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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78화 (78/125)

제78화

아마데우스가 아가레스의 몸에 강림한 건 아카데미의 식당에서였다.

오늘은 수업이 없는 주말이었지만, 아카데미에 남아 있거나 혹은 멀리 가기 번거로운 학생들을 위해 식당에서는 음식을 제공했다.

거기엔 비숏과 제프린 또한 밥을 먹는 중이었는데, 그 자리에 제프린이 있었던 게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아가레스는 수저를 들다 말고, 가만히 앉아서는 사악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의 코나 안구 같은 구멍은 기본이었고, 모공에서까지 검은 연기를 풀풀 뿜어내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식사 중인 주변에 학생들은 기이한 시선으로 아가레스를 쳐다보았고, 제프린 또한 칼의 손잡이에 손을 얹고 예의주시했다.

그 덕에 아마데우스의 강림과 동시에 반응하며 그를 막아섰다.

콰아아앙!

아마데우스는 온 힘을 다해 음식이 놓인 식탁을 양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 충격에 음식들이 두둥실 떠올랐고, 접시가 바닥에 떨어지며 깨졌다. 쨍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마데우스가 식탁을 뻥 차고는 일어섰다.

그는 허리춤에 칼을 빼 들고 고함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

그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술술 뿜어졌다. 그는 곧바로 근처 학생들에게 접근하고자 시도했는데, 이를 제프린이 막았다.

미리 준비해둔 터라 그 대처는 잽쌌다. 냉큼 칼을 뽑아들며 아가레스에게 뛰어갔다.

그는 식탁을 밟고 뛰어 위에서 아래로 아가레스에게 칼을 내리쳤다. 체중을 꽉 실은 일격이었는데, 아가레스는 한쪽 팔의 완력만으로 제프린을 날려버렸다.

쿠웅!

벽에 나가떨어진 제프린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다시금 아가레스에게 칼을 겨누었다. 그는 다른 학생들이 대피할 수 있게 시선을 끌었지만, 식당 건물 따위야 알 바가 아니었다.

아가레스의 공격에 기둥이 무너지고, 유리창이 깨지고 식탁이 날아다녔다. 주방에서 조리를 하다말고 요리사들이 대피해 건물에는 불이 붙었고, 소란에 학생들은 비명을 질렀다.

비숏도 그 학생들 사이에 섞여 제프린을 남겨둔 채 도망쳤다.

괜히 옆에 있어 걸리적거릴 바에야 이쪽이 제프린도 더 마음 편히 칼을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안전한 거리까지 벗어나 그들을 지켜봤다.

제프린은 조금씩 도망쳤다. 장소를 옮기며 최소한으로 아가레스의 검을 받아냈다.

비숏은 혹시나 제프린이 다치거나 잘못 해서 죽기라도 한다면 어떡할지 마음을 졸였다.

라파엘이 나타난 건 그러던 와중이었다.

그는 저 멀리서부터 달려와서는 아가레스와 제프린 사이에 끼어들었다. 비숏은 두 눈을 의심했다.

그가 왜? 무엇을 위해서?

처음에는 라파엘이 아가레스를 도와 제프린을 죽이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럴 게 아가레스와 라파엘 사이에 친분이 있다는 것은 유명했고, 근래에 라파엘과 제프린의 관계는 최악에 가까웠다.

이번 기회를 틈타 제프린을 죽이는 건 라파엘이 충분히 할 만한 짓이었다.

“말도 안 돼···.”

그게 아니었다. 라파엘은 제프린을 보조하며 아가레스를 압박했다. 몸을 사리다가도 제프린이 위기에 처하면 득달같이 아가레스에게 달려들었다.

까드득.

비숏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최근 경황이 없어 평소보다 길게 기른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며 라파엘이 변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조금은 성숙해졌는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도 되는 모습과 보이지 말아야 할 모습을 구분했고, 여러 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비숏은 그게 다 라파엘,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 간주했다.

애초에 신분 상승을 위해 저에게 접근했던 남자가 아닌가? 그 방법을 바꿨을 뿐이라고 간주했다.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놀랍게도 라파엘의 성정 자체가 바뀐 듯했다. 그가 지금 제프린을 도와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아가레스를 돕는 편이 이로웠다. 대공과의 친분을 유지하는 길이었고, 방해자인 제프린을 치워버릴 수도 있었다.

왜 그걸 포기하고 제프린을 도왔을까?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니까.

아니, 또 어쩌면 비숏으로서는 알지 못할 모종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었다. 이번 사건 하나만을 두고, 라파엘의 평가를 수정하는 건 성급했다. 그러나 딱 하나, 라파엘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그날 저녁, 비숏은 몇 번인가의 고민 끝에 라파엘을 찾아갔다.

* * *

이안과 치킨을 뜯는 중에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아가레스가 몸을 치료하고 돌아왔나 싶었는데, 목소리를 듣고 기겁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비숏이었다.

내가 움찔거리자 이안은 뭘 어떻게 할 건지 내게 눈짓했다.

“잠시만 기다려. 나가서 만나고 올게.”

“그냥 여기서 말해. 닭이 식잖아.”

“먼저 먹고 있어. 금방 올게.”

나는 손을 씻고 밖으로 나왔다. 비숏이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본론과 관련 없는 대화는 기겁하며 기피 하더니 내게 눈인사했다.

“왜? 무슨 일이야?”

“낮에 일을 감사드리려 찾아왔습니다. 제프린을 도와주셨지 않습니까?”

