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라파엘이 아가레스의 영지를 방문해 마족들을 만났을 때, 그는 마족을 같은 인간이라 간주했다. 그럴 게 피부색과 문화, 생존 방식이 다르다고 다른 종으로 취급하자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틀렸다.
그들은 마족이 맞았다. 북부의 끄트머리에는 지독한 마기가 흐른다.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실제로 북부에는 마계와 연결된 통로가 뚫리고는 했다.
아가레스가 마족과의 계약에서 심장에 단검을 찌르고도 살아남았던 건, 그의 생명력이 원체 강했던 것도 있거니와 마계와 통로가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 컸다.
라파엘이 영지를 떠나고, 아가레스는 그 통로를 발견했고,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칼을 휘둘러 죽였다. 아가레스는 왜 자신의 영지에 마족들이 벌레처럼 기성이는지 알아차렸다. 마계에 척박한 약육강식에서 밀린 놈들이 도망쳐온 것이었다.
문제를 인식함과 동시에 해결방안을 떠올려냈다.
이들에게 제 영지로 도망쳐온다고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알려 주면 될 일이었다. 북부에 연결된 인간계로 와봤자 똑같이 죽을 뿐이란 걸 각인시켜주고자 죽이고, 죽였다.
그렇게 통로가 닫히기 전까지 수많은 마족을 학살했고, 밖으로 나오고서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몸이 무거웠다.
무언가가 제 몸에 올라타 덮치듯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아, 놈이구나.
라파엘이 알려 준 덕에 이젠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마데우스.”
자신에게 불사의 힘을 내어준 그 악마였다. 놈이 호시탐탐 제 몸을 노리고 있었다.
‘더 조심했어야 했어.’
성급하게 마계의 통로를 두들겨보는 게 아니었다. 이를 계기로 제 몸에 아마데우스의 영향력이 더 커졌다.
언젠가는 아마데우스에게 몸을 내줘야 한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았다.
아가레스는 남은 방학 동안 이를 뜯어버리고자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 관련된 책을 봤고, 신전에 가 축복을 받기도 했다.
결과는 모조리 실패했고, 시간은 흘렀다. 아카데미는 새로운 학기를 맞아 문을 열고 학생들을 수용했다. 그에 반해 아가레스는 영지에 남아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그래도 안심이 되는 점은 영지에 마족들을 대부분 밀어냈다는 점이었다.
과거에 아가레스가 목숨을 걸고 아마데우스와 계약했던 건,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때의 목표를 어림잡아 반쯤은 이룬 셈이니 계약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왕이면 영지도 지키고, 제 몸도 빼앗기지 않았으면 할 뿐.
이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에 라파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상한 걸 많이 아는 놈이었다. 뭐가 어찌 된 놈인가 싶어 사람을 풀어 정보를 찾아봤으나 의심쩍은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무슨 방법으로 자신이 계약한 악마의 이름이 아마데우스란 걸 알았을까?
이밖에도 특이한 점이 여럿 있었다. 술을 마실 때 방법이나 마족을 대하는 사고방식도 그의 출신과 배경을 감안하면 어색했다.
그의 정체가 어찌 됐건 간에 아마데우스의 이름을 알았다는 사실만 고려해도 상담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아카데미의 학기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난 후, 아가레스가 움직였다.
그가 아카데미로 출발했다.
* * *
나는 하루하루를 상상 속의 비숏과 눈치 싸움을 하며 보냈다. 언제 그녀가 돌발적으로 나를 공격해올지 알 수 없으니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불편하고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그녀가 무도회 같은 기회를 노렸던 걸 감안하면 아무 때나 시작하진 않겠지, 막연하게 기대했다.
아가레스가 아카데미로 돌아온 건 그런 와중이었다. 그는 영지에 일이 생겼다는 핑계로 아카데미를 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끝이 나쁜듯했다.
아카데미로 복귀한 아가레스의 안색이 초췌했다.
“돌아오신 거를 환영합니다. 영지에서의 일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건 나중에 따로 대화하지. 서서 말하기엔 길어서 말이야. 시간이 괜찮다면 한잔하는 게 어떤가?”
위험한 시기였다. 가능한 내 편을 많이 만들어 두는 쪽이 비숏에게 대처하기 좋았다. 특히나 그게 남주 중 하나인 아가레스라면 더 그랬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그렇게 우리는 만난 직후부터 술자리를 들었다. 아가레스는 뭐가 급한 건지 안주도 없이 술로 잔을 채웠다.
음주를 취미 삼기엔 삶이 바빠, 아가레스가 쥔 술병의 상표를 보고도 무슨 술인지 몰랐으나 적어도 도수가 높은 물건임은 눈치챘다.
잔을 채우며 꿀렁이는 술이 알코울로 공기를 오염시켰다. 냄새만 맡고 있어도 취하는 느낌이었다.
먼저 아가레스가 잔을 들이켰고, 내가 그 뒤를 이었다.
“자네, 전에 했던 대화 기억하나? 자네가 내게 말했었지. 내가 계약한 악마의 진명이 아마데우스라고 말이야. 그에 처음에 나는 자네에게 그걸 어떻게 알얐나고 캐묻다가 말을 바꿨었네. 자네가 말해도 괜찮을 때 내게 알려달라고.”
“예, 그랬던 게 기억이 납니다. 방학 때 대공님의 영지에서였죠. 그때도 술을 마셨고요.”
