복한다’
나비에는 힘껏 웃으며 말했다.
“전 황후가 되고 싶어요.”
꽃병을 내려보던 카르테아가 고개를 틀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황후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이해하고 있어요. 저보다 더 나은,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음을 이해합니다만, 저를 택해주셨으면 해요. 저를 사랑해주세요.”
“너무 빨라… 그런 말을 하면 지금부터의 내 고백이 네 부탁 때문인 거 같지 않나? 이건 그게 아니야. 너라도 지금 같은 자리는 긴장되고, 속이 타겠지. 그러니 빠르게 말하지. 무도회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눈에 띄었어. 너와 떠들고 나면 생기가 돌아. 너와 있으면 즐거워. 남은 인생을 너와 보내고 싶어.”
* * *
일의 마무리인 만큼 끝부분은 꼭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결정을 후회했다. 손발이 뭉개지는 듯했다. 그냥 하루 기다리기만 하면 나비에가 결과를 알려주러 올 텐데 뭐가 급하다고 이랬는지 모르겠다.
어우. 남사스러워라.
어찌 됐든 계획대로 일이 풀리니 좋기는 했는데, 어우, 남사스러워.
그렇게 오그라든 손발을 피고 있을 때였다. 이곳은 아카데미 학부 내에 건물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옥상. 그러니까 마법학부의 마탑이었다. 그러니 이안이 있는 게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기척도 없이 불쑥 나타나서는 난간에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그는 나비에와 카르테아를 내려다보더니 흐음 숨 쉬고는 난간 너머로 팔을 뻗었다. 그가 손끝으로 나비에를 가리켰다.
“저 여자애 좋아해?”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이안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는 계속해서 나비에 쪽을 주시하며 말했다.
“너, 쟤랑 계속 붙어 다녔잖아. 그런데 아쉽게도 쟤는 너 안 좋아하나 본데? 저 금발한테 푹 빠진 거 같아.”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야. 그런 거 아니야. 아니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엄한 사람 몰고 가고 있어. 멍청아.”
“나는 누구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그… 실연의 아픔이라고 하나? 들어는 봤는데. 괜찮아? 난 겪어본 적 없어 공감은 못 해도 이해는 해. 그,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야.”
하더니 내 어깨를 토닥이고는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