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비숏이 왜 그랬을까? 왜 갑자기 나에게 불만이 폭발했을까?
나로서는 모를 노릇이었다. 확실한 건 원작과는 성격이 크게 변했다는 점이었다.
원작 시점에 비숏이었다면 이렇게 직접 나서며 나를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그녀가 나를 공격했을까? 자기방어를 위해서? 내가 자신에게 해를 가하기 전에 뭔가 수를 쓴 건가?
그렇게 보기는 어려웠다.
나는 서서히 비숏과의 접점을 끊어내는 중이었고, 실제로 수 개월간 그녀를 만난 횟수는 손에 꼽을 만치 드물었다.
그녀에게 손해를 입힌 적도 없었다.
남은 건 하나였다. 그냥 내가 미워서.
여기까지 정리를 마친 후에야 깨달았다.
빙의한 직후에 내가 염려하던 게 터졌다.
비숏이 내게 앙심을 품었다.
만약에 지금 시점에서 카르테아나 아가레스, 이안 등과 인연을 맺었다면 그들이 나를 죽이러 왔을 것이다.
여태껏 그녀가 남주들과 이어지지 못한 게 애썼던 게 빛을 발했다. 그랬기에 살아남았다.
“아···.”
살아남았다.
오늘은 목숨의 위기였다. 지금까지 해왔던 노력이 아니라면 죽을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원작의 주인공인 비숏이 앙심을 품었다는 건 그런 이야기였다.
오싹했다.
솜털이 곤두섰다.
왜 지금일까?
뭔가 계기라 할 건 없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으니까.
아마 혼자 생각을 정리하던 중에 과거의 일을 곱씹었고, 내가 더욱 미워졌을 거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하던 원작의 큰 흐름은 비틀 수 없다는 걸까?
의의는 있었다.
비숏과 남주들의 관계가 원작과 같았으면 이리 간소하게 넘어가지는 못했다.
누구 하나가 날 죽이겠다고 찾아왔겠지.
그래, 대충 상황 정리가 끝났다. 내가 처한 상항을 인지했다.
그렇구나.
비숏이 내게 앙심을 품었고, 내게 해를 가하려 하고 있다.
어떻게 할까.
여기까지 오니까 사람 된 도리로서 눈길을 피했던 방법도 살금살금 기어 올라왔다.
비숏을 처리한다.
나는 아직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긴긴 시간 동안 그런 일이 생긴다면 망설이지 말자고 다짐해왔다.
이번 일이 그 마음가짐을 실행할 첫 번째 기회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그랬다.
비숏을 죽이면 모든 일은 간단하게 해결됐다. 그 수를 쓰지 않은 건 세간의 눈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러기 싫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사람을 죽여? 그것도 죄 없는 사람을?
지극히 현대인적인 이유에서 방법을 피했다.
비숏을 죽였을 때 발생할 문제들?
그야, 고민할 거리는 많았다. 어떻게 그녀를 죽일지.
언제 그녀를 죽일지. 발각당하지 않게 온갖 것들을 조심하며 기회를 노려야 했다.
그러나 이게 불가할까?
원작을 떠올려보면 아니었다.
비숏은 계단에서 밀쳐져 떨어지기도 했고, 독이 든 술을 마시기도 했고, 어느 나쁜 놈한테 납치를 당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살아남았던 건 원작에 남주들이 구해줬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 남주들이 부재했다.
지금이라면 그녀를 죽이는 게 가능했다. 어쩌면 어이가 없을 만큼 쉬울 수도 있었다.
원작에 있었던 그 위험들을 그대로 터트리는 것도 가능했고, 정 안 되면 기회를 봐서 내가 직접 암살하는 것도 할 만했다.
그럼 그녀를 죽여야 할까?
“아악! 망할!”
이딴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데 짜증이 솟구쳤다. 머리에 혈액이 몰리고, 스트레스가 치솟았다.
사람을 죽인다니.
따지고 보면 비숏이 저지른 죄는 없기까지 했다. 라파엘이 그녀를 괴롭혔던 건 진짜였으니까. 그녀를 죽이려는 건 순전히 나를 위해서였다.
‘그래도 확실하게 정해야 해.’
비숏을 죽인다면, 그녀를 죽일 방법과 범인으로 들킬 가능성을 곰곰이 따졌다. 그 결과는 지극히 해볼 만하다는 것이었다.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살 길이 이것뿐이라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면.
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비숏이 무도회장에서 겪은 건 고작해야 두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긴장한 상태였고, 군중 무리의 중심이었다.
압박감이 심한 장소에서 제 몸을 온전히 통제하지 못한다는 건 소름이 끼치는 경험이었다. 그녀는 호흡이 가빠졌고, 심장이 쿵쾅였다. 주위가 노래지더니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
그녀는 제프린의 부축을 받은 후에야 제대로 일어설 수 있었다.
뻐끔뻐끔.
아직도 입술은 제 뜻과 관계없이 찰싹 붙었다. 비숏은 꼭 주위의 눈길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더욱 숨이 가빠왔다.
“괜찮으십니까? 일단 나가시죠.”
제프린이 비숏을 일으키며 걸음을 보조했다.
비숏은 무도회장에서 빠져나온 후에야 입을 통해 산소를 흡입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기숙사로 돌아가시겠습니까?”
“혼자 갈 수 있어요.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제프린은 비숏이 한 번 뜻을 정하면 그걸 꺾기 어려움을 알았다. 마지못해 부축하던 팔을 떼며 비숏을 떠나보냈다.
