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아델은 죽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목격했다. 아무래도 돈 문제인 듯했는데,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기에는 아델은 12살에 불과했다.
아버지를 죽이는 저 사내도 고작해야 10대 중반 혹은 후반에 불과했지만, 이미 반쯤 몸에 성장이 끝난 채였다.
지금 그는 아버지보다 머리 하나는 컸고, 체격이 두터웠다.
겁먹은 아델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아가레스와 그의 병사들이 영지에 모든 걸 휩쓸어가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머릿속을 갖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삶이란 언제라도 망가지는 것이고, 자신은 한없이 나약해 가족이 죽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버지가 죽고, 영지를 빼앗겼다.
빈털터리가 되었고, 가난이 찾아왔다. 빵 하나를 두고, 자신이 먹을까 혹은 동생에게 줄까 고민하고 있으면 죽음이 간절했다.
동생이 고열에 시달려 앓을 때 약값이 아까워 망설이고 있자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니, 그건 현명한 판단이었다. 약값은 퍽 비쌌다.
그런데, 동생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었다. 당장이야 아파 울겠고, 괴롭겠지만, 시간만 지나면 나을 병이었다. 그러니 약값을 아껴 빵을 사는 쪽이 맞았다.
물론 그 고민이 옳고 그름이 중요하진 않았다. 그런 고민을 해야만 했다는 사실이 증오스러웠다.
아델은 어린 시절 겪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일을 겪으며 독하게 성장했고,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그중 성인이 될 때까지 가장 도움이 됐던 건, 이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것이었다. 그다음은 언제라도 삶이 망가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성인이 된 아델은 나름 뒷골목에서 성공했다고 자부했다.
본인은 자그마한 과도 하나 제대로 못 다뤘으나 사람을 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었고, 사람을 잘 속였다. 그렇게 중소 도시에 깡패가 된 아델은 생에 의미를 찾지 못해 자살을 고민했으나 동생을 보고 살았다.
제 동생, 아벨.
아델은 제 동생에게는 저와 다른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다. 더러운 걸 몰랐으면 했고, 그 방법의 하나로 아카데미에 보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아델은 거기에 자격지심이 있었다. 아벨은 머리를 쓰며 살기를 원했다.
그렇게 아카데미 중등부에 입학한 아벨이 아델에게 편지를 붙였다. 원수 중 원수인 아가레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고.
뒷골목에서 활동한 아델은 흑마법에도 나름의 견식이 있어 사태를 파악했다.
아가레스가 힘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델은 바로 사람을 풀어 일을 확인했고, 다시금 삶의 불씨가 타오르는 걸 느꼈다.
동생이 자립할 때까지만 지켜보겠다는 것에서 제 꿈을 이루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아가레스를 죽인다.
그는 계획을 짜며 방향을 정했다.
아카데미를 침공하는 건 어려웠다. 거기에 많은 머릿수를 들이밀기도 어려울뿐더러 한가락 하는 놈이 지나치게 많았다.
반대로 아가레스가 제 영지에 있을 때도 무리였다. 이 시기에는 오히려 머릿수가 부족했다. 북부 상비군과 같은 수를 끌어모은다고 해도 무구와 훈련받은 질이 달랐다.
이거 어떻게 쥔 기회인데, 이렇게 놓쳐야 하는가?
아델이 절망하던 중 아가레스가 경매장에 종종 얼굴을 보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기는 매주 주말이었다. 곁에는 익스퍼트 급의 기사 하나가 전부였다.
아델은 만전을 다하기 위해 저와 비슷하게 아가레스에게 원한이 있는 이들에게 연락했고, 무기와 아티팩트 하나를 지원받았다. 아가레스를 칠 깡패의 수를 늘리라고 돈을 주는 곳도 있었다.
그렇게 모든 걸 털어 넣은 채 아가레스에게 덤벼들었다.
평생을 꿈꿔왔던 순간이었다. 오늘을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아델은 아가레스의 표정을 보자 어딘가 아리송했다. 이렇게 많은 수를 끌어모아 왔는데도 여유로웠다. 죽음이 무섭지 않은 걸까?
그게 아니면 이 숫자를 상대로 자신이 있는 걸까?
아델 또한 라파엘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소드 익스퍼트 급의 기사가 곁에 붙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미리 부하들에게 일러주었다. 이를 명목으로 많은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상대를 맡기기 위해 성능 좋은 아티팩트와 실력 있는 패거리를 몇이나 데려왔다.
‘아니, 이렇게 고민할 거 없어. 확인해보면 될 일이야!’
“죽여!”
아델은 공기를 쫘악 빨아들인 다음에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명령과 함께 두 명의 적을 향해 패거리들이 몰려들었다.
라파엘은 예상한 것보다 강했다. 한 손으로는 검기를 두른 검을 휘둘렀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마법을 쏴 순식간에 아군의 수를 줄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까앙!
검기에도 버틸 수 있는 마법검.
이번 작전을 이유로 빌려 온 아티팩트였다. 마법검을 쥔 남자는 베일리였다. 패거리 중 경력과 칼질 솜씨 모두 으뜸인 놈이었다.
그는 오로지 시간을 끌 작정으로 도망치며 라파엘의 틈만 콕콕 찌르며 발목을 붙잡았다.
이 틈이었다.
이때 아가레스를 죽이면 그간 바라왔던 염원이 풀렸다.
퍼어어어엉!
불덩이에 깡패 하나가 날았다. 전류가 깡패 하나를 감전시켰다. 돌덩이가 깡패의 머리를 깨부쉈다.
