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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79화 (79/125)

제79화

“결혼하신다 들었습니다.”

“하하, 카타리나가 그렇게 말해? 어. 맞아. 올해 겨울에.”

“제가 두 분께 받은 게 많으니까 뭔가 선물을 하고 싶은데요. 정확히는 카타리나 님께 받은 게 많아서요. 그런데, 스승님은 이런 거 말씀드리면 싫다고 하실 게 뻔해서···.”

“카타리나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 아닐까?”

“예, 뭐 그렇긴 하죠. 그런데 그래도··· 아니니까.”

“됐어. 걔도 너 돈 많은 거 알아. 그거 알고도 괜찮다고 하는 거야.”

“휴양지에 별채라도 한 채 해 드리려 했죠.”

내 말에 길버트는 눈을 깜빡였다. 눈을 깜빡이고는 숨을 들이켰다.

“잠시 카타리나랑 의논 좀 하고 와도 될까?”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버트는 그대로 제 연구실에서 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마나 연공을 하며 길버트를 기다렸다. 몸에 마나를 한 바퀴 돌렸을 때쯤에 길버트가 머리를 긁적이며 카타리나를 데려왔다.

“카타리나도 좋대···.”

어중간한 선물이었다면 거절할 거 같아, 크게 질렀다. 그게 잘 먹혔다. 카타리나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

“예, 뭐.”

나는 가져온 지도를 펼쳐 셋이서 별장의 장소와 규모를 의논했다. 돈이야 어마어마하게 깨지겠으나 카타리나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아깝지 않았다. 사실, 그게 아니라도 이거쯤은 해주고 싶었다.

나를 가르친다고 온 정성을 쏟아줬다. 그게 고마웠다.

금액을 들은 카타리나는 이게 괜찮은 거 맞냐는 양 눈짓했는데, 거기에 웃어줬다. 우리는 몇 번인가 농담을 더 했고, 셋이서 밥을 한 끼 먹기도 했다. 나는 축하한다는 말을 서너 번 더 말한 뒤에 그들과 떨어졌다.

* * *

그리고는 아가레스를 찾았다. 신관을 만나 제대로 몸 상태를 점검했는지 궁금했다. 그의 기숙사 방문을 두들기자 잠시 후에 문이 열렸다. 아가레스는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채로 나를 맞았다.

“몸은 좀 어떠세요?”

“그 마법사 놈이 날 일부러 다치게 할 마음은 없었던 모양이야. 몸에 자국이야 좀 남겠지만, 머 그거 외에는 괜찮다고 하더군. 운이 좋았지. 이거로 만족하네.”

“다행이네요.”

“그래, 걱정해줘서 고맙네.”

“이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힘을 잃으셨는데, 영지를 방어하는 게 힘들지 않겠습니까?”

“음···. 그게 문제지. 내 하나 남은 걱정거리야. 그간 영지를 지키는 건 내 무력에 의존했는데, 이제는 그게 힘들 게 아닌가? 병사들을 더 뽑아야겠고, 그들을 지휘할 장교들을 교육해야지. 돈이 좀 깨지겠군.”

아가레스를 말을 듣고 보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북부의 마물 중에는 일정 경지에 오르지 못한 병사들을 상대로는 무한히 강해지는 것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피부 가죽이 두꺼워 어지간한 화살이나 칼날이 먹히지 않는 놈들. 그런 놈들은 이전이었다면 아가레스가 직접 처리했을 텐데, 이제는 그게 불가했다.

그놈들을 처리할 게 필요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가레스는 내 궁금증을 이해하고는 말을 더했다.

“그 외에는 화기에 의존하려 하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이라 한다면 내가 부유하다는 거지. 마도 공학으로 만든 폭탄을 쓸 듯해.”

“아···.”

나는 한 번 마나가 가득 차면 수십 발에 화염탄을 쏠 수 있었다. 그리고 마탑에서는 내 화염탄 한 발과 비슷한 위력의 무기를 몹시 비싼 값에 판매했다. 효율이 최악에 가까웠다. 아가레스가 그걸 쓴다니 내 돈도 아닌데, 눈물이 글썽였다.

“예, 잘 알겠습니다.”

“아, 그래. 그때 그거 기억하나? 자네가 위험에 처하면 대가 힘껏 도와주기로 했었는데··· 아무래도 내 꼴이 이래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 같은데, 혹 다른 원하는 거는 없나?”

“그때 약속으로 충분합니다. 대공님은 힘 말고도 가진 게 많으시니까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군그래···.”

“그럼 영지로 돌아가시는 건 뒤로 미루실 생각입니까?”

“그거 아니야. 일단은 일이 이렇게 됐으니 한 번은 내려가 영지를 점검해야지.”

아가레스의 일을 확인한 후에는 나비에를 만났다.

그녀는 내심 우울한 표정으로 나를 찾아왔다. 나도 애를 오래 보긴 봤나 보다. 표정 자체는 축 처졌는데, 눈가는 깨끗했고, 여전히 생기가 돌았다.

그녀의 표정과는 달리 별일 아닌 듯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실제로 그랬다.

나비에는 한 번 문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여름이 봄에 불씨를 타고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그녀는 기세 좋게 밀고 나갔다.

날마다 카르테아를 만났고, 여러 가지를 함께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으니 결혼 문제였다.

“일단 약혼이라도 약속받고 싶은데, 좀처럼 그쪽으로는 말씀이 없네요.”

