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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71화 (71/125)

제71화

치료제를 완성했다는 비숏의 말에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비숏이 드디어 엘제닉 병의 치료제를 완성했다. 여러모로 치료제가 맡은 역할이 많았던 터라 아쉬웠다.

비숏이 남주들과 잘 되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는 그들끼리의 접촉 자체를 차단하는 게 으뜸이었다. 일단 서로 얼굴이라도 마주쳐야 뭐가 생기니까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녀가 엘제닉 병의 치료제를 만드는 동안에는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참 편했는데, 이거도 끝이라니 입맛이 썼다.

동아리방에서는 비숏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라도 먹었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불쾌한 일이라도 있는 듯했다. 살벌한 눈빛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완성했다는 약이 이거야?”

오자마자 내용물이 꽉 들어찬 시험관 하나가 나를 반겼다.

“네. 약의 완성이 끝났습니다. 전에 말했던 대로 작용기전을 바꾸어 체내에 마나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분리하는 식으로….”

들어도 모를 소리에 이해한 척 턱만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고생했어. 이제 임상만 남았네. 임상은 언제부터 할지 의논해봤어?”

“이야기를 해보니 본인은 오늘부터도 좋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록과 관련된 문제 때문에 바로는 힘들고 아마…차주에는 가능할 듯합니다.”

“좋았어. 그러면 바로 그렇게 하자. 이번에도 맡겨도 괜찮을까?”

“네.”

귀찮은 일을 떠넘긴 후에 주제를 환기했다.

“나중에 약의 임상까지 끝낸 후에는 어쩔 생각이야? 따로 하고 싶은 거나 뭐가 있어?”

“아직은 계획 없습니다. 이것만 보고 달려왔으니까요. 별 다른 일이 없다면 아마 한동안은 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겠네. 그간 정말 고생 많았어.”

“아뇨, 이건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

음.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분위기가 무거웠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나를 불편하게 여기는 기색이 더 심해졌다.

오늘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봤을 때만큼이나 나를 보는 눈빛에 혐오감이 가득했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내가 잘못한 일, 혹은 실수한 게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으나 특별히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좀 나쁜가 보네.

괜히 불똥이 튀기 전에 헤어지고자 했다.

“그럼 오늘은 이쯤하고 임상이 끝난 후에 다시 보자.”

“그러실 거 없습니다. 임상 후에는 상용화만 남았으니 굳이 다시 만날 거 없이 작성해둔 계약서대로 실행하면 됩니다.”

아무래도 내 얼굴을 두 번 보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 * *

점심에는 레오를 만났다.

광폭화라는 표현은 다소 오글거리는 면이 있어 입 밖으로 내뱉는 게 어려웠다. 게다가 실제 성능과는 별개로 마치 자기 힘도 주체 못할 거 같은 인상이었다.

이안과 레오가 쓰는 힘은 달랐다. 그들은 자기 힘을 완전히 통제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힘에 새로 이름을 만들었는데, 마력 유동이었다.

마나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유동해 마력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따와 지은 이름이었다.

이름을 꼭 화랑 연관 지을 필요는 없었다. 힘을 각성하는 계기는 머리에 꼭지가 돌고, 피가 거꾸로 솟을 듯한 분노지만, 각성만 하고 나면 감정 상태와는 상관없이 힘을 쓸 수 있었다.

레오가 힘을 쓰지 못했던 건, 순전히 그가 지닌 마나가 적어서였다. 그는 마력 유동을 각성한 후에도 힘을 다루지 못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오직 마나를 늘리는 것뿐이었다.

레오 또한 마나 연단을 꾸준히 하면 언젠가는 마력 유동을 쓸 수 있었으나 문제는 그 시간이었다. 마력 유동에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모될지 알 수 없었다.

이에 레오에게 영약을 먹였다. 그 값은 빚으로 달아뒀고, 우선은 그의 성장을 앞당겼다. 나는 그 결과에 감탄했다.

“이젠 할 수 있습니다.”

레오가 눈에서 빨간 불을 뿜었다. 마력 유동에 성공했다.

그간 영약을 배불리 먹고, 마나 연단을 열심히 했는지 몰라보게 레오의 마나량이 늘었다. 역시나 돈이 최고구나 싶었다.

“그럼 얼마나 성장했는지 볼까?”

“예, 해보죠. 저는 준비 됐습니다.”

레오와는 가볍게 검을 겨뤘다. 마력만 성장했을 뿐이지 검술 실력은 그대로였고, 여전히 검기도 쓰지 못했다. 그의 육체 성능만 이전보다 좋아졌을 뿐이었다.

그거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일격 하나하나가 무거웠고, 검초와 검초 사이에 시간만을 따진다면 제프린보다도 빨랐다.

물론, 극적인 변화라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검술 실력은 정체됐으니 그의 다음 기술은 뻔히 예상이 갔다. 게다가 검초와 검초를 이을 때 시간이 길어 암만 빨리 칼을 휘둘러도 대처가 수월했다.

더군다나 여기서 내가 검기를 쓴다면 더욱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다. 두 칼이 맞부딪히는 순간 레오의 칼이 분질러질 터였다. 그러나 나중에 레오가 같은 수준에 올라 똑같이 검기를 쓴다면?

‘제프린을 상대로도 승산이 있겠어.’

