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소드 익스퍼트에 올라서며 영약을 복용하는 걸 줄여나갔다.
이제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영약의 효용이 적어 효율이 떨어졌다. 대신에 레오에게는 꾸준히 영약을 구매해 복용시키도록 했다.
하루라도 빨리 그가 익스퍼트 수준에 오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저기, 영약 값이 이상합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값이 폭등하고 있습니다.”
레오의 말에 경매장을 방문하니 그 말이 진실이었다.
내가 막 영약을 사들였을 때와 비교하면 같은 영약의 값이 2배까지 껑충 뛰어올랐다.
“갑자기 가격이 이렇게 오른 이유가 뭐지?”
경매장에서 물건을 구경하다 상인에게 묻자 그가 답했다.
“물량이 적습니다.”
“왜? 자연품이 아니라 마탑에서 만들어내는 거라 수량은 똑같을 텐데.”
“공작 가에서 닥치는 대로 사들이는지라··· 시장에 풀리는 영약의 수가 적습니다.”
“공작 가라니?”
“아가레스 대공님 말입니다. 최근 들어 영약이라는 영약은 닥치는 대로 다 사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듣기로는 영약뿐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아티펙트나 질 좋은 장비 따위를 사들여 기사단이라도 창설하나, 전쟁이라도 준비하나 말이 돌고 있습니다.”
황실에 거주 중인 소수를 제외하면 아가레스는 제국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그가 시장에 돈을 쏟아부으며 물건을 사들이니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아가레스는 아카데미에서 터진 사건과 영지까지 가는 길에 자극을 받은 듯했다. 그는 영지로 돌아가자마자 돈을 풀었다.
왜 영약의 값이 올랐는지 얼추 이해했다. 미리 사둔 분량이 있으니 한동안 레오 혼자 먹일 양은 충분했다. 궁금한 건 아가레스의 저의였다. 영약을 산다고 해도 단기간에 복용할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영약을 사더라도 시간을 들여서 제값으로 사는 게 나을 텐데 왜 이러는 걸까?
뭐, 거기까지야 내 알 바가 아니었다.
* * *
경매장에서 일을 확인하고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꽤 오랜 시간 별다른 사건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갔고, 아가레스가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돌아온 그의 복장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반지를 찼고, 목에는 어울리지 않게 보석이 박힌 예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게 다 아티팩트입니까?”
“그래, 내 몸을 지키려면 이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나? 옷에도 여러 마법을 걸어뒀어.”
“돈을 많이 쓰셨겠습니다.”
“맞아. 예상보다도 훨씬 비싸더군. 그래도 성능을 보니 아주 허무맹랑한 가격은 아니었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영지에서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더할 나위가 없게 해결되었네. 그때 통로에 들어가서 난리를 피운 게 잘한 일이었어. 내 영지에 튀어나오는 잡것의 수가 확연히 줄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구태여 여기로 돌아오지는 않았을 거야.”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궁금한 게 있었다. 아가레스는 왜 아카데미에 출석할까? 아니, 입학은 왜 한 걸까?
제프린은 비숏을 따라서.
이안은 카테인의 유언을 따라서.
카르테아도 귀족 자제들과의 인연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아가레스는 그런 게 없었다.
“대공님께서는 왜 굳이 아카데미에 입학하신 겁니까?”
그는 으하하하, 하고 웃었다.
“자네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겠군.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남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지 묻고 싶은 게 아닌가?”
“대충 비슷합니다.”
“나라고 꼭 혼자 있고 싶었던 건 아니야. 때로는 나에게 접근하는 이들이 있으면 평범하게 대해줬네. 근데 문제는 내가 아니라 그들이야. 다들 나를 무서워서 하는데, 나라고 그들을 가까이하고 싶겠나?”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 계실 바에야 그냥 영지를 운영하는 데 집중하시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흠. 아무래도 자네는 나를 여기서 쫓아내고 싶은 모양이군.”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결혼을 해 후계를 이어야지.”
아.
그래, 그래서였다.
덤으로 왜 그가 비숏에게 관심을 두었는지도 떠올랐다.
그녀가 아가레스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여러 요소로 관심을 끌어들여서였다.
그와 비숏이 이어질 공산은 0이 아니었다.
아가레스가 무력을 잃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제국에서 알아주는 가문의 영주였다. 그와 내 사이를 고려하면 사람을 부려 암살을 시도하거나 하지는 않아도 내 영지에 압박을 가할 수도 있는 일.
조심해야 한다.
* * *
아가레스에게 결혼은 막연한 일이었다. 가문에 대를 잇기 위해, 영지를 수여하기 위해 자식이 필요했고, 누구나 하는 일이었기에 막연하게 자신도 당연히 짝을 찾으리라 여겼다.
급한 일이 아니기도 했다.
자신은 불사의 몸이었다. 갑작스레 병에 걸려 급사할 일도 없었고, 마족 혹은 마물과의 교전 중에 상처를 입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수명이 다하기 전까지는 언제까지나 자식을 만들 수 있었고, 영지를 운영할 수 있었다.