“네가 먼저 말을 꺼내보지그래?”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에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뭐가 문제인지 알 법했다. 카르테아가 먼저 결혼 혹은 약혼을 언급하길 원하는데, 그의 눈치가 부족했다.

“그럼 집안에서 눈치 준다고 말해보면 어때?”

아카데미에 수많은 영애가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해 입학하고는 했다. 나비에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가문에서 압박을 가한다고 말하면 어색할 게 없었다.

“그거 너무 티가 나잖아요.”

“티 좀 나면 어때.”

“그런가요···. 사실 그게 거짓말인 건 아니에요. 부모님께서는 항상 만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시니까요. 알았어요. 그렇게 해보죠.”

하더니 며칠이 지나서 돌아왔다.

“네. 약혼하기로 했어요.”

“빠르네.”

“이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할 걸 그랬나 봐요. 황태자님도 이걸 말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미루셨다고 해요. 하하···.”

“잘됐네. 그래서 날은 잡았어?언제야?”

“그건 아직이죠. 그런데 조만간 소식이 있을 거 같아요. 황태자님께서 어제 이야기가 끝나고 바로 황실로 돌아가셨거든요.”

“잘됐네. 축하해.”

“네, 저도 요즘 잘 믿기지 않아요. 이렇게 잘 된 거요.”

아가레스의 사건을 마치고는 그렇게 무단하게 지냈다. 그러던 중에 편지가 한 통 왔다.

연금술 학회에서의 편지였는데, 이를 요약하면 나와 비숏에게 코미 상을 주겠다고 했다.

코미 상.

당 해에 연금술 발전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이에게 주는 상이었다.

내 이름뿐이 아니라 비숏까지 함께 있는 걸 보아하니 엘제닉 병의 치료제를 만든 덕이었다. 내가 발표한 여러 가지를 감안하면, 엘제닉 병의 치료제가 아니었어도 상을 받기야 하겠지만, 어찌 됐든 명목은 엘제닉 병이었다.

엘제닉 병은 감영 경로가 불명확한 탓에 신분과 관계없이 걸리고는 했다.

이는 큰 문제였는데, 마땅한 치료법을 구하는 게 어려워 많은 이들의 고민거리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를 해결한 게 비숏이었다.

나는 편지를 들고 비숏에게 찾아갔다. 그녀도 편지를 받고는 꽤 놀란 듯했다.

“어떻게 할까?”

“그러게요. 고민이네요. 제가 이걸 받아도 될지.”

“네가 해낸 거잖아.”

“제가 한 건 조합밖에 없어요. 약의 개발에서 제가 한 건 사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죠. 뭐든지 중요한 건 그 발상이에요. 저는 그냥 거들기만 한 거죠.”

어어···.

애 생각은 또 나와 다른 듯했다. 나는 비숏이 치료제의 개발에 모든 걸 담당했다고 평가했는데, 비숏은 그 정반대였다.

“그럼 이거 받지 말까?”

“예? 당신은 저와 다릅니다. 자격이 충분해요.”

“나도 딱히 한 게 없는 거 같아서.”

“아니에요. 당신이 전부 해낸 거죠! 제가 한 건 잡일인데···.”

“네가 없었으면 난 안 했을 일이야. 내가 보기엔 네가 다 한 건데.”

비숏은 심호흡하고, 머리를 숙였다.

“어릴 때 코미 상의 이름을 알게 된 후에 수상을 꿈꿔보기도 했습니다만, 제 자질로는 어려울 듯해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니 싱숭생숭합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상을 받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연금술 계에서 내 능력을 인정해준다 해도 더는 그와 관련해 활동하지도 않을 거고, 이걸로 명성을 얻어도 쓸데없는 감투였다.

하지만 상에 크게 의미를 두고 있는 비숏 앞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상을 받는 게 부담스러운 거지? 네가 이번에 약을 만드는 데 기여가 적은 거 같아서. 그런 이유라면 신경 쓸 거 없어. 네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약이니까.”

“예.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상은 받는 거로 하자.”

“알겠습니다.”

수상자는 선정됐지만, 그 수여까지는 기한이 제법 남았다. 편지를 다시 확인하니 올해 겨울. 으음. 아주 좋았다. 적어도 겨울까지는 사이를 그럭저럭 유지해야 하니 비숏이 느닷없이 라파엘의 죄를 폭로하지는 않을 거다.

나는 비숏과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몇 가지 더했다. 약의 작용 기전을 바꾸게 된 계기인 임상 시험자의 상태는 어떤지 물었고, 그때 아가레스한테 제프린이 다치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비숏은 모두 괜찮다고 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기숙사로 떠났다.

기숙사로 돌아와 생각했다.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더할 나위가 없이 좋았다.

* * *

칼을 휘두르는 중에 카타리나가 말했다.

“요즘 표정이 밝아.”

“전에 말씀드렸던 거 있지 않습니까? 제가 소드마스터에 오른 제프린과 싸워야 할 수도 있다는 거. 그 일이 안 생길 수도 있을 거 같아서요.”

“왜?”

“음···. 조금 화해했습니다. 그래서요.”

“그러면 이렇게 무리해서 훈련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야? 너 이거 하고 나면 죽으려고 하잖아.”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까요.”

이번 무도회에서 벌어진 비숏의 돌발 행동이 그랬다.

원작에 비숏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래서 대비하지 못하고 호된 꼴을 치를 뻔했다. 이번에 일이 아주 잘 풀리며 그간에 걱정거리가 반쯤 해결되는 듯도 싶었다.

혹시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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