검기가 있더라도 불리할 거다. 하지만 상황이 받혀주고, 행운이 따른다면 이길 가능성이 생겼다.

레오도 자기의 성취를 느낀 듯했다. 표정이 밝았다.

승패를 겨루는 게 아니라 레오의 성장 정도를 시험하는 대련인지라 승패를 내지 않고 유야무야 끝을 냈다.

“힘이 넘쳐나네요.”

현재 레오가 사용하는 마력 유동은 전에 들어갔던 마력 유동 상태보다도 더더욱 강했다. 이건 지닌 마나량의 차이였다.

영약을 먹으며 능력의 바탕이 되는 마나의 양 자체를 늘렸다. 마나가 더 많으니 같은 마력 유동이라 해도 더 큰 힘을 냈다.

“저도 성장이란 걸 하네요.”

레오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 * *

아미칸보의 칭호 수여는 금일 저녁 무도회장이라 했다. 땅이나 다른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름뿐이니, 이걸 아는 사람이라도 많아야 하는 탓이었다. 괜히 일을 키우는 거 같아 번거로웠지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간단하게 수긍했다.

오늘은 나도 무도회에 참가했다. 가끔 나비에한테서 소문을 주워듣기만 했지 직접 가는 건 처음이었다. 이런 일이 언제 생길지 모르니 격식에 맞는 옷을 주문해두어 다행이라 여기며 이안에게 여벌옷을 내밀었다.

그는 내가 내민 옷이 오물이라도 된다는 양 기겁하며 몸을 내뺐다.

“내가 왜?”

“같이 갈 친구가 너밖에 없어.”

“혼자 가면 되잖아.”

“그럼 다들 나 친구 없는 줄 알잖아. 같이 가자.”

기겁하는 이안을 억지로 데리고 나섰다. 무도회장으로 가는 길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공식적으로 황태자의 출몰이 확정된 무도회는 이번이 유일했다.

아카데미 교내를 매일같이 서성거려도 졸업하기까지 황태자의 털끝 하나 보기 힘든 탓에 다들 이번 일을 기회 삼아 구경하려는 듯했다.

무도회장 내부로 이동하며 주변을 힐끗거리니 여기저기에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황태자가 왜 무도회장에 등장하는지까지도 알음알음 퍼진 듯했다.

“축하해요.”

내게 말을 건 남자는 아마 나랑 같은 학부였던 듯한 학생이었다. 그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쭈뼛 주뼛 걸어와 내게 말하며 자기를 소개했다. 몇 번인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나는 만나서 반갑다고 받아주고 그를 보냈다.

그를 시발점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무도회라는 게 이렇게 사람을 만나러 모이는 자리다 보니 다들 붙임성 좋게 다가왔다. 그들을 한 명씩 상대해주며 시간을 보냈고, 카르테아가 등장했다.

거하게도 차려입었네.

“라파엘, 이리 오게나.”

그도 이런 자리가 불편한 듯했다. 아니면 귀찮거나.

그는 나를 호명하며 칭호 수여를 빠르게 끝내고자 했다. 나는 카르테아가 서 있는 무도회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그는 내가 옆에 서자 말했다.

“라파엘 아이작은 이번 황제 길에 나와 동행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경호하며….”

듣고 있으니 귀때기가 뜨거워졌다. 없는 이야기를 잘도 지어낸다 싶었다.

“이와 같은 공을 치하해….”

그러던 중이었다. 누구도 카르테아의 말이 끊길 거로 예상하지 못했다.

“그자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런 데 제일 안 어울리는 애가 나타났다. 비숏은 격식 있어야 하는 자리에서도 평상복을 고집했다. 그녀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한 걸음씩 걸었다.

“라파엘, 그자는 흉악한 자입니다. 황태자님께서 수여하시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아미칸보라 함은 황족의 친우가 되는 자.”

애가 뭐라고 하는 걸까?

그녀는 내가 흉악하며, 아미칸보의 이름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아. 그녀가 나를 공격했다.

너무나 예상하기 어려웠던 때라 반응이 늦었다.

정신이 아찔했다. 손발이 달달 떨리고, 숨이 차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까지 잠잠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무엇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을까? 왜 지금껏 조용했는데 느닷없이 폭발한다는 말인가? 뭐를 잘못했지?

그러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지?

당장 달려나가서 그녀의 입을 막는 거라도 아니라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무력했다.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해야 하는데. 라파엘이 저지른 죄를 내가 뒤집어쓰지는 않아야 하는데.

수많은 걱정거리와 함께 다시금 비숏의 입이 열렸다.

“그는 저를….”

그리고 닫혔다. 날 보던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피식 웃었다.

왜? 뭐가 웃겨서? 비숏의 입이 스르륵 닫혔다.

무언가 마법적인 힘에 두 입술이 딱 달라붙었다. 그녀는 지퍼라도 잠긴 듯 입술을 떼려고 안간힘을 쓰는 데도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녀는 관심은 있는 대로 끌고는 말이 막히자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주변을 시선이 그녀에게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몸을 휘청거렸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는 걸 멀리서 지켜보던 제프린이 부축해 밖으로 데려갔다.

“고마운 줄 알아.”

“네가 한 거야? 어떻게?”

“말해줘도 넌 몰라.”

이안이 마법으로 뭔가를 한 듯했다. 그의 도움에 불상사 없이 칭호를 수여 받았다. 다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비숏이 나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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