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축제의 다음 날. 아카데미에 수업이 없는 주말인지라 나비에는 아침 일찍 나를 찾아왔다.
내가 둘의 결과를 궁금해 해서 미칠 줄 안 모양. 마탑의 옥상에서 둘을 지켜봤던 난 내심 무덤덤했지만, 열심히 반응하며 나비에의 이야기를 들었다.
“황태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도회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제가 눈에 띄었대요. 그때 라파엘 님이 낸 수가 잘 들어맞았던 거죠.”
“그랬구나!”
“또 남은 인생을 저와 보내고 싶다고 말씀하는데….”
“그래. 그렇구나.”
1시간가량 어제 지켜본 일을 나비에의 시점에서 각색해서 들으며 거기다 몇 가지 자랑을 더 들었다.
나비에는 내 풍족한 반응에 만족해 더 크게 웃었다. 그녀는 어제의 결과에 아주 만족한 듯했다. 아침부터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라파엘 님이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이걸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황태자님께 잘 좀 말해줘. 내 이야기. ”
“네. 그거라면 확실하게 할게요.”
나비에는 행복한 표정으로 돌아갔고, 며칠 후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다.
나비에가 카르테아에게 아주 잘 말해준 듯했다. 뭘 어떻게 한 걸까? 우리가 그간 해왔던 일을 다 고백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카르테아에게 풀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는데, 그 안에서 어떻게 내 무고함을 설명하고, 둘이 이어지는 데 얼마나 애썼는지 알렸을까?
잘은 모르겠는데, 나비에가 뭔가를 하기는 했다.
카르테아는 내게 아미칸보의 훈장을 준다고 말했다.
아미칸보.
황족에게 개인적인 도움을 준 이들에게 내리는 훈장이었다.
나로서는 잘 모를 일이었는데, 카타리나는 아미칸보가 이곳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큰 명예라고 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이름뿐인데. 땅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걸 말이라고 해? 야. 너 귀족이 맞긴 한 거냐?”
“말이라고 하고, 귀족이 맞긴 합니다. 이거 돈으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에 가치가 있는 거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나 같이 이미 이름을 날렸으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오래오래 자랑거리야. 넌 뭘 또 이런 거를 돈으로 계산하냐.”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큰 걸 받았다.
나는 카르테아가 노여움을 풀고 조금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어도 만족했을 텐데, 그가 나와의 친분을 공표했다.
훈장을 주는 건 대외적으로는 지난 황제 길에서 자기를 따랐다는 것이지만, 나비에 덕분이었단 게 명백했다. 나는 그녀에게 찾아가 물었다.
“황태자님께 뭐라고 말한 거야?”
“그냥… 연애 상담 잘 들어줬다는 정도였는데, 아마 저를 위해서 뭘 해 줄 수 있다는 걸 빨리 보여주고 싶으셨나 봐요. 또 뭔가 미안해하시는 거 같았어요.”
“아아….”
훈장을 내리는 데는 이전까지 괜히 내게 한 번씩 시비를 걸고, 화풀이했던 보상의 의미도 있었다.
“잘해줬어. 고마워.”
“뭘요. 사실 저도 불편하기는 했어요. 저를 도와주신 거뿐인데, 피해를 보시니까….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이네요.”
“결혼은 언제 할 거야?”
“흐하하하.”
내 질문에 나비에를 몸을 앞뒤로 흔들며 웃었다. 머리통에 무게가 갑자기 늘어난 듯 몸을 가누지를 못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웃어대는데, 그만큼 즐거운 듯했다.
“아마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쯤이 아닐까요?”
“많이 남았네.”
“네, 그러니까 그때쯤에 하루는 빼줘요.”
“왜?”
“사회 봐주셔야죠.”
“내가? 나 그런 거 해본 적 없어.”
“이게 뭐 어렵다고 빼고 그래요?”
“생각해볼게.”
“꼭이에요. 꼭.”
* * *
이안은 표정을 찌푸리면서 걸어왔다. 왜 삐졌을까? 짐작 가는 게 있었다. 그가 그렇게 나비에를 멀리하라고 징징거렸는데, 아침부터 친하게 굴었지 않나?
이것 봐라.
“너 아직도 걔 만나고 그러더라.”
“그게 왜?”
“할 거면 확실하게 해. 이제라도 좋아한다고 말을 하든가 아니면 깔끔하게 포기하든가. 그렇게 소심하게 굴지 말고.”
“몇 번을 말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니긴….”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그가 제멋대로 짐작해서 나를 불쌍히 여긴다고 내가 손해 보는 건 없지만, 억울했다. 아닌 걸 아니라고 하는데.
이안은 콧방귀를 끼더니 말했다.
“그럼 왜 아직도 걔 주위를 맴도는데?”
“그냥 친구야.”
“알았어. 그런 거로 하자. 이제 상관 안 할게.”
애가 심통이 났다.
이유는 알 거 같았다.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거지. 그가 보기에는 내가 거짓말만 늘어놓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고 싶었다. 확실히 카르테아가 질투했을 만큼 나비에를 자주 만났고, 또 가까이 지냈다.
나는 이를 확실히 하려고 두 팔을 벌리며 호소했다.
“아니, 지금 내 상태를 봐. 야. 이게 네 말대로 실연의 상태 같냐? 멀쩡하잖아. 이게 연기 같아?”
“그건… 아니야.”
