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누가 봐도 저와 같은 의견일 겁니다.”
“거기에서 한 명은 빼야겠어. 나는 아니거든.”
비숏은 입을 다물었다.
요즘 들어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감정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일이 잦아졌다.
자신이 뭐라고 떠든들 아가레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거다. 그를 설득하는 건 무리였다.
물러나자.
괜히 아카데미에서 껄끄러운 관계를 더 만들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자신이 떠난다면 저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 고작 지나가며 종이로 피부를 긁었다는 이유로 죽게 될까?.
상상만 해도 꺼림칙했다. 그게 괜찮나? 이건 아닌데.
아가레스는 비숏이 물러나지 않고 말을 고른다고 망설이고 있자 속이 답답했다. 그는 눈에 힘을 주며 비숏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겠어. 왜 그러는지도 잘 알겠고. 그런데, 나는 번거로운 게 싫어서 말이야, 그게 왜 틀렸는지, 뭘 모르고 있는지 하나하나 설명해줄 수가 없거든. 그러니 보고 싶으면 계속 보고 있어. 난 내 할 일을 할 테니.”
아가레스는 습격자의 피부를 얇게 썰었다.
피가 많이 쏟아지지 않게 조심하며 살점을 얇게 뜯어냈다. 습격자는 비명을 질렀고, 비숏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헛구역질이 나는 것을 참았다.
무력감.
비숏은 손발이 파르르 떨리는 걸 느꼈다. 눈앞에서 사람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현실에 속이 뒤틀렸다.
아가레스는 비숏이 자신을 노려보자 히죽거렸다. 그녀에게 은근히 눈을 맞추었다.
“다행히 내가 임자 없는 몸이라서 말이야, 다행이지 않나?”
아가레스는 비숏의 무시해도 말을 이으면서 칼을 움직였다.
“거, 농이었는데 그리 반응할 거 있나? 사람이 팍팍하군.”
“재밌습니까?”
울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몇 번이나 체감했으면서도 감정이 격해질 때면 안구에 습기가 찼다.
비숏은 치아로 입술을 꽈악 누르면서 울음을 참았다.
“사람의 피부를 가르면서 농담을 하실 수 있다니 대단하십니다. 역시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하더니 대공님을 둘러싼 소문이 아주 허튼소리는 아니었나 봅니다.”
“재밌군. 더 말해보게.”
아가레스는 비숏의 비난을 들으며 습격자의 피부를 갈랐고, 고문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습격자는 아무리 소리를 지른들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 고분고분 답했다.
* * *
나는 아가레스의 이야기를 듣고는 머리통을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또 사람을 죽이셨다는 거죠?”
“아니아니, 내 이야기에 포인트는 그게 아니야. 내가 살점 뜯고 있는 걸 그렇게 잘 보는 영애는 처음 봤다는 거지. 당돌하더군. 나한테 그리 화를 내는 영애도 처음이었고 말이야.”
아가레스가 그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딴소리를 했다.
“그것보다, 이거 큰일인 거 아닙니까? 이제 또 누가 덤벼올지 모르는데.”
“아니, 괜찮을 거야. 어지간한 습격은 문제없어. 내가 두르고 있는 건 자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배 이상으로 비싸다네. 어지간한 놈들이 한꺼번에 덤벼오는 게 아니라면야 괜찮아.”
나는 손가락으로 이번에 상처 입은 아가레스의 손등을 가리켰다.
이미 딱지가 지고 뜯어져 상처가 났었다는 자국만 남은 상태였지만, 어쨌든 피를 봤는데, 잘도 조잘거렸다.
“구태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아카데미에 남으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카데미에서 얻으실 수 있는 게 무엇 있다고.”
“음···. 자네의 그 말은 영지로 돌아가라는 거겠지. 가만 보면 자네는 자꾸 날 쫓아내려고 해. 내 어디가 그리 못마땅하나?”
아가레스는 그리 말하더니 손으로 턱을 더듬었다. 그는 뭔가를 깨달았다는 양 아, 신음했다.
“그러고 보니 그래, 그랬었지.”
“뭐가 말입니까?”
“자네가 갑자기 왜 날 쫓아내려는지 알겠어. 자네가 그 영애를 좋다고 쫓아다녔었지 않나?”
“예?”
당황하지 않은 척 힘껏 표정을 관리했는데, 얼굴 근육이 자꾸만 꿈틀거렸다.
아가레스가 내 뒷조사를 했을 거란 것쯤은 알았다. 원래 그런 성격이고, 그럴 능력이 되니까 충분히 할 법했다.
그는 내 예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가레스는 배를 잡고 어깨를 들썩였다.
“부끄러운 과거일 테지, 모른 척하는 것도 다 이해하네. 그래, 자네는 지금 불안할 테지? 하기야 나같이 매력적인 남성이 연적이 된다고 생각하면 부담스러울 법하겠어. 하루라도 빨리 날 밀어내려는 그 심정을 이해하네.”
“그런 거 아닙니다.”
“하하, 그래, 아니겠지. 아니고말고.”
그가 떠들어대는 헛소리를 모두 부정하려다 입을 닫았다.
차라리 이게 잘된 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비숏에게 관심을 꺼트리게 하는 쪽이 우선이었다.
“예, 맞습니다. 실은 제가 그녀를 좋아합니다.”
아가레스는 온몸을 들썩이며 몸이 넘어갈 듯이 웃었다. 그는 한참을 웃어대고는 겨우 진정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잘 알겠네. 내 그간의 친분을 떠올려보니 도저히 자네의 연적이 될 수는 없겠어. 흐하하하. 잘 안 될 거 같지만, 그래도 응원하고 있겠네. 잘 해보게나.”