“이거 미안하게 됐지만, 아무래도 내 사정이 좀 급해졌네. 혹시 괜찮다면 아마데우스의 이름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나는 술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술을 마시지는 않고, 잔을 입에 물고만 있었다. 마치 술을 마시고 있는 탓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척 연기했다.
혓바닥을 조심스럽게 놀려야 할 때였다.
내가 어떻게 아가레스가 계약한 악마의 이름을 알았을까? 이 세상을 만든 사람과 대화를 통해 알아냈다는 게 진실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 왜 갑자기 아가레스가 그걸 궁금해하는지 알고 싶었는데, 또 이를 알아버리면 밍기적 일을 물리기도 힘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아가레스가 원하는 바를 내주지 않는 건 힘들었다. 반쯤 주자.
대신에 잘 대답해야 한다. 취기가 뇌를 어지럽히기 전에, 단어를 선택하고,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했다.
“저도 당연히 대공님께서 겪고 계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드리고는 싶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이와 관련된 정보를 발설하지 않기로 약속했던 터라 입을 여는 게 어렵습니다. 혹시 왜 그걸 알아야 하는지 먼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알겠네.”
아가레스는 내가 영지를 떠나고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북부에는 종종 마계와 연결된 통로가 생성되었고, 그곳을 통해 마족과 같은 게 넘어오곤 했다.
이를 막고자 아가레스는 통로에 침입했다.
그게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그곳에 강한 마기 때문인지 아마데우스의 영향력이 커졌다고 했다.
나는 아가레스의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운 척 미간을 모으고,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그와 관련해서는 저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런가···.”
“대신에 이안을 기억하십니까? 흑마법도 일종의 마법의 갈래 중 하나이니 그 친구라면 뭔가를 좀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나를 대신해 물어봐 주겠나?”
“예, 그리하겠습니다.”
“고맙네.”
“아뇨, 뭘.”
아가레스는 별거 아닌 것처럼 떠들었지만, 내가 다 소름이 돋았다. 안 그래도 풀어야 할 매듭이 여럿인데, 또 큼지막한 게 생겼다.
원작에서는 아무데우스가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아마데우스는 아가레스라는 캐릭터를 만들 때 필요했던 설정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등장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인지 누나는 막 질러댔다. 아마데우스의 설정만큼은 어마어마했다.
현재 아가레스는 제국에 당해낼 자가 없다시피 할 만큼 강했다. 괴물 같은 완력가 불사의 힘. 이건 순전히 아마데우스가 내린 흑마력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힘을 하사하는 아마데우스는 얼마나 강할까?
그가 아가레스의 몸을 차지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아마데우스의 종족인 악마만 봐도 뻔했다. 여기에 강림하는 목적이야 알 수 없다고 쳐도, 그를 이루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될 거다.
그나마 다행이란 건, 아마데우스의 진명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악마는 이름을 불리는 순간, 힘이 급감한다. 이름을 외친다면, 사람들이 힘을 모아 아마데우스를 쓰러트리는 것도 가능은 했다.
대신 사람들이 죽어나갈 거다.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기가 오르는 감각에 머리를 흔들었다. 이건 한 시도 미룰 일이 아니었다.
“그럼, 바로 가보겠습니다. 뭔가를 알게 되는 즉시 찾아가겠습니다.”
“기숙사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그리 오게.”
“예.”
나는 이안을 찾아갔고, 이를 설명하고, 해결법을 묻고자 했다. 이안이 중간에서 내 말을 툭 끊었다.
“무슨 멍청한 소리야! 흑마법이 왜 마법인 건데? 그런 저질스러운 거랑 같은 취급을 하지 마. 마법사와 흑마법사의 공통점은 주문을 쓸 때 마나를 쓴다는 것뿐인데, 어떻게 흑마법이 마법의 갈래 중 하나이고···.”
이안은 이상한 데에서 흥분하더니 성을 냈다.
실수였다. 이렇게까지 흑마법에 민감해하며 싫어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미안. 미안해. 너는 뭐든지 잘 아니까, 이것도 알 거 같아서 그렇게 설명했어. 진짜로 마법과 흑마법이 비슷하다고 생각할 리가 없잖아. 마법이랑 흑마법은 아예 다른 건데 말이야. 멍청한 아가레스를 설득하려다 보니까···.”
이안은 겨우 납득하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그래도 알고는 있으니까 설명해줄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놈이 원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어.”
“음, 방법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그게 몹시 힘들다는 게 아니라 존재하지를 않아?”
“어. 계약은 절대적인 거야. 특히나 그 상대가 악마라면 더 그렇지. 중간에 계약을 수정하는 건 불가능해.”
“그럼,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는?”
“가능해. 계약 자체를 끊어버리면 되는 거야. 둘 사이의 연결을 끊는 건, 어렵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야. 하지만 그놈이 원하지 않을걸?”
아가레스의 강함은 모두 아마데우스에게서 나왔다. 무시무시한 완력도, 불사의 재생력도 아마데우스의 힘이었다. 아마데우스와의 계약을 끊는 순간 아가레스는 모든 걸 잃었다.
악마와 계약하지 않은 아가레스는 여전히 거대한 영지의 주인이자 대귀족이었으나 모든 무력을 잃게 됐다.
북부에는 온갖 위험이 도사렸고, 아가레스의 성격상 여태 살아오며 많은 적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가 아마데우스로부터 받은 힘을 잃는다면?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그렇구나. 고마워. 덕분에 잘 알게 됐네. 네 덕이야.”
일단은 방법이 있기는 했다.
아가레스에게 말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