“거봐. 이거로는 그만하자.”
이안은 마지못해 수긍했다.
이후에는 카르테아에게 사과를 받았다. 그는 나를 호출하는 게 아니라 직접 찾아와 말했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발걸음 무겁기로는 제일인데, 이렇게 행차까지 한 걸 보고 놀랐다.
“그간 미안했네. 내가 옹졸했어.”
“아닙니다.”
“괜찮은 척할 거 없어. 나도 내 신분을 알고 있네. 내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얼마나 민감한지 알아. 괜히 자네를 유치하게 경쟁자라 여기고, 속 좁게 굴었어. 미안하네.”
“하하… 정말입니다. 어차피 풀릴 오해라 생각해 괜찮았습니다. 그렇게까지 미안해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카르테아는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말했다.
“내가 이번에 주는 훈장은 감사와 사과의 뜻이 닮긴 선물이네. 하지만 그 훈장대로 앞으로는 친하게 지내지.”
“예…. 그리하겠습니다.”
카르테아는 다음 주에 훈장을 주겠다고 말했다. 고작해야 여행을 좀 따라다녔다고 훈장을 준다는 게 어색했지만, 그가 준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 * *
나는 카를렌의 과자를 하나씩 씹으면서 상황을 복기했다. 카르테아를 깨끗하게 처리했다. 자그마한 변수도 없이, 비숏과 절대로 이어지지 못하게 막아뒀으니 남주 넷중 하나를 없앤 셈이었다. 남은 건 셋이었다.
아가레스와 이안, 제프린.
앞에 둘은 아직 옆에 짝꿍이 없기는 해도 비숏 엮일만할 공통점을 지워뒀으니 적어도 한동안은 안심해도 좋았다. 남은 건 제프린이었다.
그를 어떻게 해야 할까?
“애는 정말 어렵네….”
원작에서는 시작할 때부터 비숏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인물이었다. 인제 와서 내가 뭔가를 한다고 그가 마음을 접는 일은 없을 테고, 이렇게 차례차례 남주들을 밀어낸다고 해도 결국에 제프린 하나만은 남을 거다.
어쩌다 보니 이제까지 고생하면서 애를 쓴 게 다 제프린을 위해서 움직였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다른 남주들을 몰아냈으니, 그놈 혼자 덕을 본 셈 아닌가?
물론 끝까지 잘 되게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후 제프린은 소드마스터까지 성장한다. 그때 가서도 내가 제프린보다 강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 둘의 사이를 갈라놓아야 했다.
어떻게?
마땅한 수가 없었다. 내가 손을 쓰기도 전에 비숏과 친분을 만들었는데 이걸 어떻게 하겠는가? 그 둘의 사이를 틀어버리는 것도 어려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해봤자 둘이 지금보다 더 가까워지지 않게 막는 수준.
이전부터 둘이서 잘만 만났는데, 내가 뭘 어떻게 막아.
짝!
난 손뼉을 쳤다. 제프린은 위험했다.
원작에서는 여기저기 치이는 게 일상이었던 탓에 내심 다른 남주들에 비해 부족하다고 셈했다. 그런 만큼 얕잡아보고 있었는데, 비숏과 이어질 가능성이 가장 큰 건 그놈이었다.
제프린은 소드마스터에 오른다. 오러블레이드를 휙휙 휘두른다. 휘황찬란한 빛을 뿜는 오러블레이드로 나를 죽이러 오면 어떡하지? 상상만 해도 오싹했다.
뭐가 됐건 간에 조만간 수를 써야 했다.
* * *
비숏은 카르테아가 라파엘에게 아미칸보의 훈장을 수여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번 카르테아의 황제 길에 라파엘이 동참했다는 게 명분이었다.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믿기 어려웠다. 라파엘은 그런 훈장을 받아도 될 인물이 아니었다. 아미칸보가 어떤 이름인데, 그렇게 함부로 수여한단 말인가?
아미칸보. 어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친우라는 의미였다. 황족과 깊이 사귄 친우. 라파엘, 그는 추악한 자였다. 그런데 황족의 친우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비숏은 완성된 연금술 치료제를 내려놓았다. 시험관에 담긴 약이 번쩍였다. 이제 이걸 라파엘에게 말하고 엘렌에게 먹이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자신과 라파엘 사이는 영영 끝이 날 것이다. 이게 좋나? 비숏은 치료제가 담긴 병을 살살 흔들었다. 이게 좋은 건가?
그간 간절히 바랐던 일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와의 연만 끊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밤마다 기도했다. 이제 그게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왜?
이대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라파엘은 벌을 받아야 했다. 제가 저지른 잘못에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가 벌인 짓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이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일을 정확하게 아는 건 자신밖에 없었다.
‘내가 움직여야 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해야 라파엘이 크게 타격을 입을까 고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후환을 걱정했다. 라파엘의 보복이 돌아올 것이다. 지금이야 선량한 척하며 사람들의 틈에 녹아들었지만, 그의 본성은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비숏은 제프린을 호출했다.
“라파엘이 싸운다면 이길 수 있습니까?”
제프린은 당당하게 필승을 자신하고 싶었으나 그간에 패배를 떠올렸다. 왜 졌지? 변수가 많았다. 그러면 다시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제프린은 이런 자리에서, 비숏에게까지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반반일 겁니다.”
“반반이요?”
“예….”
비숏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