상황이 변했다. 아마데우스와의 계약을 파기했다.
이제는 환절기면 때론 감기에 시달릴 거고, 넘어져 무릎을 찧어 피를 흘릴 수도 있었다.
아마데우스와의 계약이 끊겼다고 불안감에 떨거나 언제 올지 모르는 습격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어도 상황은 이해했다.
이제 슬슬 혼사를 생각해야 했다. 그가 비숏을 만난 건 그러던 중이었다. 라파엘과 몇 번 같이 있는 걸 본 적이 있어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둘의 눈이 마주쳤고, 비숏이 시선을 피했다.
비숏 또한 아가레스를 알고 있었다.
흉흉한 소문이 따라다니는 북부의 대공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얼굴을 보고는 소문이 말도 안 됨을 알면서도 왜 그런 소문이 도는 건지 조금쯤은 알겠다고 감상했다.
그녀는 아가레스를 피해서 걷는 방향을 바꾸었다.
그가 라파엘과 친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 본 아가레스는 그녀가 저를 두려워한다 생각했다.
또 공교롭게도 그 시각, 습격이 있었다. 아가레스가 아카데미에 돌아와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심각한 공격은 아니었다. 그저 아가레스가 아마데우스와의 계약을 다시이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습격자는 지나가며 금속으로 코팅된 종이로 아가레스의 손을 스쳤다. 손등에 붉은 선이 그어지고, 피가 새어 나왔다.
독을 묻히지도 않았고,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처가 낫는지만을 확인하기 위한 공격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가레스는 이에 담긴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건 실수 같은 게 아니라 선전 포고였다. 제 약점을 쑤시기 전에 찌를 지점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본보기는 확실하게 해야 한다.
“죄송합니다! 급하게 가는 길이라···.”
습격자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양 연기했으나 아가레스는 피식 웃었다.
그는 습격자의 목을 쥐고 잡아당겼다. 전에 비한다면 형편없는 완력이었으나 그간 영약을 배가 터지도록 먹고, 가문에 연단법으로 마나를 키워 민간인을 제압할 수준은 되었다.
아가레스는 주먹으로 아래에서 위로 습격자의 턱을 때렸다. 습격자의 치아가 부딪히며 깨졌고,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배후를 캐기는 할 텐데, 일단은 솔직하게 만들어주지.”
“말하겠습니다! 다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아가레스는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온 얇은 단검을 꺼냈다. 그를 꺼내 습격자의 피부를 가늘게 베어 갔다. 습격자는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질렀다. 고작해야 종이가 스쳐 손등을 얕게 베었을 뿐이었다.
그 대상이 아가레스였기 때문에 막 제안을 받았을 때는 무섭고, 겁이 들었다. 그러나 고작 이번 일 한 건으로 막대한 보수를 약속받았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 판단해 수락했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왜 스치며 손등에 얇은 실선이 남을 상처 하나를 남겼다고 이렇게 강경하게 대처한다는 말인가?
아가레스가 칼로 습격자의 피부를 얇게 썰어 나갔다. 습격자는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비숏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꺼풀이 큼지막하게 벌어지며 동공이 수축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기습을 받았다. 그 보복을 하는 거지.”
비숏의 시선이 습격자에게 닿았다. 습격자는 이게 자신에게 찾아온 유일한 기회임을 직감했다. 그는 머리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아닙니다!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서류를 들고 지나가다 부딪혔습니다. 대공님께 상처를 입힌 건 죽을죄가 맞습니다. 하지만 신에게 맹세하고 말하건대 절대 대공님께 상처를 입힐 의도는 없었습니다.”
비숏은 아가레스에게 남은 상처를 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린애가 길을 걷다 넘어져도 이보다는 크게 다치리라. 손등에 붉은 선 하나가 그어져 있을 뿐이었다. 별다른 조처를 한 것도 아닌데 알아서 피가 멎어 딱지가 졌다.
“대공님, 제가 보기에도 그 상처를 가리켜 기습이라 칭하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냥 갈 길 가게나.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아가레스는 비숏이 귀찮았다. 자신이 보기에도 날카로운 종이가 손을 스치고 지나간 것을 공격받았다고 말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거기다 습격자가 맡은 임무는 그게 끝이었다. 후속으로 덤벼들지도 않았는데, 이를 공격받았다고 표현하는 건 남이 보기엔 우습기만 할 거다. 하지만 이는 자신을 죽이기 위한 발판임은 분명했다.
다만, 자신이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말할 수도, 습격자가 어떻게 자신을 해치려 했는지 설명할 수도 없었다.
비숏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대공님의 판단이 틀렸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억울한 사람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니 이번 건은 일을 군에 맡기는 게 좋다고 봅니다.”
“흠···. 그대는 나를 무서워하는 줄로 알았는데.”
“해야만 하는 말은 해야 하는 성격이라서요.”
“재밌군. 더 떠들어보게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아가레스는 눈을 빛냈다. 비숏이 어디까지 참견할까, 어디까지 무례를 무릅쓸까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