“제프린을 도왔지. 널 도와준 건 아니야. 너 때문에 도와준 것도 아니고. 고맙다고 안 해도 괜찮은데.”

“예,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있는 데도 그를 도왔지 않습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제프린은 절 따릅니다. 제가 부탁하면 뭐든지 간에 해주려고 노력하죠. 그러니 그가 살아있는 건 당신과 충돌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알아. 그게 왜?”

“그 위험을 감수하고도 제프린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은 말을 해두고 싶었습니다. 감사하다고.”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앉아 있을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잠시지만 일어서서 걸으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가레스랑 그렇게 마셔댔는데도 내 주량은 전보다 늘지 않았다. 겨우 맥주를 좀 마셨을 뿐인데 시야가 핑핑 돌았다.

“꼭 너를 위해서 한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해도 잘 모르겠네. 그런데, 고마우면, 그러면 좀 봐줘.”

“당신이 제게 했던 일을 말입니까?”

“어. 어떻게 안 돼?”

알코울이 들어간 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어린애가 떼쓰듯 말하진 않았을 거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히려 이쪽이 먹혀든 것만 같았다.

“알겠습니다. 당신이 제 생일날 고의로 제 영지에 불을 질렀던 일은 눈감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일은 저도 잊도록 하죠.”

“어···.”

“하지만 그 외에 나머지 일은 어림도 없습니다.”

“어어···.”

원작에 그런 일도 있었던가?

비숏의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는 드물어서 먼 과거라면 그런 사건이 있었을 법도 했다. 애가 여기서 거짓말할 것도 아닌데, 그랬다면 그랬겠지.

헌데, 비숏은 내 표정을 보더니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그거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나 보군요, 예, 큰일을 해주셨으니 하나 더 하겠습니다. 제 하녀를 매수해 제 생활을 감시하셨던 것까지도 잊도록 하죠.”

말을 하는 비숏의 눈빛이 살벌했다. 용서해줄 거리를 찾아 기억을 더듬다가 과거에 일을 떠올린 듯했다.

그때 그녀가 느낀 감정이 딸려온 건 덤이었다.

“미안해. 고마워.”

“예.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비숏은 그렇게 나와 합의하고는 제 기숙사로 돌아갔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앞서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대로 술이 다 깨는 듯했다. 시야가 번쩍였다.

이게 현실인가?

비숏과 관계를 회복하는 건 불가능해졌다고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제 보니 아주 그런 건 아니었다. 앞으로 제프린의 목숨을 10번쯤 더 구해주면 되지 않을까?

활짝 웃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이안이 맥주도 닭도 먹다 말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눈으로 내게 욕하더니 말했다.

“뭐 좋은 일 있나 봐? 표정이 밝네.”

“어. 있어. 그런 거.”

“뭔데, 그렇게 웃어?”

“말해도 모를걸?”

“쟤랑 사이 나빴잖아. 왜, 화해했나 봐?”

“제대로 화해한 건 아니고, 조금 화해했어. 한 5분에 1 정도?”

우리는 다시금 닭을 뜯어 먹었다.

치킨은 식어도 치킨인 법이라 맛이 좋았다.

* * *

“오늘은 더 빡세게 굴릴 건데, 표정이 신이 났네. 무슨 일 있어?”

“별일 없습니다.”

“에이, 별일 없는 표정이 아닌데. 나한테도 못 말해 주냐? 뭔데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도 괴롭다 보면 고통의 부재만으로도 행복한 법이었다. 지금의 내가 딱 그랬다. 그렇게 골머리를 썩이던 문제에 실마리가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비숏과 5분에 1쯤 화해했다.

라파엘이 저지른 일을 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산정하고 있는 것보다 크지는 않을 거다.

“그럼 다시 뛰자고.”

비숏과의 일을 떠올리면 카타리나의 고문 같은 훈련도 버틸 법했다. 사실, 아침에 여기에 나오면서 내심 갈등하기는 했다. 이거 관둘까. 진짜 너무 괴로운데. 이제 제프린이랑 안 싸울 수도 있는데.

겨우겨우 약한 마음을 몰아내고 연병장에 나왔다. 혹시 또 비숏이 나중에 말을 바꿀 수도 있었다. 그때를 대비하기는 해야지.

소드마스터를 목표로 카타리나와 한계까지 몸을 혹사했다. 그렇게 저녁이 다가올 때쯤에 카타리나가 말했다.

“나 결혼한다.”

“예?”

“그냥, 너한테는 미리 말해두려고. 올해 길버트랑 결혼하고 여행을 떠나길 했다.”

아무래도 그 기간에는 내 검술을 봐줄 수가 없다고 미리 알려준 듯했다. 그게 언제인지, 얼마나 길지 묻고 싶었는데 먼저 해야 할 말을 뱉었다.

“축하합니다.”

“그래. 그거 때문에 나도 요즘 기분이 좋아.”

카타리나의 명성은 제국에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대단했는데, 사실 수익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돈이라 해봤자 아카데미에서 받는 봉급이 끝이었다. 거기에 평민이라 영지도 없으니 재산이라면 나보다 적을 수도 있었다.

그녀에겐 받은 게 많았다. 이번 일을 명분으로 뭔가 해주고 싶었는데, 꼰대 끼가 심한 카타리나는 싫어하겠지.

“식은 어디에서 하실 생각입니까?”

“내 고향에 교회.”

“보러 가겠습니다.”

“당연히 넌 와야지. 왔나 안 왔나 확인할 거야.”

“하하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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