비숏은 제 기숙사로 향하며 감정을 추슬렀다.
손발이 덜덜 떨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 드디어 라파엘의 죄를 폭로한다는 생각에 어느 때보다 거칠게 뛰던 심장을 이끌고, 사람들이 모인 자리로 나아갔다.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입을 여는 순간, 무언가 마법적인 힘이 그녀의 입을 닫았다. 뭘까? 모르겠다. 아마 라파엘이 수를 쓴 거겠지.
이미 한계까지 뛰던 심장이 더욱 쾅쾅거렸고, 호흡이 가빠왔다. 시야의 주변부가 흐릿해지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그녀는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해버렸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라파엘은 수면기에 들어간 화산처럼 잠잠했다. 다시 건들지만 않는다면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어쩌면 그 이후로도 그가 터지는 일은 없을지도 몰랐다. 그럴 공산이 컸다.
그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는 거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를 처벌하고자 주사위를 던졌다. 그를 건드렸고, 실패했다.
이제 다시 그가 움직일 것이다.
“아아···.”
갑작스레 후회가 몰려왔다. 조금 더 철저하게 할 걸 그랬다. 그가 가장 곤란할 장소와 시기에서 일을 벌인다는 생각에만 집중해서 시야가 좁았다. 더 완벽하게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비숏이 자책하고 있을 때였다.
딱딱!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잠시 시간 괜찮나?”
라파엘의 목소리였다.
무도회에서 칭호를 받은 직후 바로 찾아온 듯했다.
* * *
비숏을 죽인다는 건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닌 생존 방법이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게 좀 그렇지 않나? 그때는 그랬다.
막 이 세상에 떨어졌을 시절, 사람을 죽인다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러면 지금은? 지금도 그렇다. 사람을 죽인다니.
하지만 만약에 내가 살아남을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고려해볼 만했다. 이를 확실히 하고, 마음에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했다.
왜 갑자기 비숏은 내게 분노했나?
말 그대로 갑자기였다. 갑작스러웠다. 방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내 사이는 더할 나위가 없을 만큼 순탄했다. 친하지는 않아도 서로 선을 지키는 파트너.
이거면 딱 좋았는데, 그녀는 뭣 때문에 갑작스레 변했을까?
처음에는 내가 연금술에서 손을 떼서 껄끄러워졌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라파엘이 벌인 일을 폭로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나 혼자만 손해를 보는 게 아니라 비숏 본인에게도 추문이 따라다닐 텐데, 그걸 감수하면서 나를 공격한 것이었다.
자기에게 피해가 있더라도 내게 더 큰 피해를 주기 위해서였다.
보통의 분노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일. 비숏은 나를 원수 보듯 봤다.
왜 비숏은 꼭지가 돌아버릴 만큼 화가 났나?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이건 제쳐 놓고 그다음. 나는 어떡해야 하는가?
하던 일들은 계속한다. 원작에 남주들이 비숏과 이어지지 못하게 방해해야 했다.
이번에야 비숏이 내 죄를 폭로한다고 해서 큰일이 터지지는 않았다.
내가 아카데미에 와서 쌓은 인간관계가 박살이 나고, 죽을 때까지 꼬리표처럼 라파엘이 벌인 짓이 따라다니겠지만 그게 끝이었다.
내 목숨은 안전했다.
그러나 비숏이 남주와 이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나는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남주들이 비숏가 이어지지 못하게 해왔던 건 계속해 나간다.
그럼 비숏은 어떻게 할까? 그녀와의 내 관계는?
비숏이 폭로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비숏을 찾아갔다. 이안이 힘을 써준 덕분에 이번 일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비숏으로부터 라파엘의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다면 다 끝낼 수 있었다.
나는 비숏의 기숙사를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잠시 시간 괜찮나?”
비숏을 바깥으로 호출했다. 그녀는 찔리는 게 있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나도 비슷했다.
과거에 라파엘이 벌인 짓을, 내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왜 내 잘못이야? 하지만 대화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때 내가 한 일들은 미안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비숏은 내가 사과할 줄은 몰랐다는 태도였다. 하긴, 무도회가 끝나자마자 찾아왔으니 당연히 보복을 예상했겠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내가 너를 괴롭혔던 일을 말하는 거야. 그때는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이걸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어.”
나는 비숏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더니 아, 하고 신음했다. 그녀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용서요?”
“응.”
“그래서 사과하시는 겁니까? 용서가 필요해서? 저로서는 이거 참 다행이네요. 협박이나 위협이 아니라 용서해달라고 하시니. 그런데, 그것 때문에 사과하시는 거라면 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용서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보상할게.”
“당신이 죄를 고백하는 게 유일한 보상 방법이에요.”
“그거뿐이야?”
“네.”
“그렇구나. 그러면 하나만 더. 그간 꽤 잘 지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지금 긴장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비숏도 내심 내가 어떻게 나올지 불안한지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손등으로 땀을 쓸어내리더니 말했다.
“예전에 저는 너무 고달팠습니다. 그래서 당장에 느끼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남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그거뿐입니다.”
내가 어떻게 했어도 결국에는 일이었다.
“오늘은 이만 가볼게. 다음에 다시 대화하자.”
“아뇨, 이거면 충분합니다. 아무래도 불편해서요.”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몸을 돌려 다시 내 기숙사로 향했다. 걸으며 대화를 정리했다. 결국에는 이렇게 돼버렸다.
과거에 라파엘이 벌인 짓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고, 비숏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뭐라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