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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74화 (74/125)

제74화

“그게 방법이 있다고는 합니다. 계약을 수정할 수는 없는데, 계약 자체를 없던 거로 만들 수는 있다고요. 그런데, 이게 계약을 무효로 해버리면 혜택도 사라져서요···.”

“내가 아마데우스에게서 받은 힘도 잃게 되겠군.”

“예. 맞습니다.”

“그런가···.”

아가레스는 손으로 머리털을 뒤로 쓸고,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거렸다. 그의 반응은 예상외로 평화로웠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결과야.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 마법사에게 부탁해 어떻게 하면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있나?”

“계약을 통해 얻은 힘을 모두 잃게 되실 텐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냐니, 그럴 리가 있겠나. 내가 이 힘으로 이룬 게 얼마고, 앞으로 이룰 게 얼마인데 괜찮겠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네. 사실 내가 운이 좋은 거였어. 내 아버지만 해도 이런 힘 없이 영지를 지켜왔지 않나?”

그건 사실이었다. 북부에 마물이 튀어나오고, 제국민이 아닌 인간들의 공격을 받은 건 오랜 역사였다.

여태 북부의 영주 중 악마와 계약해 힘을 빌린 건 아가레스가 유일. 그 덕에 아가레스는 꽤 많은 것을 이루어냈지만, 그뿐이었다.

악마의 힘이 없다고 해도 북부에 상비군은 질이 좋았고, 재산이라면 풍족했다. 그를 잘 활용한다면 아가레스가 힘을 잃는다고 해도 영지를 지키는 게 가능했다.

“그럼 할 수 있다면 바로 계약을 파기하실 생각입니까?”

“음, 그건 아니야. 내가 조급했던 건 방법을 찾는데 아주 긴 시간이 걸릴 줄 알아서였어. 하하,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니 마음이 좀 놓이는군. 어차피 포기해야 할 힘이라면, 그전에 가능한 많은 것을 이루고 싶어.”

아가레스가 아마데우스에게 몸을 빼앗기는 건 시학 폭탄과 같은 느낌이었다. 몹시 위험하지만, 터지기 직전까지는 아무 영향이 없었다. 아가레스는 계약을 깨는 걸 뒤로 미뤄 힘이 있을 시점에 뽕을 뽑겠다는 심산이었다.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때를 놓치기라도 한다면···.”

“아아. 그건 걱정하지 말게.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늦기 전에 꼭 말하도록 하지. 속도를 보아하니 적어도 1년은 문제없겠어.”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도움이 많이 됐네. 사람 사이에 관계에 은원은 확실히 해야 하니, 원하는 걸 말해보게. 내 가능한 선에서는 들어주도록 하지.”

급한 건 없었다. 돈이라면 충분했고, 지금 내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이 생활을 유지할 수만 있으면 충분했다.

“당장에는 원하는 게 없습니다. 대공님에 비하면 적다고 해도 재물이라면 넉넉해서요. 대신에 나중에 제가 위험에 처할 때, 대공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다면··· 부탁하겠습니다.”

“음, 뭐 좋네. 자네가 위기에 처하면 내 꼭 돕도록 하지. 그런 거야 굳이 이리 부탁하지 않아도 움직였을 텐데, 뭐. 그런 거를 부탁하나? 그래, 일단은 그리 알고 있지.”

괜한 소리를 한 건 아니었다. 아가레스와는 어느 정도 친분이 있으니 굳이 이런 걸 부탁하지 않아도 아가레스가 날 돕기는 했을 거다. 하지만 차이는 있겠지. 내가 위급할 때 조금은 더 오래 옆에 있어주지 않겠는가?

뭐든지 확실한 게 좋았다.

* * *

아카데미에 입학하고서 무력을 갖추었다. 카타리나와 검술을 수련했고, 이안에게 틈틈이 마법을 배웠다. 그렇게 지금까지 강해져 왔고, 앞으로도 더 강해져야 했다.

내가 성장하고자 하는 기준점은 딱 하나였다.

제프린.

비숏이 죽으라고 하면 죽고, 비숏이 누군가를 죽이라 하면 죽일 놈이었다.

사실상 현재 원작에 남주들 중 유일한 위험 요소이기도 했다. 언제 제프린이 내게 덤비며 죽이려 들지 알 수 없으니 적어도 제프린보다는 강해져야 했다.

그럼 어느 정도로 성장해야 할까?

어느 정도로 성장해야 제프린보다 안정적으로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장에는 확실히 내 쪽이 우위였다. 그와 싸운다고 해도 어지간해서는 지지 않았다. 다만, 주의해야 할 건 제프린의 성장력이었다. 원작에서 그는 최연소라는 기록으로 소드마스터에 오른다.

현재 제프린의 실력은 원작에 비슷한 시기와 비해 크게 밀리지 않았다.

결국에는 그가 소드마스터에 오르게 될 텐데, 그러면 어떡할까?

소드마스터를 상대하려면 같은 소드마스터여야 했다. 검술과 마법을 둘 다 어중간하게 익혔다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목이 떨어진다.

제프린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나도 소드마스터에 올라야 했다. 바쁜 와중에도 마법에 시간을 투자하는 건 소드마스터에 오른 이후를 위해서였다.

소드마스터랑 소드마스터가 싸워도 둘 중 하는 죽는다. 오러 블레이드를 써가며 싸우면 한 대만 잘못 맞아도 그대로 치명상을 입었다.

