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아카데미에서 활동하며 이안은 이곳이 더 넓은 세상이 맞는 걸까 고민했다. 교수들의 수업을 들었고, 주변 학생들과 나름대로 어울리기도 했다.
하지만 남는 건 없었다.
강의시간 동안 교수들이 떠들어대는 내용 중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이 종종 나왔지만, 지엽적인 지식에다 실용성이 없었다.
굳이 머리에 넣을 필요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들로부터 뭔가를 배워 성장한다는 건 꿈 같은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사람은?
이안은 주변을 둘러봤다.
학생들은 자신을 동경하거나 질투했다. 환심을 사기 위해 아양을 떨기도 했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뱉어댔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흥미롭지 못했고, 점점 더 함께 있는 시간이 지루해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 그는 진지하게 아카데미 자퇴를 고민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자퇴를 하면 뭘 할까?
마탑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마탑의 구성원들을 가르치고, 또 나름대로 과거의 마법을 연구할 것이다. 그거면 된 건가? 카테인은 왜 그런 유언을 내렸을까?
‘내가 행복하길 바라서야.’
막연하게 오랜 시간 살아온 환경에서 벗어나 목적 없는 삶을 이어가는 중이었으나 이거면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릴 적과 비교하면 풍족하기만 한 삶이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어 많은 이들이 제 삶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쯤은 인지했다.
‘아카데미를 떠난다면 뭘 할까?’
아카데미의 생활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어도 꼭 관둬야 할 이유까지는 없었다. 무엇보다 관두고 마땅히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여행은 귀찮았고, 뭔가 욕망하는 바가 없었다.
이안은 이를 제 문제라고 인식했다.
태생부터 욕구가 적었다.
이게 좋은 걸까, 나쁜 걸까 고민했다. 이게 제 인생이 행복해지는 데 막는 걸림돌이라면 약물과 마법으로 바꿀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절대 하지 마. 이상하잖아. 그런 거. 사람이 기계야?”
라파엘은 아가레스의 일을 마무리하고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그래서 경매장에서 어떻게 됐다고 했지?”
“싸웠다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놈들이 좀 많았지. 아가레스는 항상 사람 괴롭힐 칼을 들고 다니더라? 아니 무슨···.”
이안은 라파엘로부터 경매장의 일을 듣고 말했다.
“어울리지 마. 그놈이랑.”
“그러게. 같이 있을 때마다 문제가 생겨. 언제 연을 끊든가 해야지.”
이안은 한숨을 뱉었다. 라파엘의 저 말이 다 거짓임을 알았다.
카테인은 실력 있는 마법사였다. 당시에 어렸던 이안의 눈에는 더더욱 대단한 마법사로 보였다.
그랬던 그도 어이없을 만큼 간단하게 죽었다. 이안은 라파엘 또한 그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사람은 쉽게 죽는다.
아가레스는 사람 목숨을 가볍게 놀렸고, 어지간한 위험을 위험이라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그는 등신이었다. 그의 옆에 있다가는 라파엘 또한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놈이 뭘 해준대?”
“왜?”
“보상 없이 네가 그놈을 돕지는 않을 거 아니야.”
“나중에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힘 써준대.”
“그걸 믿어?”
“이런 거로 거짓말하지는 않을 거야.”
이안은 라파엘이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게 미숙하고, 기피한다는 걸 알았다.
그걸 무릅쓰며 아가레스를 돕는 이유는 뭘까, 고민했는데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묻는다고 그가 사실대로 말해주지도 않을 터라 한숨만 토했다.
“너는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뭐할 거야?”
이안의 질문에 라파엘은 미간을 좁혔다.
“아직은 생각해본 적 없는데, 아마 영지에 늘어져서 쉬겠지. 아마도.”
“그게 좋아?”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서 쉬면서 주는 밥 먹는 거?”
“어.”
“누가 반드시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면 싫을 거 같은데, 언제라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건 좋아. 그러니까 그렇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손에 쥐려고 지금 애쓰는 거지.”
“졸업하면 난 뭘 할까?”
“시간 많잖아. 생각해봐.”
라파엘이 떠나고 홀로 남은 이안은 과거를 더듬었다.
카테인은 무엇을 위해서 살았을까? 그는 기계처럼 생활했다. 언뜻 보면 목적 없는 삶이었는데, 그가 늘 하는 말이 있었다.
마나핵의 완성.
마나핵. 마석과 비슷한 도구였는데, 성능이 떨어지는 대신에 생성이 용이했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도 마법사의 보조 없이 저장된 마법을 발동했다.
마나핵을 사용하면 보통의 아티팩트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적은 값으로 마도구를 생성할 수 있었다. 카테인은 디마겐에게 상처 입기 전까지만 해도 이를 해내는 것을 목표로 노력했다.
‘해볼까?’
이안은 사람은 죽으면 끝이라 생각했다. 죽은 사람을 위한 제사, 추모 따위는 무의미하다고 간주했다.
카테인이 이루고자 했으나 못 다 이룬 것을 대신 완성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았고, 할 일은 없었으니 한 번 손을 데 볼 이유로는 충분했다.
그는 곧바로 마탑으로 이동해 그간 카테인이 쌓아왔던 연구 자료를 쓸어 담았다.
* * *
아가레스의 문제를 해결했다. 최근 들어 그가 공격받은 이유는 워낙 많지만 하나만 딱 꼽아 말하라면 힘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간 그가 지은 죄가 컸고, 원한을 많이 샀으나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던 건 그가 지닌 힘 덕분이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힘으로 보복 따위를 미리 눌러뒀었다. 이제 힘을 어느 정도 복구했으니 걱정할 필요가 사라졌다.