이거면 좋았다. 나는 만족했다.
“그래서 들은 정보는 뭐가 있습니까?”
내가 바로 대화 주제를 바꾸려 들자 아가레스는 킥킥거리며 웃더니 이해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게도 역시 뭐 아는 게 없는 놈이었어. 놈을 통해서 뭔가를 잡기는 무리네.”
“그래도 들으신 걸 공유해주십시오.”
“알았네. 별거 없으니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 * *
제프린은 얼마 전 대련에서 레오에게 패배했다. 검기를 쓰지 않은 탓이었고, 방심한 게 원인이었으나 어찌 됐건 간에 패배는 패배였다.
또 졌다.
거기에 라파엘과 함께 아마데우스를 협공하면서 확신했다. 지금 라파엘과 싸우면 반드시 진다.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 검을 잡았을 때 제프린은 누군가를 목표로 한 게 아니었다. 하늘에 닿을 듯 강한 힘을 바라지도 않았다.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킬 힘이면 충분했다.
그랬었다.
문제는 그것조차 어려울 듯했다. 점점 더 목표가 위로 올라갔다.
라파엘로부터 도움을 받아 아마데우스를 막아냈다. 빚을 졌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그를 상대할 힘이 필요했다.
‘여기에서는 무리야. 기사단으로 돌아가야 해.’
기사단을 떠나 아카데미에 와서는 독학으로 수련했다.
근력을 키우고, 좀 더 교본에 가깝게 검술을 교정하는 데만 집중했다.
‘이거로는 부족해.’
기사단으로 돌아가 수련을 받는 쪽이 성장만을 따지면 더 우월했다.
여기에 남은 건 비숏을 위해서였다. 자기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이런 걱정은 아가레스가 아카데미 내에서 공격을 받으며 더 커졌다.
아카데미도 완전히 안전한 공간은 아니었다.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눈을 감고 곰곰이 방법을 찾아봤으나 실패했다. 해서 현재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실행에 옮겼다.
수면 시간을 줄였고, 검술과 관계없는 강의라면 빼먹었다. 수련하고, 수련했다. 설탕과 붉은기가 도는 고기를 식단에서 지웠다. 물 외에 다른 음료는 마시지 않았다.
그러자 몸에 에너지가 부족했다. 안 그래도 신장에 비해 체격이 크지 않았는데, 체중이 떨어졌다. 사람이 말라 갔다.
완력은 떨어졌으나 그만큼 몸은 민첩해졌다. 이전에 자신보다 반드시 강하다고 할 수는 없는 몸이었으나 나름대로 길을 찾았다.
이전에 제프린은 누구를 상대로도 비슷한 힘을 보여줄 수 있게끔 성장해왔다. 사람이 아니라 혹 마수 따위와 싸우더라도 이길 수 있게 훈련했다.
‘모든 걸 손에 넣을 수는 없어.’
원작에 제프린은 이안과 아가레스를 상대할 수 있게 다방면으로 능력치를 키웠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부터 장기였던 속도뿐이 아니라 파괴력을 낼 수 있게 힘을 키웠고, 기술을 연마했다.
그 상대가 라파엘뿐이라면 달랐다. 힘은 부족해도 괜찮았다. 인간의 몸뚱이를 써는 데는 칼질 한 번이면 충분했다.
제프린은 다른 이들에게는 지더라도, 비슷한 수준의 마수에게 이길 수 없더라도 같은 칼잡이를 상대로는 반드시 이기겠다고 다짐했다.
레오에게 한 방 먹었던 기억은 잊었다. 검기를 쓴다면 상대도 되지 않을 놈이었다. 남은 건 라파엘이었다. 그를 이기기 위해서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그러던 때 라파엘이 찾아와 말했다.
“야, 너 나한테 빚 있잖아.”
제프린은 피식거렸다. 이렇게 과감하게 그때 일을 언급할 줄은 몰랐다. 라파엘은 수금하러 온 일수꾼처럼 말했다.
“그거 퉁 치고, 나랑 약속 하나만 하자.”
“뭡니까?”
“내가 너랑 싸우기 싫어서 그래.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까 우리가 안 싸울 수도 있겠다 싶어서.”
제프린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라파엘이 말을 이었다.
“우리, 상대가 먼저 안 덤비면 싸우지 말기로 하자.”
“저는···.”
“너는 비숏도 포함해서. 내가 너희 안 건드리면 우리 서로 신경 쓰지 말고 살자고. 어때? 괜찮지 않아?”
“만약에 비숏 님이 저에게 당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면···.”
“무시해. 그게 약속이야. 대신에 네가 이걸 약속해주면 내가 먼저 비숏을 건드리지 않을 거야.”
라파엘은 손으로 허리춤에 칼을 툭툭 두들기며 제프린의 대답을 재촉했다.
“제가 약속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난 나를 적극적으로 방어하겠지. 야, 너무 깊게 생각할 거 없어. 나는 그냥 걱정거리 하나를 덜고 싶은 거니까.”
“예, 좋습니다. 그리 하죠. 대신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뭔데?”
“이번 학기 동안만 비숏 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부담이 안 되는 선에서 막아주실 수 있습니까?”
제프린은 크게 기대하지 않고, 말했으나 라파엘은 담담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근데 너 왜 그렇게 살이 빠진 거야? 밥은 안 챙겨 먹어?”
“계획대로 먹고 있습니다.”
“확실해? 밥 굶게 생기면 찾아와. 밥 한 끼는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