아가레스가 손가락을 하나 들 때마다 반지가 반응하며 내장된 마법을 내뿜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어둠에 물들었다. 업체마다 흑마력의 질을 시험해본답시고, 조금씩 얻어와 흡수했다. 그 양이 적다고는 해도 한 번의 교전이라면 충분했다.
콰아앙!
아가레스는 주먹질 한 번으로 사람의 배를 뚫었다. 그는 시체를 발로 뻥 걷어차 팔을 뽑았다. 시체는 그대로 날아가 패거리 중 하나를 때려눕혔다.
아델 패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필요하다고 예상되는 수보다 배로 많은 깡패를 모아왔고, 전쟁에서나 쓸 법한 무기까지 들려줬다.
스으으윽!
칼 하나가 아가레스의 몸을 뚫고 지나갔으나 곧 피가 멎었고, 살점이 아물어 들었다. 이를 본 아델은 절망감에 손을 떨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동생이 전해준 정보가 거짓이었거나 그게 아니면 요 며칠 사이에 아가레스가 새 힘을 얻었다.
어떡하지?
초마다 패거리의 수가 하나씩 줄어갔다. 도망칠까? 이번 같은 기회를 쥐는 건 다신 없을 일이었다. 이번에 물러난다면 아가레스에게 복수하는 것을 영영 포기하는 걸 의미했다.
‘죽자!’
아델이 우두머리를 차지한 건 잔혹한 성정과 남을 속이는 재주 덕이었지 칼질 솜씨는 허접했다. 그는 죽을 각오를 하고 아가레스에게 달려들었고, 목을 붙잡혔다. 아가레스는 한 손으로 아델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네가 대가리였었지. 그래, 잠시 쉬고 있게나!”
그대로 바닥에 내리쳤다. 아델은 그 충격에 척추가 부러져 숨을 헐떡였다. 아가레스는 아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남은 패거리를 하나씩 줄여갔다. 어느새 라파엘도 마법검을 부쉈고, 상대를 쓰러트렸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둘은 순식간에 잔당을 정리했고, 아델 하나만을 남겼다. 아가레스는 라파엘을 보며 말했다.
“여기부터는 어른들이 하는 일을 해야 해서 말이야, 마음씨 유약한 자네는 잠시 산책이라도 하며 마음이라도 정리하고 오게나.”
“됐습니다.”
고문을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아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 *
“하아···.”
언젠가 한 번 이런 일이 터질 거 같긴 했는데, 그게 오늘이었다.
아가레스가 미웠다.
그와 있을 때마다 문제가 터졌다.
그것도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종류의 문제였다
멀리서 실눈으로 그가 하는 짓을 흘겨봤다. 언제라도 사람에게 고통을 가할 수 있게 그는 송곳 같은 칼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패거리의 우두머리한테서 정보를 뽑아냈다.
우두머리는 종종 비명을 질렀는데, 독기가 아주 강했다. 돈을 받고 아가레스를 죽이려한 게 아니라 꼭 그를 죽여야만 해서 덤벼든 듯했다.
그의 계획이 실패한 건 예상외로 아가레스가 강해서였다.
아가레스가 무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내가 잡졸을 쓰러트리는 사이에 그가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의 아티팩트가 뿜어내는 마법들은 하나하나의 위력은 별 볼 일 없어도 영창이 없이 즉시 튀어 나갔다.
게다가 뒷골목 양아치 하나를 죽일 위력은 있어 다수의 적을 상대로는 제법 괜찮았다. 거기에 그가 흑마력을 조금이나마 지녔다는 게 크게 작용했다. 아가레스의 명성은 익히 알려졌었다.
이들이 용기를 내서 습격할 수 있었던 건, 아가레스가 힘을 잃었다는 소문 탓이었다.
그들은 이제 그 소문이 거짓이라 믿을 테니 전의가 꺾일 수밖에.
그 덕에 수월하게 위험을 벗어났다.
습격자의 우두머리는 기세 좋게 버티는 듯했는데, 채 10분이 지나기 전에 몸을 벌벌 떨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가레스는 적의 우두머리 목을 비틀어 죽이고는 내게 걸어왔다.
“이제까지 아카데미에서 나를 노렸던 것도 다 저놈이 사주한 것이었네.”
“대공님을 왜 죽이려 했다 합니까?”
“은원. 저놈의 아비가 내게 돈을 빌렸는데, 배를 째라지 않나? 그래서 쨌네.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겼고.”
“그게 다입니까?”
“놀랍게도 그래. 그런 이유로 원한을 가져 날 죽이려 했네. 보통 같으면 빚을 진 제 아비를 원망할 텐데 말이야. 이봐, 그렇게 보지 마. 다 진실이라고. 내가 이런 거로 자네를 속이겠는가? 난 내 할 일을 했을 뿐이었지.”
“예. 알겠습니다···.”
내가 납득한 척 대답하자 아가레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끝인가? 원래 같으면 나를 좀 더 추궁했을 거 같은데.”
“몸을 쓰고 나니 피곤해서 그럴 기운이 없네요.”
“나 때문에 고생만 하는 거 같아 미안하네.”
“이거 다 빚으로 달아둘 겁니다. 나중에 갚으셔야 합니다.”
“아아, 물론이지.”
이제는 그만 돌아가자고 아가레스에게 눈짓하자 그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다시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건 하나 없다는 말이지. 약속을 안 지킨 건 저놈의 아비였는데 말이야···. 그런데 앞으로는 좀 자중하도록 하겠네.”
“뭘 말입니까?”
“알아들었으면서 뭘 또 묻나? 슬슬 움직여야 하니 그만 가지.”
사람을 좀 덜 죽이겠다는 말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