저번 주였다면 아가레스를 달고 다닌다고 시간이 부족했을 새벽. 연병장에 나와 발을 움직였다. 카타리나가 가르쳐준 대로 보법을 연마했다. 점점 더 기술이 몸에 익어오는 게 느껴졌다.
신체 단련은 과학이다. 무리한 훈련은 오버 트레이닝을 불러와 안 하니만 못했다. 하지만 기술을 연마하는 건 달랐다. 자세가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몸만 유지해도 시간을 투자한 만큼 성장했다.
땀에 옷이 푹 젖어 피부에 달라붙었다. 가을이라 새벽바람이 은근히 쌀쌀했는데, 장시간 훈련에 땀이 쏟아졌다. 하늘을 봤을 때는 해가 뜨고 있었다. 그리고 해보다 더 밝은 폭발이 있었다.
푸아아앙!
마탑의 옥상에서 터진 푸른 섬광이 아침을 알렸다. 저 폭발이 조금만 더 빨리 터졌어도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이 원성이 자자했을 거다.
폭발을 일으킨 범인은 아마 이안일 듯했는데, 괜히 관심을 주지 않기로 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무슨 일인지 궁금해, 혹은 큰일이 터진 건 아닌가 걱정해 냅다 사건이 발생한 방향으로 뛰어갔을 거다. 지금은 달랐다.
귀찮았다.
무슨 일이 생겼으면 알아서 잘 풀겠지.
또 연달아 폭발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 한 번으로 끝났으니 별일 아니겠지 싶어 내 할 일에 집중했다. 그렇게 훈련하고, 씻고, 아침을 먹고, 아카데미의 수업을 받은 후에 이안에게 물었다. 그 폭발은 뭐였냐고.
“실험하다 실패했어.”
그는 마나핵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뭔지는 알았고, 왜 그걸 만드는지도 알 법했다. 내가 가만히 수긍하자 그가 말했다.
“마나핵이 뭔지 안 물어봐?”
“아.”
나는 한 박자 늦게 그에게 그게 뭐냐 물었고, 그가 설명했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인지라 적당히 맞장구치며 이해한 척했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는 아니었다. 그냥 그런 게 있다고 읽었을 뿐이니 아는 게 없었다.
이후, 이안은 실험에 열중했다. 제프린은 아카데미를 떠났다. 아가레스는 보충한 힘과 관련된 여러 문제로 바빴다. 마지막은 나비에였다.
“잠시 황궁에 가게 됐어요.”
그 말을 하는 표정이 퍽 밝은 걸 보아하니 약혼이 잘 풀려가는 듯했다.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하하, 그럴걸요?”
그녀는 올 때 선물 사 온다는 말을 하고는 아카데미를 비웠다.
꽤 오랜만에 혼자 지내는 시간이 늘었다. 그 시간을 그대로 보법에 투자했다고, 그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무기를 들지 않고, 발을 놀리는 데만 집중하면 카타리나가 가르쳐줬던 기술을 그대로 쓸 수 있었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칼을 휘두르면서 발을 놀리는 걸 연습했다. 칼을 들고 있기만 해도 중심이 흔들려 자세를 취하는 게 어려웠는데, 휘두르기까지 하니 난이도가 확 뛰었다. 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시간이 흘렀다.
“반쯤 성공했어. 이거 봐.”
이안이 전구 하나를 들고 왔다. 그는 전구를 얇은 선의 뭉텅이가 이어져 만든 구체에 연결해 불을 켰다. 마나핵을 이용해 마도구를 가동한 것이었다.
마나핵은 생산이 수월한 대신에 단점이 여러 가지 있었다.
우선은 출력이었다. 한 번에 낼 수 있는 에너지가 적었다.
다음으로는 그 안정성이었다. 전에 이안이 사고 친 것처럼 폭발하지는 않아도 작은 충격에도 망가졌다.
나는 놀란 척 박수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단하네. 마나핵을 만들겠다고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만든 거야?”
“혼자 한 게 아니라서 빨랐어. 전에 연구해둔 사람이 있어서 그 자료를 가져다 쓴 거니까.”
“아아. 이제 그거로 뭘 할 거야?”
“그건 아직. 그냥 하고 싶어서 한 거라서.”
보통 같으면 그 기술로 어떻게 돈 벌지부터 고민할 텐데 특이하다,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구를 내게 내밀었다.
“줄게.”
나는 누가 선물을 줄 때면 꼭 활짝 웃는 버릇이 있었다. 기계처럼 그에게 웃으며 양손으로 전구를 받았다.
나중에 마나핵이 대중화됐을 때 최초로 기술을 적용한 물건이라 판매하면 꽤 큰돈을 벌 수 있겠다는 감상이 들었는데, 선물을 받으며 이런 생각이나 하는 내가 미웠다.
선물이란 건 사람의 마음이 담긴 거라 그 쓸모나 유용성을 따지지 말고 고마워하는 게 맞는데, 그게 잘 안 됐다.
“고마워. 잘 간직할게.”
그래도 이안의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연기는 좀 되는 듯했다. 내 반응에 퍽 만족하고 있었다.
“버리면 안 돼. 나중에 잘 가지고 있나 확인할 거니까.”
하기야.
이렇게 장식품으로의 기능밖에 없는 선물은 이사 갈 때 버리는 물건 1순위기는 했다.
“알아. 안 버릴게.”