한쪽의 실력이 더 뛰어나다고 해도 동귀어진 따위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만약에 제프린이 무슨 이유든 간에 목숨을 걸고 덤벼온다면 나도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나는 그게 싫었다. 마법을 배우는 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싸우기 위해서였다.

검술과 마법 중 더 비중을 둬야 할 건 검술 쪽이었다.

제프린의 급성장은 지금부터였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소드마스터에 오를 테니, 거기에 맞춰야 했다. 나는 카타리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카타리나 님, 제가 소드마스터에 오르는 데 얼마나 걸릴 거라 보십니까?”

“소드마스터? 그건 지금 네가 입을 놀리고 그래도 될 게 아니야. 어린 나이에 익스퍼트에 올랐다고···. 아니, 아니지. 표정 참 진지하네. 그럼 나도 진지하게 말해줄게. 짧아도 5년이야. 5년 뒤에 소드마스터에 올라도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길 정도지. 갑자기 왜?”

“제프린을 기억하실 겁니다. 어쩌면 그와 싸워야 할지도 몰라서요.”

“그게 왜? 그게 무서워? 칼을 들고 싸우는 건 위험하고 변수가 많아. 그렇지만 단정 지어 말해줄게. 네가 이겨. 10번 싸우면 10번 다.”

“네. 지금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보다 더 빨리 성장할 겁니다.”

“너보다 더 빨리? 아카데미 재학 중에 소드마스터에라도 오른대?”

“그럴지도 모릅니다.”

카타리나는 콧방귀를 끼더니 코를 긁적거렸다.

“그래서, 네가 걔보다 먼저 소드마스터에 올라야 한다는 거야?”

“먼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시기는 맞추고 싶습니다.”

“네 생각에는 걔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에 소드마스터에 오를 거 같아? 진심으로?”

근거는 부족했다. 원작에서도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그렇겠지, 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비숏이 날 공격했던 것에서 깨달았다. 무엇 하나 방심하다가는 큰일이 터졌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프린이 아카데미 졸업 전에 소드마스터에 오를 거고, 저와 싸우게 될 겁니다.”

“그래서 너는 다른 걸 포기하더라도 빨리 성장하고 싶어?”

“예.”

“그래? 난 어릴 때 매일같이 온종일 나무 막대기를 휘둘렀던 거 후회하는데. 어릴 때만 쌓을 수 있는 추억이란 게 있는 법이잖아? 난 그런 게 없거든. 가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지기도 해.”

카타리나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피식 웃었다.

“근데, 그건 나고. 너는 너니까. 사람은 서로 다르잖아? 그래, 그렇게 하자.”

이곳에서 익히는 검술은 현실의 스포츠와는 달랐다. 현실의 스포츠는 과학이었다. 한계 이상의 훈련은 오버 트레이닝을 불러와 오히려 선수를 퇴보시켰다. 체력이 무너져 자세가 어긋난 채 기술 연습을 반복하면 잘못된 습관이 들어 더 오랜 시간 허송세월 보내야 했다.

하지만 여기는 좀 달랐다.

“포기하면 포기할수록 강해지는 거야.”

기본적으로는 재능과 소질이 최고였다. 그다음은 좋은 스승과 좋은 영약 따위였다. 노력은 마지막이었다. 다만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대게 노력뿐이니 다들 노력을 한도 끝까지 투자했다.

나는?

그럭저럭 괜찮은 소질. 최고의 스승과 영약. 노력은 나름대로 열심히.

이걸 바꾸고자 했다. 노력은 가장 효율이 떨어지는 동력이었다. 대신에 소드마스터에 오를 때까지만. 잠시만 힘을 내기로 했다.

훈련의 강도를 높였고, 훈련의 시간을 늘렸다.

* * *

제프린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채 고민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자신이 갈림길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를 지킨다는 건, 그 사람을 보호한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 자신의 역할은 방패를 닮았다. 수동적으로 제 주인을 지킬 수는 있어도 능동적으로 남을 해치지는 못했다.

반면에 비숏이 바라는 건 조금 달랐다.

제가 당했던 것을 라파엘에게 풀기를 원했다. 라파엘에게 보복하고, 해코지하기를 기대했다. 어쩌면 제프린 자신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제프린은 비숏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주고 싶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라파엘은 벌을 받는 게 맞았다.

자신이 아는 건, 라파엘이 비숏에게 저지른 만행의 일부였다. 그 일부만으로도 충분히 추악했다. 그가 벌을 받지 않으면 또 누가 벌을 받겠는가?

문제는 그 위험도.

라파엘을 건드는 건 위험했다. 그는 강했고, 배경이 튼튼했다. 그의 주변에는 마탑의 주인 같이 넘볼 수 없는 강자도 있었다. 그가 직접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비숏이 그를 처벌하는 건 불가했다.

그녀가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제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프린은 그런 일이 없을 공산이 크다고 판단했다. 당장에야 비숏이 마음을 독하게 먹었어도 천성이 순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라파엘을 죽여달라 부탁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르겠다. 라파엘을 찾은 건 그래서였다.

혹 자수할 생각은 없냐고. 라파엘이 직접 그를 둘러싼 모든 추문을 인정하고, 아미칸보의 칭호를 반납하고, 아카데미를 자퇴한다면 비숏도 화를 풀지도 몰랐다.

“안에 있습니까?”

제프린은 라파엘을 설득하고자 기숙사 문을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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